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밀도 높은 삶들 [사람]

글 입력 2023.01.3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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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했던 계란집이 멋들어진 카페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S가 말했다. 계란집이라는 것도 처음 들었는데, 그렇게 동네가 바뀌는 걸 다 캐치하는 것도 신기하네요.


나와 연결되어 있거나 연결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유독 바닥까지 알아내고 싶어 하는 해묵은 호기심이 있다. 그래서 홀로 동네를 거닐 때면 숨을 죽인 채 움직임 하나 보이지 않는 소란에 집중하고, 어떤 사람들과 가게가 이 동네를 움직이는지 눈을 굴리며 구경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일찍 셔터를 올리는 세탁소 사장님과 인사하는 사이가 되곤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취방 맞은편에 위치했던 계란집을 기억했다. 항상 계란이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이 쌓여있는 곳. 달걀 프라이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는 한 번쯤은 그 가게를 들릴 줄로 알았지만 단 한 번도 그 가게의 문을 열어본 적이 없다. 엮인 추억은 전혀 없음에도 유독 기억이 진하게 남는 가게였다. 그 계란집을 자주 지나던 시절에 적잖이 미련을 둔 탓이었다.


제 동창 부모님도 계란집하시다가 이번에 가게를 넘기셨더라고요. 지금은 카페로 바뀌었다던데. K가 무심히 말을 흘렸다. 그제야 S와 K와 내가 주고받는 짤막한 말들에 이상하리만치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K의 물음. 어느 동네 사세요. 내 대답을 들은 K가 말했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유난히 이런 걸 좋아해요. 마지막 글 모임에서의 대화였다. 회색 벽돌로 지은 계란집 주변에 살며 비슷한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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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며 움직이는 탓이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끼리 마주치는 것은 아무래도 놀랍다. 닮은 꿈을 꾸고 비슷한 색상의 결을 지닌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도 좋아하고, 내가 찾는 것을 당신도 찾고. 헤매는 이유마저 비슷하면 그들의 역사가 궁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다.


특히 재미를 따라 살다 보면 유독 자주 말을 건네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비슷한 관심사를 지녔는데, 재미를 좇는 성질도 같아 결국 한 점에서 모이고 마는 것이다. 단 하나의 공통된 흥미만으로도 낯을 마주하고 눈을 들여다볼 수 있다니. 이제는 80억 인구라는데. 세상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사람들이 지닌 인력引力은 가끔씩 마법 같을 때가 있다.


그다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인력을 지닌 채 옅은 색을 흩뿌리며 살다 보면 어느새 짙은 사람이 되어있음을 자각한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은 몽땅 잡아 손에 가득 쥔 채 흘러가되 자꾸만 손을 벗어나려는 것은 기꺼이 놓아주며 흐름을 타면 비슷한 존재들로 가득한 삼각주에 다다르게 된다. 글 쓰는 근육을 키우려 모인 사람들이 알고 보니 동네 이웃이었던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를 공개하면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사람들이 있고, 좋아하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다 보면 그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를 공유해 준 사람의 다른 추천 리스트를 보면 내가 이미 시청한 리스트와 꽤나 겹치고, 대화가 잘 통한다 싶던 사람은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가 상당히 겹친다. 각자의 끌힘이 서로에게 작용했음을 깨닫는 순간들이다.

 

 

[크기변환]밀도_본문.jpg

 


‘나’를 드러내고 이야기하면서 옅게라도 색을 흘리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것들 혹은 원하는 것들과 그런 것을 같이 바라보는 사람들로 주변이 메꾸어진다. 나의 색과는 보색 관계인 사람부터 시작해서 알록달록 다양한 색들이 점점이 모여 면을 이루고, 결국엔 멀리서 봤을 때 하나의 색을 띠는 것만 같은 나만의 세계가 구축된다. 나의 원색과 많이 닮아있는 색감의 작은 우주가.


그렇게 점들을 모으기 위해선 당장의 내 주변과 새롭게 형성되는 내 세계에 솔직하고 담대하게 굴어야 했는데, 실로 숨김없이 내 속마음을 풀어낼 수 있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간솔해지는 일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임을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삼각주의 입구에 이르기까지 꽤나 걸렸다. 모든 것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고,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겁이 참 많았어서 좋아하는 것마저도 얕게만 앓았다. 대신 속으로는 깊은 꿈을 꾸었다. 계란집 맞은편에 살던 그 당시의 나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내뱉는 말은 없었다. 실패가 두렵고 싫어서 도전을 숨겼다. 숱한 성공을 해내고도 자꾸만 부끄러웠고, 글을 써놓고도 묻어두고.


단순히 글이 좋아 시작했던 글쓰기 역시 짧지 않은 시간 공들여 쓴 글이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까 겁이 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응원해 줄 것 같은 이들에게만 조심스레 보여주었고, 그들이 뱉는 모든 마디에 겨우 힘을 얻었다. 그러다 계란집을 헐어내고 들어선 카페를 처음 발견했던 그날, 작은 성공만을 해내던 못된 습관을 그만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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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취향을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내가 내린 숱한 결정들을 털어놓았다. 용기를 내어 속마음을 보여주면 따듯한 응원들과 예리한 피드백들이 되돌아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재밌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다듬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내 작은 스케치북이 색색이 칠해지며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서서히 높아졌다.


애를 쓰는 듯 쓰지 않는 듯 부평초처럼 둥둥 부유하기만 하다 발을 뻗어내렸고, 힘겹게 얻은 중력으로 쭈욱 달려왔고 흘러왔다. 다정함과 애정과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실로 쉽지 않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는 나와 닮은 사람들을 보며 꼭 쥔 주먹에 더 힘을 준다. 그런 뜬금없는 마주침이 중력을 지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잘 안다. 이런 만남을 두고 우연이라고 한다지만 각자가 여태껏 해온 선택에 따른 만남이었으므로, 운명과 숙명 그 중간의 것이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무언가를 선택하면 당장 주변의 사람들은 응원하지 않을지라도, 막상 선택한 길에 오르면 어디선가 응원이 들려오고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함께 걷자며 손을 건넨다고 한다. 어딜 가든 나와 다른 사람도, 닮은 사람도, 아주 드물게는 과하게 닮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보이는 곳에 발을 내디뎌 보기로 한다. 그러면 나를 잡아당기는 무언가가, 누군가가 있을 테니. 계란이 커피가 되어도 그 장소를 찾는 걸음은 여전히 많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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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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