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형체 없는 우월감 [영화]

속이 빈 우월감은 쉽게 무너진다.
글 입력 2023.08.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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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교내 영화학회에 들어갔다.
 
소속에 대한 어떠한 우월감이었는지, 나는 영화를 단순히 재밌다, 재미없다로 평가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영화는 누군가의 절절한 인생이자 감정의 예술적인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업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에 한순간의 즐거움 이상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평소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것과 맞물려 속해 있던 학회의 행사로 그 해 전주국제영화제에 방문하였다.
 
 

영화잠식 포스터.JPG

 
 
제일 먼저 감상한 영화는 박기형 감독님의 <잠식>이었다.
 
평소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월드 프리미어 작품으로 당시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선택했다. 그리고 GV(Guest Visit: 관객과의 만남, 영화관계자가 관객들과 영화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어 영화 상영 후 감독님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최초 개봉’이라는 단어는 마치 내가 영화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어 누구보다 빨리 보고 싶어 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또한 영화가 끝나고 바로 영화관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술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작품에 관해 제작자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작품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객체가 아닌, 주체적으로 작품을 해석해 나간다고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난 작품에 대한 기대보단 남들과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형체 없던 영화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불이 켜졌다. 영화 시작 전과는 또 다른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곧바로 찾아온 GV, 질문이 있냐는 말에 재빨리 손을 들고 마이크를 받았다. 봄이라 추운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몸이 떨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려 애를 썼다. 형체 없는 우월감은 자신감을 가져다주지는 못한 것 같았다.
 
“영화 잘 봤습니다. 즐거운 작품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에서는 주로 파란 계열의 차가운 색만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 비주류의 색인 보라색 같은 몽환적인 색을 사용하신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있나요?”
 
나의 긴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별 이유는 없어요. 그냥 평범한게 싫어서요. 변화를 조금 주고 싶었거든요”
 
상영시간 내내 내 머릿속을 꽉 채운 궁금증은 그렇게 쉽게 결론 나고 말했다. 갓 스무 살의 어린어른이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큰 의미가 없다니. 영화의 핵심적인 장치를 파악하고 큰 부분을 알아내 질문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나의 형체 없던 우월감은 모양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겉은 거대했으나 속은 비어있던 우월감은 그냥이라는 단어에 잠식되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 나와 우월감이었다.

 
[박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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