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을 잃고 비상 착륙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2)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글 입력 2022.12.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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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세이 (1)편과 이어집니다.

 

 

흑임자 라떼 두 잔과 경포호, 그리고 아쿠아리움



여행 이튿날을 맞이했다. 다행히 컨디션에는 문제가 없었다. 강릉에 명소는 많지만, 이번엔 사람들의 추천은 미루기로 했다. 몇 주전 집 앞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내가 어딜 가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먼저 아침과 낮과 밤의 바다를 전부 보고 싶었다. 어제 낮의 바다를 봤으니 오늘은 밤의 바다를 볼 차례였다. 그전에는 흑임자 라떼를 마시며 호수를 향해 끝없이 걷고 싶었다. 뜬금없지만 아쿠아리움에도 가고 싶었다. 낮 동안의 시간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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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짬뽕 순두부를 먹고 흑임자 커피로 유명하다는 카페로 향했다. 이미 건물 앞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커피를 위해 줄을 1시간이나 섰다.

 

택시 기사님이 말씀해주신 팁은 한 번에 두 잔을 사는 것이었다. 잔이 작아서 두 잔은 마셔야 성이 찬다고. 정말 꿀팁이었다. 한 모금 마신 라떼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나는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엔 캐리어를 달랑달랑 들고 경포호를 향해 걸었다.


호수의 표면은 갈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근처 물웅덩이에는 다리와 부리가 길쭉한 새가 걷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그 뒤로 넓게 펼쳐진 산등성이의 모양이 수묵화 같았다. 흐린 대기는 풍경에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바람이 불고 바람이 지나는 곳에는 실크 같은 주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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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문득 자연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유심히 보지 않는 나무와 바람의 움직임 같은 것 말이다. 새도, 호수도, 바람도, 날씨도, 나뭇잎도 전부 신기하게 느껴졌다. 코끝과 손끝이 차가웠지만,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평화롭고 행복해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아쿠아리움에 간 것은 여행 한 달전쯤 본 다큐멘터리 때문이었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 문어와 열대어 무리가 장난치는 장면을 보았는데 영상만으로도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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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천장이 낮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옆을 지나갔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와 손자를 부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었지만, 누구보다 재밌게 즐겼다. 해초의 움직임과 생소한 바다 생물의 생김새를 보았고, 펭귄들의 식사를 구경했다. 평일 오후 한산한 수족관의 풍경은 신비로웠다. 그 속에서 헤엄치지 않고 걷는 내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다보고 나오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색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택시에 탔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까만 밤이 되어 있었다. 낮에 봤던 파란 바다와는 사뭇 다른 깊이와 색감으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까만 바다를 보다가 뒤를 돌면 눈이 부셨다. 조명으로 가득한 식당과 카페가 화려하게 빛났다. 모래사장을 중심으로 상반되는 두 개의 풍경은 분리된 공간처럼 묘한 기분을 주었다.


완벽한 하루인줄 알았는데 숙소에 도착하니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도 김이 팔팔 나는 뜨거운 물로 씻으면 피곤함이 가실 것 같았다. 근데 놀랍게도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미지근하던 물은 약 올리듯 천천히 찬물이 되었다. 한참 동안 보일러와 씨름을 하다 호스트에게 연락하니 내일에야 고쳐줄 수 있다고 했다. 벌벌 떨면서 한여름에도 안 하던 찬물 샤워를 했다. 와.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동시에 나의 젊음에 감탄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오니 물회고 뭐고 신선한 회를 먹겠다는 다짐은 싹 사라지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근처로 나가려다 배달 어플을 켰다. 추위와 시장이 만나니 투박한 돼지국밥이 호화롭게 느껴졌다. 영화 한 편을 보다 잠들었다. 부디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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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감기에 걸렸다. 전날 잠을 설쳤지만 코만 살짝 막혀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컨디션이 안 좋다고 게으름 피울 수는 없었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식사를 했다. 강릉하면 커피인데 이상하게도 강문해변 앞의 커피는 정말 맛이 없다. 풍경이 좋아서 그 맛이 상쇄되니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그러다 우연히 커피 맛도, 자리도 좋은 카페를 발견했다. 바다를 향해 나 있는 창과 소파. 주말이었으면 엄두도 못 낼 명당이었다. 그 앞에 앉아 소품샵에서 사온 물건을 구경하다가 글도 쓰고, 명상도 하고, 잠시 낮잠도 잤다. 정말 여유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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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니 바다는 푸른 에메랄드색에서 짙은 심해의 남색이 되었다. 그라데이션으로 물든 바다의 색은 파스텔로 칠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짙어졌다 옅어지기를 반복했다. 3일간 들여다본 동해는 정말 파랗다.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파란 줄은 몰랐다.


영화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연출하고 마침내 그 세상 끝에 트루먼이 도달한 장면말이다. 태양 빛부터 바다의 움직임까지. 복제할 수 없을 것 같던 자연의 모사품을 만들어 실제처럼 연출하는 것은 사실 지금의 모습과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다. 도심에서 숲을 볼 수 없으니 숲을 닮은 미디어 전시를 감상하고,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새소리, 물소리가 섞인 ASMR을 듣고, 파도를 닮은 미디어 파사드를 도시 한복판에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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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해변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친다. 한참동안 보고 있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풍경이 멈추지 않으면 좋겠다고. 언젠가는 지쳐서 파도치는 것을 그만둘 것 같은데 그러지를 않으니 고맙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푸른색은 질리지 않고 아름답다.

 

 

 

운 좋은 여행자



계획대로라면 떠나야 하는 날이었는데 하루 더 있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평일이라 누군가 더 묵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개쯤 되는 방에서 운 좋게도 한 방을 통째로 쓰게 됐다. 저녁이 되도록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 밤도 혼자만의 시간으로 잘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과 맥주를 사 들고 돌아왔다. 돌아오니 주문했던 물회가 이미 숙소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들고 호스트의 취향이 묻어나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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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적적해져서 친구와 통화를 하며 밥을 먹었다. 통화가 끝난 후에야 맥주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그때 누군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또래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나는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귀만 쫑긋 세운 채로 잠시 눈치를 살폈다. 상대방도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한 손에 흰 봉투를 들고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앉았다. 식당에 노래가 틀어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쉬고 눈알을 몇 번 굴리다가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


“혹시 여행자세요?”

“네. 어머. 여행 오셨어요? 저는 주인이신 줄 알았어요.”


구석 한 편을 차지하고 자연스럽게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집주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키득거리며 괜찮으면 내 앞에 앉아서 같이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고, 자신의 닭강정을 펼쳐 주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하나 더 꺼냈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MBTI부터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까지 같았다. 낯 가리는 것도 잠시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떠들었다. 찬 바람이 들어오던 썰렁한 공간이 대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고, 블로그를 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공감할 거리가 많아서 즐거워졌다.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블로그 이웃이 되어 의식의 흐름대로 강릉 여행 이야기부터 요즘의 생각들까지 풀어나갔다.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다 보니 새벽이 됐다. 나는 피곤해져서 작별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여행에서는 이런 우연이 즐거운 추억이 된다.

 

 


길을 잃고 비상 착륙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혼자서의 여행은 때때로 적적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어 좋다. 느끼는 감정과 생각도 기민하게 포착할 수 있다. 평소의 나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면 실제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 ‘그런 곳을 왜 가?’라고 말할지라도 원해서 했던 활동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되었다.


바라던 대로 바다는 실컷 보았다. 그러나 사실 파도는 내 머릿속을 깨끗이 휩쓸고 지나가지 못한다. 바다를 보면 생각이 정리될 거라는 기대는 말 그대로 기대일 뿐이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소망과는 달리 그 여행에서 느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게 특정 상황에 대한 이상적인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 아니면 도’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두고 바라는 대로 되길 기대하고 실망한다. 여행자와 만나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가는 따뜻한 저녁 식사 시간을 기대한다거나 바다를 보며 어떤 심경 변화를 겪고 차분해지길 기대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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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처럼 여행도 모든 게 뜻대로 되지는 않고, 놀러왔다고 내내 마음이 평온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눈치 보지 않았고, 마음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여행도 없다는 걸, 아쉬운 일도 나답게 마무리하면 만족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착륙한 곳은 바다였다. 어쨌든 돌아오면 바다는 있었다. 모든 아쉬움을 달래주는 안식처였다. 쉬지 않고 파도는 쳤다. 그 소리가 응원하듯 생애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며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그 날로 아침과 낮과 밤의 바다를 전부 감상했다. 오전이었지만 빛이 반사되어 한낮처럼 느껴졌다. 나는 식빵을 씹으며 상상했다. 어린왕자가 사막이 아닌 바다에 떨어졌다면 어땠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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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비상 착륙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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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2.김예린.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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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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