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괴한 귀여움의 덧없음 -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

카와이, 키카이, 모노노아와레
글 입력 2023.04.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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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1962-)는 일본 현대미술가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질문하며 ‘귀여움’, ‘기괴함’, ‘덧없음’의 미학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는 ‘리틀 보이(little boy)’, ‘슈퍼플랫(superflat)’과 같은 독자적 개념을 제시하며 전후 잃어버린 일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귀여움’ 이면에 전후 일본 사회의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와 달리, 작가는 작품의 상업화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1996년 ‘히로폰 팩토리(Hiropon Factory)’를 설립하여 2001년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로 회사 명칭을 바꾼 무라카미는 스튜디오의 대표 이사로서 작품을 생산해 낸다. 그의 상업적인 기질은 팝아트의 대가이자 ‘팩토리(Factory)’를 세웠던 앤디 워홀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1월 26일부터 4월 16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 전시는 무라카미의 대형 회고전이었다. 초기작을 포함해 회화, 대형조각, 설치, 영상 작품 등 최근작들까지 소개하고 있어 무라카미가 찾아낸 일본의 고유성과 현대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였다. 특히 일본 대중문화의 오타쿠 - 카와이(귀여움) - 슈퍼플랫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작업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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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으로 충만한 경험을 선사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구성에 유난히 인기있었던 것 같다. 전시를 위해 오픈런을 하고 몇 시간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람객을 위해 전시 연장까지 했으니, 무라카미의 작품이 한국에서 얼마나 ‘핫’한지 별다른 설명 없이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팝아트의 밝고 강렬한 색채와 간결한 구도, 활짝 웃는 얼굴의 작품은 보이는 것처럼 기괴하지만 귀엽다. 알록달록해서 마치 놀이공원에 온 듯한 기분도 든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작품은 설명을 봤을 때와 보지 않았을 때 감상에 큰 차이가 있다.


“무라카미님의 작품은 얼른 보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독이 있고 강한 비판성이 감춰져 있어 지나칠 수 없습니다.”(이지완, 서울문화투데이, 2023. 4. 26. 검색) 이우환이 무라카미에게 전한 편지의 내용처럼 필자 역시 그러했기에 관람하는 동안의 감상과 이후의 감상이 완전히 달라진 부분들을 본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고동연의 “Murakami’s ‘little boy’ syndrome: victim or aggressor in contemporary Japanese and American arts?”,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ume 11 (Number 3, 2010)을 읽으며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였기에, 이를 기반으로 무라카미를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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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도라에몽과 소닉을 결합하여 DOB을 탄생시킨 무라카미는 DOB 캐릭터가 ‘일본인들의 자화상’이라 제안한다. 혼합적이며 피상적인 특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자기비하적인 시선과 맞물려 있다. 이에 무라카미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서구 미술에 일본 서브컬쳐를 편입시키려 노력한다. 따라서 작가의 캐릭터들이 가지는 ‘귀여움’은 그 이면에 미성숙하고 유아화된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DOB의 기원과 의미, 고정된 정체성의 부재가 일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과 미국, 예술과 상품, 전통과 현대, 지배와 자유 등 이항대립적인 일본 예술과 문화의 혼재성의 범주로 인해 혼종적이며 다양한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일본의 정체성은 ‘전후’ 외상을 안고 있는 특정 시기의 일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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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2차적 창작물로 받아들인 상황에서 전후 일본을 인지했기 때문에 그가 ‘완전히’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여 서구에 대항하는 구조로서 작품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작가는 도피처로서 ‘오타쿠’를 선택한 듯하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그의 ‘오타쿠’적인 면모는 현실의 역사에서 전개되기보다 일본 예술 내에서 역사성을 얻게 된다. 더불어 경제적 공황을 겪던 시기 미국으로부터 보상받으려는 일본의 심리로 볼 때 자기위로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대중문화 맥락을 가져오는 작가의 태도에 대해 비판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물신주의 미학에서 상품을 예술의 위치로 끌어올린 워홀과 작가의 전략 사이에 있는 명백한 간극이 있다. 워홀의 시그니처가 작가 자신의 독창성(작가성)을 드러내고, 상품미학에서 작품으로서 도발∙도전적인 위치를 점한다면, 무라카미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특정한 위치를 유지하는 기호로서 시그니처를 탄생시키고 브랜드화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정통예술의 부재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워홀이 당시 사회 기술과 접목한 새로운 미술을 미국만의 신 예술로 선보였던 반면, 무라카미는 일본의 역사적, 경제적 공황 상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상품미학을 채택하고 이를 공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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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히로폰 팩토리’의 기원과 작품 형식(실크스크린과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작품 의미보다 이미지의 브랜드에 초점을 맞춰 물신화를 가속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미술시장의 매커니즘으로 파악하여 제작물을 일종의 화폐로 만들어버렸다.(부산시립미술관 전시에서 NFT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도지코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더 직접적이다.)


자본주의 경제에 오염된 무라카미의 상업적 행보를 일본 전통예술에서 새로운 길을 돌파 혹은 모색한다고 표현하지만, 이런 작가의 태도는 동시대 미국과 일본의 관계, 예술과 상업의 구분을 분석하고 철저한 검토에 따른 것이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의 작가성은 한 번 더 오염된다. 그의 전략을 ‘회화적’이라거나 ‘기법적’이라 부르지 않고 ‘마케팅’, ‘비즈니스’라 명명하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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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무라카미는 원폭으로 패전을 맞은 전후 일본의 문화가 ‘거세’ 되어버려 귀엽고 유치하며 순수하고 미성숙한 존재로서 오락(=오타쿠 문화)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내러티브 구조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비판할 만하다.(전시 팸플릿, 2023) 이러한 오타쿠 문화에 대한 작가의 내러티브 구조는 일본인에 의해 발생∙지속된 폭력∙전쟁을 미화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오타쿠의 얄팍하고 미성숙하다는 프레임 안으로 도망치려는 시도로 읽히며,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가해자(미국)에게 책임을 돌린다. 그와중에도 강대국에게 어필가능한 ‘귀여움’을 잃지 않는 모습은 시장에 팔릴 수 있는 작품성을 가지기 위한 일종의 노력처럼 보인다.

 

일본 공황 당시 세계경제를 쥐고 있던 미국의 미술 시장에 ‘일본인’ 작가로서 개입하기 위한 상업적 타깃으로, 미국을 겨냥하기 위해 일본인에 대한 집착을 강화하고 대변하는 것처럼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전통적 주체성과 깊이의 부족은 변명을 위한 전제이며, 오타쿠는 희화화보다 우상화-히로폰처럼-이고 유아화는 일종의 둔갑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특히 미국의 자포니즘을 위한 자국의 자포네스리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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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모호한 태도가 일으키는 오역의 결과가 주는 무력함은 그럼에도 덧없다는, 불분명하고 비극적인 미래에 대한 소모적인 한탄인지 아니면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스스로 매몰된 것인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색채를 훨씬 다채롭게 만들고 작품의 크기를 키우는 기괴한 귀여움 때문에 작품을 보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소비자의 적극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작가의 행위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도달하면서, 미술관에 가기 전부터 관람 후까지 비판적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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