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해할 수 없어서 따뜻한 세계 - 글리프 6호 김초엽 '실험'

글 입력 2023.01.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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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은 하나의 세계를 표방한다. 현실을 배경에 삼든 전에 없던 새로운 설정을 가져오든 상관없다. 영상을 재생하거나 책의 첫 장을 여는, '시작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세계를 경험한다. 로맨스, 드라마, 스릴러 등 무수한 갈래 중 가장 이질적이기에 가장 수용적일 수 있는 SF. 판타지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겐 과학의 근거로 설득하고, 일상적이고 엇비슷한 소재들에 지친 이들에겐 남다른 반짝임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수의 마니아층을 점유하던 서브 컬처가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받고, 그 흐름에 선두주자 격인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김초엽이었다.


2017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출간 이후로 무서울 정도로 그의 신작이 쏟아졌다. 장편 소설, 단편 소설집, 초단편 소설집, 비문학 단행본, 웹진 기고, 에세이까지. '책'이라는 큰 틀 안에서 매체와 형식을 가리지 않는 행보였다. 낯선 세계를 조우하며 관계하는 존재들을 조명한 건 언제고 똑같았지만, 정상성/비정상성, 차이/차별 등 이분법적인 인간스러운 사고를 해체하는 데에서 시작해 이제는 폭넓은 이야기로 확장된 것도 같다. 가장 최근에 나온 소설책 "므레모사"가 추리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좋아하는 작가이긴 하나 왜 좋아하는지 몰랐고, 그다지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 글리프의 6호 주인공이 김초엽 작가라는 걸 알게 되고 이제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예감했다. 글리프는 매 호에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 작가가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을 파헤쳐 한 권으로 압축한 문학 비평 잡지이다. 기존의 문단이 지닌 보수적이고 위계적인 비평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가벼운, 듬뿍 담긴 애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 작가 덕질 아카이빙이라고 할까.


아무래도 비평의 특성을 띄고 있어서인지 짤막한 칼럼 내지는 비평이 주를 이루고, 중간중간 김초엽 작가의 작품 특징이 도드라질 만한 꼭지들이 담겼다. 인터뷰 형식도 있고, 김초엽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문장들도 담겼다. 김초엽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을 읽어본 독자로서 기억 속 흐릿해진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을 상기하고 소설 간의 연결점을, 더 나아가 세상과 연결된 지점을 짚어본 경험이 좋았다.


페이지 수 자체는 길지 않아도 문장 안에 응축된 이야기는 무척 깊으므로 하나하나를 예로 들어가며 말하긴 어렵다. 다만 중간중간 잡지의 일부를 소개하며 좋았던 점, 생각나는 점, 그리고 끝으로 나는 김초엽 작가의 세계를 왜 좋아하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장애가 없는 세계'라는 소제목. 우리네 세상이 장애를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 페이지 바로 전의 글이 참 좋았어서 이어지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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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이 일상생활에서 필수이기 때문일까. 안경점의 거울과 보청기 가게의 거울을 비교하는 대목이 와닿았다. 안경은 보이는 걸 숨기지 않는다. 창피해하지도 않고, 꺼려하지도 않는다. 하물며 '안경 쓰면 못생겨진다'는 심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안경알의 크기, 테의 형태와 굴곡, 색깔 등은 최선을 다해 사람의 얼굴을 더 빛낼 수 있게끔 발전해 왔다. 기능적인 면은 물론 심미적인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다.


안경, 그보다 나의 시력은 나의 정체성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나의 이루는 일부이긴 하지만, '렌즈'라는 대체물이 있기도 하고, 라식이나 라섹 수술로 모든 보조 수단과 멀찍이 둘 수도 있다. 이토록 선택지가 많은 상황이기에 나를 구성하는 요소 같지 않다.


하지만 청각 보조 장치인 보청기는? 사진의 광고와 비슷한 홍보문구를 지난여름에도 봤다. 길거리에서 나눠준 부채에 보청기 광고가 있었는데, 성능의 우수성이라는 표현에 눈에 띄지 않는 외관이 포함되었다. 부재는 실존을 나타낸다지 않는가. 존재를 감추려고 노력하는 순간 비로소 존재를 인식한다.

 

물론 매 순간 알아차린 상태로 지내진 않겠지만, 적어도 안경을 쓴 사람들보다는 자주 깨닫지 않을까.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착 달라붙어 꽁꽁 숨은 물체를. 작가의 말마따나 이게 바로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임을.


가려진 것은 끝내 부정된다. 안 보이면 없는 줄 알고, 없는 취급을 받다 보면 끝내 자기 자신에게서도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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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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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7

 


김초엽 작가의 인물들은 누구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지언정 적어도 주체는 주체답게 군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음을 강요하려 들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 건 못한 채로 내버려 둔다. 다만 끈질기게 시도할 뿐이다. 다른 감각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설령 반드시 이해하겠다는 강한 포부도 끝내 좌절한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다. 같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만의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빈다. 물리적으로 꼭 붙어있어야만 완전한 사랑인 것도, 온전한 이해인 것도 아님을 무수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제야 알겠는 거다. 나는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세상을 좋아했다. 서로 공통분모는 커녕 다른 점뿐인 존재들이 만나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인지하고,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내 받아들이며 각자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것. 타인과 나의 다름을 알아차릴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던 내게 꼭 필요한 태도였다.


사람이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말을 잘해도 왜곡은 늘 생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각자만의 세계가 다르므로 똑같은 단어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오해는 대화를 통해 풀리기도 하지만 때로 대화로 인해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작은 도화선을 지피면 팡! 사방에 불똥이 튄다. 뜨거워서 아프기도 하고,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다 잃은 것 같아 슬프더라도 그게 끝이 아님을.


눈으로 보이기엔 끝이라고 한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없는 존재로 생각해서 안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다른 시작점이 피어나는 중일 수도 있다. 그가 그리는 세상은 늘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아서 자꾸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나 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김초엽 작가의 세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사실, 즉 '모른다'라고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또한 글리프 에디터들처럼 김초엽 작가의 '실험'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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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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