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기요? 역이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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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OO역에서 1시에 만나.", "OO역 2번 출구에서 5분 거리입니다."⋯ 이따금 이러한 말들을 직접 내뱉거나 듣게 되는 순간마다, 우리가 지하철 없이는 살아갈 수 있더라도 지하철'역' 없이 살아가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지하철 이용객들의 승하차를 위해 열차가 잠시 멈추는 공간'과 같은 설명이야말로 지하철역의 존재 의의를 가장 정확히 대변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사실 지하철역은 특정 장소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지리적 지표로서도 보다 활발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약속 장소를 정할 때, 특정 건물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안내할 때, 마침 지하철역이 근처에 있다면 이를 활용하여 설명을 진행하는 것보다 명료하고 간단한 방식은 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모든 지하철역은 사실 한편으로 누군가의 오랜 추억이 서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나 직장을 매일같이 다니던 순간이나, 사랑하는 누군가와 곧잘 거리를 거닐던 순간이나, 친구들과 함께 주변을 누비며 열렬히 청춘을 구가하던 순간이나, 지하철역은 언제나 일종의 거점으로서 항상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가 지하철역에 크나큰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다지 유별난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역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있는 몇 곡의 노래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알게 모르게 그들의 가사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상수역 - 검정치마
누군가 궁금한 적 있다면 난 늦은 밤 상수역만 맴돌았죠
왜냐고는 내게 묻지 말아요
싱거운 내 웃음이 다 지워진 게 그댄 안 보이나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혹은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것도 아니면 단지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홀로 그리움에 젖기 위해 늦은 밤 상수역을 맴돈다.
한시적 쾌락과 올곧은 사랑 사이의 갈등, 서툴었던 관계를 향한 뒤늦은 후회 등 다양한 감상과 해설이 제시되고 있는 검정치마의 '상수역'이지만, 이 노래가 사랑 앞에서 작아진 한 사람의 나약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상수역이 자아내는 적당한 자유분방함과 어수선함이 서툰 사랑 속에서 괜스레 방황하고 있는 화자의 공연한 황망함을 적절히 대변해주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 노래의 배경이 상수역이라는 사실은 유독 재미있게 다가온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오늘도 늦은 밤 상수역을 맴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상수역이라는 장소는 이미 사랑의 편린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라는 사람의 일부는 앞으로도 평생 상수역 주변을 맴돌아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3호선 매봉역 - 프라이머리 (feat. Paloalto, Beenzino)
밤늦게 3호선 지하철 타고 매봉역 앞에서 널 기다리는 중이야
외로워 마 우린 좋은 기억들을 나눌 수가 있잖아
그 에너지로 우린 바쁘게 또 일하다 내일을 또 기대하지
지금이야 한국 힙합의 대부로 일컬어질 만큼 뮤지션으로서 탄탄한 연륜을 자랑하는 팔로알토지만, 그가 학창시절 작업실로 향하기 위해 매일같이 발걸음을 옮기곤 했던 3호선 매봉역은 여전히 그에게 특별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모양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여러 풍파를 겪으며 삶이라는 것에 다소 무던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학창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매봉역 근처에서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간다.
'3호선 매봉역'은 찬란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지난날의 기억과 경험을 앞으로도 계속 잊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을 되새기는 곡에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행스럽게도 매봉역이라는 장소가 그의 곁에 남아있는 한, 그리고 이 노래가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울려 퍼지는 한, 그의 근사한 다짐이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합정역 5번 출구 - 유산슬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왜 우리는 갈라서야 하나
바람이 분다 사랑이 운다
아 합정역 5번 출구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 다소 유치하고 단순한 면이 있지만서도 직관적이고 센스 있는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가사다.
노래 속에서 자세한 사연이 소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별을 앞두고 있는 연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곡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애틋하고 서글픈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또 합치면 정이 된다고 믿었던 합정이라니, 정말이지 애잔함을 달랠 길이 없다.
사실 일상 속에서 지하철역의 이름만큼 말장난 삼기 좋은 소재도 드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서울 지하철 2호선에 위치한 신당역을 지나며 일행과 함께 "우리 내일 신당!"이라고 되지도 않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실실 웃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불현듯 우리의 기억 속에 아주 강렬히 자리잡고 만다.
마치 합정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사랑했던 이와의 애틋함을 떠올리는 '합정역 5번 출구'의 화자나, 신당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지난날의 소소한 추억을 떠올리는 필자처럼 말이다.
이처럼 누구의 머릿속에나 그 이름과 마주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지하철역이 하나쯤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김선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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