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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선명히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여름날 새벽. 그 당시 나는 새벽 1-2시까지 잠들지 않고 책상 앞에서 꽤 오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이 잠에 든 자정이 되면 음악이 나오던 CD 플레이어를 끄고 라디오 뒷 편의 안테나를 죽 늘려서 주파수를 맞추었다. 안테나는 고정축이 고장나서 중심을 맞춰 잘 세우지 않으면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나면 소리를 줄이고 좋아하던 방송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라디오 앞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형적인 한국 주택가의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잘 보였다. 갈색과 회색으로 뒤덮인 건물 무리 중 정면에는 눈에 띄는 성이 하나 있었다. 흰색 벽에 하늘색으로 포인트를 준 뾰족한 성 모양의 건물이였다.

 

신축에 동그랗게 회전하듯 올라가는 계단까지. 지중해의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캐슬 PC방이었던가. 뜬금없는 컨셉이었지만, 그 건물은 밤이 되면 정말 성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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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벽의 시간동안 나는 많은 일을 했는데, 보통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잠시 숨을 돌릴 겸 창 밖을 보면 생각보다 풍경이 근사해서 잠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도 했다.  뾰족한 성 옆으로 보이는 은빛의 보름달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여름 바람. 가로등 불빛과 여름 새벽 냄새가 좋았다. 그런 날 나는 인상주의 그림을 만났다. 사실 그림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는데 내가 드디어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것이다. 그 조명, 온도, 습도가 만들어낸 완벽한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않고 꽂아둔 명화 책이 한 권 있었다. 단순히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날은 웬일인지 여유를 갖고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힘든 날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어서 그런지 몰라도 미술책에서 보던 것과는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


빛나는 카미유 코로의 풍경화와 흐릿한 시선으로 본 것만 같은 쇠라의 그림, 환상을 심어준 모네의 정원과 고흐의 삶과 작품들까지. 명화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바라본 그림은 정말 아름다웠다. 실제의 아우라가 책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특히 르누아르의 그림은 눈이 부셨다. 그의 그림은 마치 근시인 사람이 바라본 여름의 화창한 풍경 같았다. 화사하고 따뜻한 배경과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 행복한 분위기. 그렇게 나는 인상주의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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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막연히 어른이 되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소망 중에는 유럽 여행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에 가보고 싶었다. 고흐의 프로방스와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인상파의 그림이 몰려있는 오르세 미술관 등. 그들이 걷고 보고 살았던 곳을 느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를 봤을 때 잠시 잊고 살던 그 소망을 기억하게 되었다. 오랜 옛날 꼭 가고 싶다고 생각 해왔던 작고 단단한 소원을 10년이 지나서 꺼내보게 되었다. 마치 타임캡슐에 넣어두었던 소중한 물건을 보게된 것처럼 말이다.

 

마침 프랑스편에는 루브르 박물관부터 내가 꿈꾸던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로댕 미술관에 대한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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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미술 관련 서적을 찾아 읽을 때, 미술 사조나 작품 설명 위주의 책을 보았다. 이 책의 다른 점은 도슨트인 저자가 직접 다녔고 꼼꼼히 보았던 경험과 지식이 함께 녹아 있다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일반적으로 감상하는 법부터 저자가 추천하는 방식, 오르세 미술관 1층부터 5층까지 무엇이 있는지, 전부를 다 돌면 얼마나 걸리는지 등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질적인 팁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도슨트로 활약하던 저자가 추천하거나 당부하는 내용이기에 더욱 신뢰가 가고, 중간 중간 그림과 관련한 장소나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시설을 말해주는 것 또한 좋았다. 그렇게 하나 하나 짚어주니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추천해주는 음식점이나 이야기 속의 장소를 구글 맵에서 찾아 저장했다.


화가의 생애와 논란에 관하여 여러 일을 짚어주는 것도 좋았다. 감상자의 해석이 비교적 자유로운 미술계에서는 그 자유만큼이나 잘못된 정보나 논란도 많은 편인데 일반인이 그것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나는 밀레의 <만종>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분위기와는 달리 으스스한 해석에 대해서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작년 DDP에서 열린 살바도르 달리 전시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달리가 오마주한 <만종>도 보았다. 달리는 천재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던 한편 괴짜 같은 면모와 편집증적인 불안도 갖고 있었다.

 

그 전시에서 처음 알았던 건 달리가 죽은 형으로 인해 생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고, 만종을 그와 관련한 감정으로 해석하여 작품을 남긴 것이다. 만종이 죽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설이 있는데, 이런 해석의 시초가 달리라고 전한다. 사실은 달리의 내면에 위치한 개인적 경험과 공포가 뒤섞여 작품 감상에 투영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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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장 프랑수아 밀레, 1873년, 오르세 미술관, 86x111cm

 

 

명작이 왜 명작인지, 새로운 미술사조로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읽기 쉽게 풀어내어 술술 읽혔다. 개인적으로 한 줄 읽을 때마다 낯설거나 잘 모르는 지식, 표현은 따로 찾아보는 편인데 그렇게 찾다보면 맥이 끊겨서 독서에 방해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답답한 기분이 들 때쯤 다음 페이지에서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는 점이 매우 좋았다. 마치 교과서의 ‘더 알아보기’ 페이지와 같은 구성이다. 독자들에게 낯선 정보나 좀 더 설명이 필요한 용어를 꼼꼼히 보충해주는 점이 편하고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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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는 프랑스에서 가장 크게 둘러볼 만한 대표적인 전시관 네 곳을 정하여 감상과 관련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다. 처음이라 무엇부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감상할 지 감이 잡이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가 직접 땅을 밟으며 보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추천해주는 내용을 짚어가면서 나 또한 잠시 상상을 했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는 그 마음을 현실화하는 것 같은 설렘. 다시 꿈꾸게 되는 것이다. 구름 같이 떠있던 바램이 이젠 눈 앞의 커다란 솜사탕으로 변했다.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날을 꿈꾸며 책으로 그 마음을 달랜다.


앞으로 ‘스페인, 네덜란드’편,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편, ‘한국’편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편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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