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파괴에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하다 - '실비아, 살다' 박란주 배우

글 입력 2023.03.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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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실비아살다_포스터(온라인배포용).jpg

 

 

‘세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서른 살의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은 비운의 천재 시인.’

 

이렇듯 실비아 플라스는 삶보다 죽음으로 기억될 때가 많은 인물이다. 하지만 죽음 이면에는 언제나 삶이 있는 법. 여덟 살 때부터 시를 발표한 실비아는 사는 동안 글쓰기에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작품에 애착도 강했다. 남성중심적인 문단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은 죽음을 둘러싼 자극적인 이야기에 쉽게 가려지곤 한다.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그 제목처럼 실비아의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관객은 거기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실비아 플라스를 만날 수 있다.


2022년 초연 당시 입소문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던 <실비아,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15일, 실비아 역을 맡은 박란주 배우를 공연장 근처에서 만났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울 것 같은 실비아를 이야기하며 그가 유독 많이 말한 단어는 다름 아닌 ‘희망’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란주 배우가 이 작품에서 발견한 희망에 대해 들어보았다.

 

 

캐릭터포스터_실비아_박란주.png

사진제공: 공연제작소 작작

 


“비상정차를 택하는 그 마음을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희망을 찾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소한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실비아, 살다>에 합류하고 벌써 공연하신 지도 한 달이 넘게 지났습니다. 공연은 어떤가요?


트리플 캐스팅이다 보니 제 공연 회차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회차마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어요. 계산했던 대로 잘 안 되거나 공연이 안 풀릴 때면 아쉬움도 그만큼 더 큰 것 같아요. 

 

 

실제로 공연을 반 정도 진행한 시점에서 배우님이 보는 <실비아, 살다>는 어떤 작품인가요?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희망에 관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뮤지컬에서의 실비아가 현실의 실비아와는 다른 결말을 맞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물론 보편적으로는 비상정차 없이 계속해서 종착지를 향해 가는 삶이 더 희망에 가깝게 여겨지긴 하죠. 하지만 저는 공연을 할수록 실비아가 비상정차를 하러 가는 여정 또한 희망을 위한 선택이라고 느껴졌어요. 비상정차를 택하는 그 마음을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희망을 찾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소한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의 첫인상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대사가 엄청 많아서 놀랐어요. 정말 이 분량대로 다 무대에 올라가는지 여쭤봤을 정도니까요. (웃음) 빠지는 부분 없이 대본 그대로 무대에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에 대한 작/연출님의 애착과 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본을 여러 번 읽어 보니 왜 이 모든 대사가 필요한지도 이해가 됐어요. 빠뜨릴 대사나 장면 하나 없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이걸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저도 120분 동안 실비아가 빈틈없이 무대를 채우는 걸 보며 엄청나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준비하며 어려운 점, 고민했던 점은 무엇인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대사 분량이 많아서 대사를 다 외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웃음) 분명 머릿속에는 대사가 있는데, 감정과 함께 표현하려다 보니 자꾸 빼먹고 놓치는 게 많았어요. 그렇다고 입에 붙는 대로 적당히 할 수도 없었어요. 수학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하게 쓰인 대사라서 제가 조금만 다르게 해도 장면 전체의 느낌이 달라졌거든요. 대사를 숙지하는 게 일단 가장 큰 숙제였고, 감정과 흐름을 찾는 건 다음 문제였습니다. 


실비아는 120분 내내 나오는 인물이기에 어떻게 연기해야 마지막에 관객분들이 개운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도 많이 고민했어요. 비상정차를 향해 가는 과정이 마냥 어둡고 무겁기만 하다면 보는 분들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거든요. 관련해서 작/연출님과 충분한 대화를 한 끝에 배우가 너무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방향성은 피해야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어요. 실비아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나 희망으로 나아간다는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공연하면서 놓치지 않으려 신경 쓰는 부분이에요. 

 

 

배경이 되는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배우님이 실비아에게 공감되는 부분이나 실비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해요. 실비아가 자신의 글에 무척 엄격했던 것처럼 저도 제 일에 관대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구, 완벽하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거든요. 흠이 있거나 부족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참아내기가 어려워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대사를 그대로 외우고 싶어 하죠.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에는 그래도 좀 느슨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완벽주의자 같은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퇴근하고 집에 오는 순간부터는 대본도 안 보고 작품 생각을 아예 안 하려고 노력해요. 연습이 더 필요하다면 차라리 다음날 일찍 챙겨서 작업실에 가는 편이죠. 집은 그냥 쉬는 공간으로 두려 해요. 

 

 

2023실비아_프로필사진_실비아(박란주).jpg

사진제공: 공연제작소 작작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배우님이 평소 연기하실 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작품마다 다르지만, 일단 관객분들께서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디자인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 혼자만 알고 있고 저 혼자 공감하는 인물은 의미가 없다고 봐요. 보시는 분들이 무대 위 인물의 행동과 마음, 목표 등을 이해할 수 있게끔 인물을 잘 분석하고 표현하려 합니다.

 

 

이번 작품에서 실비아를 연기하실 때도 그런가요? 


사실 실비아는 관객분들이 공감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로 인정받은 천재이고, 살면서 여러 차례 비상정차라는 선택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관객분들에게 실비아의 모든 면모를 굳이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았고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준 다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가 따뜻한 목도리처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실비아를 연기하며 가장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이번 공연에서는 제 해석에 욕심을 내기보다 작가님이 그린 실비아를 온전히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작/연출님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실비아가 평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평범하게 감정을 쓰고 반응하는 인물이 아니고, 글에 대한 프로 의식도 굉장히 강한 인물,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인 인물이라고요. 연기할 때는 제 안에 있는 실비아의 그런 면모를 최대한 끌어내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남편인 테드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신경 썼습니다. 두 사람 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기에 서로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여느 연인들과는 좀 다른 둘만의 코드나 상호작용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고, 그 고민은 지금도 진행 중이에요.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 또는 장면은 어디인가요?


매번 바뀌는데요, 인터뷰를 하는 지금은 ‘10년에 한 번씩’이요. 이 넘버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있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충돌과 이질감을 좋아해요. 듣는 입장에서는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실비아를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이 노래가 마냥 슬프다고만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앞서 말씀드렸듯 실비아에게는 1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비상정차를 향한 여정이 희망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실비아에게 비상정차란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서 저지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내린 하나의 결론이에요. 비상정차 끝에 또 다른 삶이 주어질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10년에 한 번씩’은 실비아가 미래를 기대하며 희망을 갖는 노래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앞에서 실비아의 상황을 다 지켜본 관객분들에게는 안타까워 보일 수 있겠지만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배우님에게 희망은 무엇인가요?


'희망'은 제가 앞으로 살아가며 놓치고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단어예요. 최근에 부정적인 삶보다 낙관적인 삶이 세상을 바꾼다는 글을 봤는데 되게 와닿더라고요.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무언가를 개선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사람은 낙관주의자라는 말에 동의해요. 그래서 좀 무모할지라도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2023실비아살다_공연사진(박란주 개인).jpg

사진제공: 공연제작소 작작

 


“지금의 저는 과거의 저보다 좀 더 오래 살았을 뿐이지

더 어른인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공연을 하시며 기억에 남는 관객 반응이 있나요?


실비아와 테드가 갈등하는 장면에서 정말 리얼하게 탄식하는 분들이 계세요. (웃음) 대사에 몰입할 때는 안 들리는데 잠깐 사이가 있을 때면 또렷하게 들리곤 하죠. 그럴 때면 정말 몰입해서 봐주신다는 게 느껴져서 많은 힘이 됩니다. 

 

 

‘글은 나의 대체물’이라는 넘버가 있는데요, 배우님에게도 대체물과 같은 무언가가 있을까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한데요, (웃음) 아무래도 무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처음 공연을 시작해서 거의 20년 가까이 무대에 서 왔어요. 제가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이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저라는 사람을 몇몇 단어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역시 '무대'나 '연기' 같은 단어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대로 오랫동안 정말 꾸준히 많은 작품을 해오셨어요. 극중 실비아처럼 지금의 배우님이 과거의 배우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제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건 제 몫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의 저는 과거의 저보다 좀 더 오래 살았을 뿐이지 더 어른인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다만 그때의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 정도는 아니까, 그냥 네가 지금 믿는 그것, 네가 하는 그 선택을 응원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훈수를 두기보다 과거의 나를 믿고 지켜보며 위로 한 마디 정도 해줄 수 있는 존재로 곁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럼 미래에서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본다면, 배우님에게 <실비아, 살다>는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요?


어떤 작품을 만나든 저는 그 작품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실비아 살다>는 특히 제가 눈에 띄게 성장할 수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아서 감사해요. 정말 방대한 대사와 노래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이 작품을 해봤으니 앞으로는 못 해낼 작품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웃음)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연을 끝까지 보고 나면, 실비아가 그랬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목도리 같은 존재였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지금의 상태에 주저앉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계속해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언어,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차별적인 비평, 그리고 끝내 자기 자신까지. 실비아의 삶은 서른 살에 끝났지만, 그가 생을 바쳐 말하려 했던 것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시와 소설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작품들이 박란주 배우의 바람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목도리가 되어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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