[에세이] 이것도 글이라고

써야 한다는 건 아는데, 종이 위에 쓴 것이 밉게 보인다.
글 입력 2023.09.0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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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가끔은 이 무한한 가능성이 감당되지 않는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다보는 기분이다. 망쳐버릴 것 같아. 그러나 내가 쓰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도 아닌 상태로 남는다. 그러니 무엇이든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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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썼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써야 한다는 건 아는데, 종이 위에 쓴 것이 밉게 보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아직 난 부족하구나. 성찰해봤자 써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학할 시간에 뭐라도 더 보고 생각하고 써야 하는데. 작게 적어둔 것마저 참 못나 보여서 밖으로 꺼내 놓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욕심을 내려놔.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완성은 결국 포기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알지만 마음은 고집이 세다. 어여쁘고 잘난 것의 모양새를 알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더 움직이질 못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 도와줘. 들은 답이 성에 안 찼다. 도대체 왜 물어본 거야? 미안해.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또 골몰하다가, 책을 들추고 영화를 틀었다가 시집을 소리 내어 읽고 오디오북을 듣고 소설을 읽다 메모하고,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들어도 본다. 그러다 결국 또 여기다. 한 편의 글이 되지 못한 짤막한 단상들, 구절들이 노트북 화면 위에 우수수 생겨난다.


글이란 뭘까, 문화란 뭘까, 예술이란 뭘까, 비평은 어떻게 쓰는 거지, 에세이 쓰는 법, 리뷰 쓰는 법, 글감 찾는 법을 검색한다. 정의와 조언을 토대로 또 썼다가 지웠다가 아까워서 저장했다가 삭제했다가를 반복한다.


아, 정말이지 뭘 써야 할까요? 마중물을 들이붓고 펌프질하고 양동이를 던져넣으며 내 안의 우물을 자극해 보지만, 물이 나오다 말다 이걸 나온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따위를 검색창에 써넣고 또 지운다. 차라리 자는 게 낫겠어.


다음날,


첫 문장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글을 계속 써나가고 싶다. 규칙적으로 쓰려고 노력도 한다. 루틴을 만드는 건 강박이 심해져서 포기했고 의식하지 않고 그냥 여유가 나면 쓰려고 한다. 책도 자주 보려고 한다. 노력은 언제나 한다. 글이 안 써져서 울고 싶은 건 아닌데, 울어야 좀 절박해 보일 것 같다. 어떤 작가에 대한 판타지 같은 것들이 문제다. 지금은 그 천재 작가가 살던 시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쓰면서 살고 싶다는 사람까지 그 판타지에 익숙하다니.


글이 써지지 않아서 괴로울 때마다,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해야 하는 것은 책임을 지고 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그리고, 글이, 글 쓰는 내가 나의 전부가 되면 안 된다. 사람이 언제나 먼저여야 한다. 일상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야 하고, 사람이 없으면 글도 없다. 사람보다 중요한 글도 예술도 없다. 그래서 펜은 가벼운 동시에 가벼워서는 안 되고, 무거운 동시에 무거워서도 안 된다.


금지부터 만들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는 글 쓰는 사람이기 전에 사람이고 싶으니까. 사람에게 실망하지만, 사람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걸. 어쩌면 우리의 천성은 나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을 믿고 싶다. 믿음이 있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믿으며 손을 뻗는다. 왜냐하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으니까.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바보 같더라도 믿는다.


믿어야 한다. 내가 내일도 쓸 수 있을 거라고, 모레도, 앞으로도.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시작할 수는 없듯이. 언젠간 되겠지. 쓰겠지. 완성하겠지. 몸부림을 무의미하다고 말하진 말자. 사실 나는 제대로 쓰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을 했다. 하지만 시간의 선상에서 본다면, 나는 계속 쓰고 있었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앞으로 걷고 있었다. 믿음에 보답받지 못해도 사실 상관없다. 사실 너무 신경 쓰이고 무섭지만 상관없는 척하겠다.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하면서 즐거우면 되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음을 내려놓기로 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쓰되, 잘 쓰기보다는 쓰고 싶은 대로 써보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잘 쓰는 방법. 읽고 싶은 글을.


그래서 쓴다.


이것도 글이라고.



[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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