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관계에 충실한 사람, 제인 오스틴의 편지 - 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

72통의 편지로 머금는 그녀의 사랑과 삶
글 입력 2023.01.1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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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년 8개월 전쯤에 '카카오톡 메세지 말고, 손편지'라는 제목의 오피니언을 쓴 적이 있다. 손편지에 대한 애정을 담은 글이었다.

 

나의 손편지에 대한 사랑섞인 글은 수줍은 고백을 하며 시작된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일기는 쓰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편지를 끄적인지는 오래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손편지에 대한 정을 잊고 있던 내게 뜻밖의 선물이 찾아왔다. 오래 인연을 맺은 친구에게서 한 달에 한 번 받는 '월간 손편지' 시리즈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친구에게서 내 마음을 무지 설레게 하는 소식이 도착했다. (중략) 이름은 <월간 화이트>이고 내용은 화이트가 대략 1달에 1번 애정하는 사람의 자택 주소로 손편지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하나 툭 던졌다. '일단 내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특수한 주체가 이 글을 본다는 걸 의식하는 상태에서 쓸 것..'

  

(중략) 그녀는 편지를 통해서 나와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인생의 동지로서 화이트가 나와 함께 나누고 싶은 것들이 다름 아닌 '지금'과 '다가올 순간'들이라는 것이, 참으로 설렜다.

 

화이트가 글씨를 또박또박 써 내려간 것보다 내가 글을 읽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편지를 한 번만 읽기에 미안했다. 나 또한 연필을 잡고 종이에 글씨를 끄적일때 얼마간의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같은 자리에서 두 번, 세 번 네 번 편지를 읽었다. 그러고나서 그 날 하루는 정말이지 완벽하게 산뜻하고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고, 그래서 더욱더 손편지를 보내준 화이트가 생각나는 날이었다. 나도 '구독료'로 곧 정성들여 답장을 쓰려고 한다.

 

- 오피니언 <카카오톡 메세지 말고, 손편지> 중에서

 

 

내 프로젝트 (25).jpg

 

 

매달마다 아파트 1층의 우체통을 확인할 때 설레던 손끝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획일화된 등기 봉투 사이로, 특유의 앙증맞은 형태를 뽐내는 손편지를 발견할 때는 집에 가는 발걸음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지금 여기로 배달되었을까. 순수한 호기심과 기대로 들숨과 날숨이 이어졌다. 

 

친구 화이트에게서 편지를 받고, 구독료로 대신한 나의 답장은 2021년의 몇 달간의 비중있는 이벤트였다. 정확히 언제 편지를 주고 받는지 약속한 바는 없지만 대략 1달에 1번은 서로의 일상 또는 소식을 손편지로 전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편지 왕래는 끊겼지만 그 당시 품었던 깨끗한 상호 존경의 자세는 여전하다. 

 

얼마전 오랜만에 그 친구와 만난 뒤, 공교롭게도 도서 <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의 공지에서 로맨스 여제 '제인 오스틴'의 이름을 발견하자 곧바로 향유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로 선택한 또다른 이유가 '편지'라는 키워드 때문이었음을. 편지는 살아있는 보물처럼 언제든지 접해도 반가운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명작을 세상에 내보인 제인 오스틴의 편지는 과연 어떤 온도를 품고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제인 오스틴의 숨겨진 이야기, 도서 <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



제인오스틴_평면표지.jpg

 

 

이 책은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이 쓴 편지 72통을 담았다. 여기에 더해 매혹적인 영국 삽화 170여 점을 수록했다. 작가로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기억되고 있지만 그저 한 명의 사람, 한 명의 여성으로서 제인 오스틴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떠올려보았다. 그녀가 이 편지들을 쓸 때 어떤 풍경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문장을 써내려갔을까. 단순히 제인 오스틴이 무엇을 했고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사실(fact)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200년 전 다른 시대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이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정리하고, 이를 애정하는 이에게 전하는 마음만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눈여겨 본 것은 편지를 쓰는 사람의 태도이자 마음이었다. 소설을 창작하는 제인 오스틴이, 과연 일반 독자가 아닌 '지극히 소중히 여기는' 가족 또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전할 때는 어떤 톤앤매너를 보였을까. 그리고 그 속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담고 전했을까.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껴보기로 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런 생각과 감정을 편지로 전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관계에 충실한 사람, 제인 오스틴이 쓰는 '편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등장인물의 관계와 감정은 매우 뾰족하고 섬세하게 묘사된다. 그녀가 예리한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녀의 일상에서도 매우 찬찬하고 세밀하게 타인과 세계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제인 오스틴이 남긴 편지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표현한 바를 읽다 보면, 그녀가 '관계'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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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쓴 편지의 주요 독자는 그녀의 언니였다.

 

72통의 편지를 차분히 읽어가며 <오만과 편견>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사적인 편지를 읽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오만과 편견>에서 그린 애정어린 자매의 관계처럼, 제인 오스틴은 언니인 커샌드라와 아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1798년 12월 18일 화요일 

 

사랑하는 커샌드라 언니에게

 

언니의 편지는 내 예상대로 일찍 도착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아. 왜냐하면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기대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거든. 그게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서.

 


제인 오스틴은 언니 커샌드라에게서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쉽사리 기대하지 않기로 내면의 규칙을 정했다. 사랑하는 자에게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마음의 탄력이 줄어든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녀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언니의 존재 자체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으며, 함께 소통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1799년 1월 8일 수요일

 

친애하는 커샌드라 언니 

 

요즘은 주로 매니다운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며 아주 유쾌한 저녁을 보내고 있어. 작년과 정찬이 비슷하고 의자도 마찬가지야. 연회장에 수용 가능한 적정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춤을 췄고 시간과 상관없이 훌륭한 무도회를 보여 주었어. 

 

난 요청을 많이 받진 못했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 내게 춤추자고 권하진 않더라고. 항상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황에 따라서 말이야. 체셔 출신의 한 장교가 있었는데 아주 미남으로 무척 날 소개받고 싶었대. 하지만 그 말이 진짜일 만큼 충분히 날 원한 건 아니었나 봐. 우리는 결코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니까. 

 

오늘 이 편지를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 난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 정점을 찍을 거고 번영의 햇살을 한 몸에 받거나 언니가 좋아할 만한 언어로 된 다른 즐거운 센세이션을 얻겠지. 편지지를 가득 채우지 못했다고 토라지지 않길 바라..

 

 

그녀가 애정을 나누는 방식은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다.   

 

커샌드라 언니에게는 삶의 사소한 사건까지도 놓치지 않고 빼곡하게 이야기했다. 만약 누군가가 비밀 이야기에 끄적이고 말 이야기를, 제인 오스틴은 거리낌없이 모두 적어 언니에게 보냈다. 특히 인상깊은 인물과 사건은 소설을 쓰듯 생생히 묘사했다. 

 

편지의 끝에는 언제나 언니의 행복과 평안을 바라면서도,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겠다는 확실한 예고가 있었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소중히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1814년 9월 9일 금요일 

 

사랑하는 애나에게

 

넌 지금 너만의 사람들을 창조해 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중이고 나도 내 일만큼 기뻐. 시골에 서너 가족은 있어야 하니 그 부분 먼저 진행시켜 봐. 

 

전개해 나가면서 일부분을 삭제하길 바라. 멜리시 부인이 나오는 장면에 대해 잔소리를 좀 할게. 지루하고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어. 돌리시와 뉴턴 프라리어스 사이의 사건을 축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글이 더 좋아질거야. 사람들은 여자애들이 자랄 때까지 관심을 두지 않거든.

 

준비된 작품이 더 있다면 보고 싶어. 넌 글을 아주 빨리 쓰니까 엄청난 물량에 D.씨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가 키우는 양을 웃도는 가치를 쳐주길 간절히 소망해.


 

한편 제인 오스틴은 고모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소설을 써가는 와중에도 조카에 대한 사랑을 잠재우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조카 애나가 쓴 소설을 읽으며 과감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소설을 쓰는 선배이자, 조카를 아끼고 사랑하는 고모로서 거침없이 글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저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만으로, 조카에게 계속해서 따뜻한 용기와 가르침을 선물했다. 더 나아가 글을 쓰는 기쁨과 의미를 조카와 나누는 것에 더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꼈다.  

 

자신의 세계에만 몰두되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작가가 아니라, 언제나 '열린 사람'으로 관계의 중심에 자리한 사람이 바로 제인 오스틴이었다.  

 

 

1814년 11월 18일 금요일

 

사랑하는 조카 패니에게

 

(중략)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야! 그와 함께 있을 때 네가 안락함을 느낀다고 말했듯 그로 인해 애정이 식었을 지도 몰라. 

 

가여운 J.P. 씨! 오! 사랑하는 패니! 수많은 여성이 너와 같은 실수를 저질러. 그는 너한테 처음 애정을 보인 젊은이지. 그게 맥력이고 가장 강력한 부분이야. 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젊은이들이 여럿 있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어. 그의 성격과 그가 보여 준 애정은 전혀 부끄러워할 게 아니야. 

 

(중략) 사랑하는 패니, 난 의구심의 한 부분에 대해 아주 길게 적었어. 이쯤 해 두고 너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아. 네가 정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는 한 받아들여서는 안 돼. 애정 없는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더 낫고 견디기 수월해. 

 

 

또다른 조카 패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도 숨길 수 없는 기록이다.

 

그녀는 특히 패니의 연애사에 대해서 진지한 조언을 깊이있게 전하곤 했다. 제인 오스틴이 패니를 위해 함께 고민하느라 작품 <맨스필드 파크>의 재판을 미룰 정도였으니, 조카에 대한 사랑은 과연 갖가지 수식어로 설명하기에도 역부족일테다. 

 

 

그래서 내 맘대로 언니한테 편지를 써서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중이야. 


- 본문 p.119 중에서

 


형제자매와 조카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관계에 충실한 사람인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내면까지도 극진히 보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제인 오스틴은 유감스럽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즐거움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뭐라하든 '내 맘대로' 편지를 써서 스스로를 즐겁게 했다.

 

나를 지켜야 남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나를 위해 긍정적인 감정과 행동을 선택하는 일을, 제인 오스틴은 삶이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해내온 것이다. 

 

*

 

21세기는 모든 것이 빨리 생성되고 소멸되는 시대다.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을 바라본다는 뜻의 '주마간산'이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리는 날들이다. 주마간산을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무언가를 볼 때 바빠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대강 보고 지나간다는 의미다. 

 

반면 제인 오스틴의 편지로 바라본 삶의 자세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무언가를 대강 보는 법을 몰랐다. 한 사람마다의 고유한 개성을 찬찬히 들여보고, 그를 위해 사유하고 공감하는 내면의 바다가 깊었던 까닭이다. 

 

그녀의 태도로 말미암아 몇백 년이 흘러도 불변하는 삶의 가치를 절로 느낀다. 사랑과 다정함, 타인에게 베푸는 관용, 성실함, 역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편지의 향유를 마치며,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겼다. 


 

[신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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