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어렵고 큰 효도

글 입력 2023.05.1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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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엄마”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들린 쪽에 눈길이 갔다.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 같은 말투 때문이었다. 시선 끝에는 중년 부부와 노부부가 내 옆 테이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중년여성이었다. 그 말투는 아빠를 부를 때 그리고 대화 내내 여전했다. 그녀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처럼 재잘대며 이야기보따리도 풀었다. “엄마, 이거 해줘”라며 작은 부탁을 하기도 했다. 아이 같은 말투와 행동을 하는 그녀가 철부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부탁들은 노부부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아이 같은 모습 뒤로 노부부가 필요한 부분들을 재빠르게 눈치 채고 챙겨줬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노부부와 중년여성 옆에 앉은 남편은 익숙한 듯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과 아이 같은 모습, 세심하게 챙겨주는 손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 세 개의 면이 공존한 그녀에게서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기 좋았다. 그녀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기분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아빠와 통화를 하다가 카페에서 본 그 중년여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효도했네, 그런 게 효도야. 부모들은 자식들이 애교 부리거나 다정하게 말하면, 그게 그렇게 고마워. 나이 들수록 더 그래.”


다정하게 말하고,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진짜 효도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빠한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새롭고, 더 와 닿았다.


통화가 끝나고, 문득 예전에 봤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2’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원의 엄마는 큰아들 동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애가 속도 깊고, 행동하는 건 또 얼마나 듬직한데.”


그래서 나이보다 더 성숙한 행동과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동일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이처럼 황당한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항상 엄마를 찾았다. 처음에는 천진난만한 동일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가 속이 깊고, 듬직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철부지 같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동일의 행동과 말에서 엄마를 생각한 마음이 보였다. 철부지를 가장한 속 깊고 듬직한 아들 같달까.


 

“수다쟁이야. 하나같이 수다쟁이들.”


“맞아. 우리 애들이 수다가 좀 있어. 어릴 때부터 다섯이 다 그랬어. 하루 종일 학교 갔다 오면 내 옆에서 조잘조잘... 친구랑 싸운 얘기,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 야자 땡땡이친 것도 나한테 다 얘기하고, 좀 그렇지? 가벼워 보이지?”


“아니, 전혀. 하나도 안 가볍고, 매우 속들이 깊어. 네가 너무 부럽다 진짜.”

 

-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2' 대사

 

 

동일은 엄마가 그리워할 어릴 적 그때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엄마를 찾고, 장난을 치고, 웃게 하고,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는 모습 말이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자식은 크면서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이 점점 줄어든다. 그 순리를 잘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손길이 없어도 혼자 잘할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한다. 평생 내 손길이 필요한 그런 어린 자식이길 바라는 마음은 묻어둔 채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철부지면 그것도 걱정이고 속 터진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2’의 동일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카페에서 봤던 중년여성도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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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나는 어릴 적 별명 중 하나가 ‘애늙은이’였다. 주변 어른들과 부모님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 별명이 언젠가부터 지켜야 할 존재로 느껴졌다. 어린 나는 어른인 ‘척’을 했다. 나이보다 더, 더 성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이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내가 한 건 효도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일찍 철이 들고, 그 기점으로 점점 더 애늙은이가 되어가는 나를 보면서 부모님은 더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을 거란 걸 알았다. 어린 생각이었고, 나의 효도 방식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더는 애늙은이라는 이름 안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했다. 내 나이보다 성숙해지려는 노력보다는 내 나이와 발맞춰 가려고 노력 했다. 그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많이 달라졌다.


진짜 효도에 대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고 해도 아직 한참 멀었다, 더구나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매우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더 많이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꼭 거창한 것만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갖기, 진심을 담아 따스한 말을 하기, 소소하게 ‘내가 아직 필요하구나.’ 를 느끼게 해드리기, 부모님이 그리워하는 어릴 적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효도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큰 의미가 있는 효도다. 평소에 그런 효도를 하는 건 어렵지만, 하면 할수록 행복해지고 추억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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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물질적인 효도에만 신경 쓰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물론 효도하는 방법 즉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자만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틀린 건 아니다. 또 부모들은 물질적인 효도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로 부모와의 시간도 갖지 않고, 연락도 안 하고, 늘 퉁명스럽게 대하다가 물질적인 효도만 하는 건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또 이런 방식은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 즉, 시간을 쓰는 건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기에 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 잘 못하다가 물질적으로만 마음을 표현하면, 그 마음이 부모의 마음까지 잘 도달할 수 있을까? 부모뿐만 아니라 친밀한 상대에게 진심이 통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늘 괜찮다고 말하고, 무엇이든 좋아해 준다고 소홀히 하지 않길 바란다. 효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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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족은 카페 손님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주름진 눈으로 부모의 눈을 보고, 따스하게 말하는 딸. 아이같이 재잘대고, 천진난만한 모습 뒤로 섬세히 챙기는 딸의 손길을 가만히 지켜보는 노부부의 모습은 내게 감동을 안겨줬다. 서로를 바라보는 부모와 딸의 눈빛에서 진심이 통했다는 게 느껴졌다.


딸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딸은 액정화면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좀 전까지 천진난만한 딸의 모습은 사라지고 인자한 엄마의 모습만 남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몰래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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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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