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시간을 진짜로 만들어드립니다 [공간]

큐레이션 독립서점, 갑을문고
글 입력 2023.08.0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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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름이 뭔가요?"

 

 

월곡역의 어느 한 독립서점 인스타그램 계정 게시물에 종종 이런 댓글이 달린다. 홍보나 마케팅 전략 없이, 책의 일부 및 크라프트 포스트잇만으로 간결하고 깔끔하게 글을 업로드한다. 책의 일부를 맛본 독자들은 책을 궁금해하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의 이름은 ‘갑을문고’다.

 

 

 

독립서점 갑을문고


 

갑을문고는 서울 6호선 월곡역 근처, 동덕여대 대학가의 어느 한 상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레트로한 디자인으로 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사각형 간판이, 날 마주할 때면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출입문은 두 곳이다. 하나는 갑을‘문고’로, 또 하나는 갑을‘문구’로 바로 향하는 문이다. 서점과 문구점이 이어져 있기에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갑을문고로 향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문구점 출입구를 택했다. 갑을문구 너머로 보이는 갑을문고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친근하다. 나무 기둥의 색처럼 진한 고동색 책장과 따듯한 노란 조명이, 흰 조명을 온전히 받던 문구점과 구분되어서 독보적이다. 또 서둘러 향하고 싶은 포근함을 풍긴다.

 

그런 분위기를 한 겹 정도 떼어내 살결이 맞대어 느껴보기로 한다. 책장 위로 가지런히 나열된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먼저 띈다. 소설, 시, 수필 등 다채로운 장르의 서적들이, 이곳의 큐레이션 방식대로 나뉘어져 있다.

 

 

  

포스트잇 큐레이션


 

이 많고 많은 서적에도 공통점이 있다. 바로 책 위에 붙은 ‘포스트잇 감상평’이다. 이곳 서점의 특장점이기도 한데, 진열된 서적들에 근무하시는 직원분들의 감상평이 갈색 크라프트 포스트잇으로 붙어져 있다. 길지 않아 한눈에 들여다보기 좋은 글들로, 해당 책이 누군가에게 어떤 울림을 가져다주었는지 새롭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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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한 권. 가만히 들여다보고 또 누군가 남긴 감상평의 긴 꼬리를 쫓아가본다. 이미 널리 알려진 책들을 포함해 처음 마주하지만, 제목이 흥미로운 책들도 많다. 또 다소 딱딱해 보이고 흥미가 떨어지는 책들도 있다.

 

누군가는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누군가는 비슷한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책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한다. 얼핏 보기에 비슷해보이는 이 말들처럼, 자기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이리저리 맞대어보며 키를 재보는 것이 나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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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몇몇의 짧은 글들은, 또다른 한 줄기의 빛으로 내린다. 내겐 없는 시각으로 책을 해석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누군가 삶의 일부를, 활자를 통해 안아주고 싶다고 표현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작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곳에 포옥 안기고 싶어 몸을 맡길 때면, 그 빛을 내 안에 품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을 얻은 채 한동안 우두커니 그 빛을 바라보며 책 앞에서 꽤 오랜시간 머물렀다.

 

 

 

'진짜' 시간을 선물하는 공간


 

사람이 어떤 것에 몰입하면 더 높은 정도의 중력이 작용한 듯 시간의 흐름이 유연해진다. 내겐 이 서점이 그렇다. 작지만은 않은 서점이라, 다양한 종류의 책과 그에 걸맞은 수많은 포스트잇 감상평을 읽다 보면, 시간 감각을 잊게 된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책과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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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둘러 다시 출구로 가는 길. 미처 둘러보지 못한 구역과 책들이 아직도 내 두 눈에 선하다. 그것들을 등지고 서점을 나와야 했던 현실이 내겐 꿈같다. 대신,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이곳에서의 유연한 시간이 진짜 같다.

 

이런 감상평을 나도 크라프트 포스트잇에 늘어놓을 수 있다면. 속으로 애써 못다한 말을 삼키며 떠나는 발걸음에 생각을 줄줄이 매달아 본다. 그리고 그 긴 꼬리가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머물러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끔 서슴없이 그 공간이 떠오른다. 방황하며 잃은 내 몸의 일부를 찾고 싶을 때면 더 그렇다.

 

이 공간에서의 울림은, 온 우주가 파도처럼 철썩이며 내 마음에 때린 자극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써둔 포스트잇들이 서점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던 내 주변으로 거대한 중력을 이루며 내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시간보다도 더 '진짜'였던 갑을문고에서의 시간.

 

여지없이 책과 주변을 둘러싼 이야기에 흠뻑 빠지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방문하길 추천한다. 아마 글을 읽는 당신도 그곳에서의 시간을 진짜라고 믿게 될 것이다.

 


[박정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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