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밤과 방과 반을 위한 연말 결산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2.3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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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끝과 시작 중 무엇에 더 집중하려 하느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끝이라 답하리. 새해 버킷리스트, 다짐, 목표 등을 더 이상 세우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말 결산이다.


이번 연도에는 연말 결산을 조금 특별하게 해 보려고 한다. 오직 밤과 방과 반을 위해. 불면 날아갈 듯한 수면을 모으느라 애썼던 한 해의 끝에서 나의 밤과 방과 반이 되었던 책들을 꺼내 본다.

 

참고로 이 모든 것은 잠과의 전쟁에서 강렬히 패배한 이의 전술, 필패법이다. 잠을 다스릴 것을 포기한 이들에게 도리어 그 밤을 밝힐 것을 권하며, (때론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속에서 승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질 때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내일도 질 결심을 구구절절하게 늘여 보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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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저작물 기록 보관소(IMEC) 부소장, 전시 기획자, 소설가이자 오래도록 롤랑 바르트와 사뮈엘 베케트 등 대가들의 문헌을 만져 온 연구자, 나탈리 레제. 그가 마흔여섯에 선보인 첫 작품이다.

 

22년도 후반기 나의 화두가 무엇이었느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부조리극’이라 답했으리. 부조리극 부동의 입문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주제넘게 말의 만용과 허울에 질려버린 내게 고요한 충격을 선사하며, 편협하던 문학 관심사를 확장시켜 준 작품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과 내재된 사상에 홀린 이가 사뮈엘 베케트의 생애에 관심을 갖는 건 무척이나 당연해 보인다.

 

부조리극 문호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기대에 무작정 펼친 책은 생각보다 고요했으나 다소 분열적이었다. 들떠버린 맘에 뒤처져버린 편집자의 말을 읽으며 <말 없는 삶>은 일반적인 전기와 구별되는, 사뮈엘 베케트라는 한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산문임을 깨달았다. 베케트의 문서를 다루고 베케트의 전시를 기획했던 이의 감상, 아니 그 이상의 산발적이고 가변적인, 때로는 그에게서 자신으로 이어지는 존재가 불확실한 기억의 편린들.


사물의 면면에, 언어의 틈 사이사이에 묻어있는 그를 사유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레제가 감각한 베케트를 내 맘과 몸으로 또다시 감각하기. 끈덕지게 쥐고 있던 조리를 잠시 내려놓고 모든 것이 떨어지는 밤에야 그의 침묵에 입 맞추어 떨어져 내리는 베케트를 응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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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워크룸 프레스, 89쪽

 

 

 

바깥은 불타는 늪 정신병원에 갇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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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city is soooooooo dope! Can’t help laughing!”


자본주의 안에서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마냥 매섭게 타오르는 뉴욕을 응시한다. 작가 김사과는 뉴욕의 음악, 패션, 쇼핑 등 소비 문화를 잡고 놓으며 그 허황됨을 뜨겁게 냉소한다.


주제들은 일관성을 결여한 형식을 타고 분란하게 솟구쳐 나온다. 광기로 얼룩진 그가 마주한 불타는 늪. 때로는 부응하기도 번뜩이는 통찰을 끄적이기도 하며 낭만적 뉴욕의 실체, 실패를 까발린다. 평범한 여행 에세이를 기대한 독자라면 그 광기에 놀라 그만 도망치리라.


끝까지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미친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들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선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허공에 성을 짓고 살아가는 그들. 우린 그저 좌표가 조금 다를 뿐이라는 미친 성찰을 한다.

 

앞으로 뉴욕적이다 라는 말은 새로운 욕 정도로 받아들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그러나 서울의 나에게도 뉴욕적 살점이 붙어있음을 깨우치는 그런 미친 글자들의 모임. 나의 방에 갇혀 여러 방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늪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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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바깥은 불타는 늪 정신병원에 갇힘>, 알마, 26쪽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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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많은 하루가 밤을 업고 들러붙을 때면, 페소아를 피곤 했다. 자기 안의 수십 개의 다른 영혼들을 끊임없이 분산하고 봉합하는 포르투갈의 모더니즘 시인. 폭발하는 그(들)의 고뇌를 보고 있자면, 온갖 재를 뒤집어쓴 채 돌연 평온에 이르기도, 때론 그 웅장한 소리에 감응하여 함께 불이 붙기도 했다.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에는 페소아 중에서도 그가 가장 편애한 알바루 드 캄푸스의 대표작이 실렸다. 거침없는 표현, 격렬한 내적 고뇌, 활화산 같은 폭발력, 현기증과 도취감, 의성어 실험 등이 그의 특징이다.(김한민,<페소아>,아르테, 80쪽)


그의 시를 읽는 경험을 (일반적 의미의 '읽는다' 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아마 '읽는다' 보다는 유람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허나 이상적인 유람과는 또 그 성질이 다르다. 사위가 산산조각 나고 표류되는 일종의 재난에 가까운 유람일 것이다.)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류의 진부한 경탄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조각내며 온몸으로 일군 만큼, 온몸으로 글자들을 감각하는 것만이 그 세계에 진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뭐 어쩌면 내가 여전히 그 세계에 들어가고 있는 중, 혹은 들어가고자 하는 중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그 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여놓는 것'에 항상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그 고통과 실패를 온전히 받아내고 싶게 만든다. 따가운 어둠을 토하던 페소아는 어느새 정복되지 못한 나의 반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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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 51쪽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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