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을 잃고 비상 착륙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1)

어린 왕자의 일곱 번째 별
글 입력 2022.12.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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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길을 잃다



21년과 22년을 잇는 겨울 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 20대에 퇴행성 디스크는 억울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지 않나? 나 정도면 운동도 많이 하고 자세도 좋은 편인데.’ 좋아하던 춤도 출 수 없으니 무기력했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며칠간 기운이 없었다.


겨우내 아침마다 병원에 다니며 생소한 치료를 받았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로봇 기계가 내 목을 잡아당기면 그 시간 동안 병원 천장을 바라보면서 잠을 깼다. 뜨겁게 목을 데우고 강력하게 마사지하는 도수 치료도 받았다. 막바지에는 최종 보스를 만나러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진료실에 올라가서 누우면 의사 선생님이 닭 모가지 비틀 듯 내 목을 파워풀하게 양쪽으로 꺾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술이라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교정기를 끼고 로봇처럼 제자리에서 한참을 걸었다. 효과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야 했다.


그래도 앉아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간단히 산책도 하고, 밥도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따금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쉬지 않고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관두는 것은 기뻤다. 자의든 타의든 당분간은 주말에 일을 안 해도 되었다. 1년 만의 자유였다.


오랜 만에 화장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섰다. 5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었다. 그러나 역 입구 앞에서 멈춰서야만 했다. ‘맞다. 어딜가야 하지?’ 머릿속으로 완벽한 주말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평소의 나라면 기분에 맞는 루트를 자동으로 꺼낼 텐데 웬일인지 오늘은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안 했다. 한동안 난감한 표정으로 역 앞을 서성였다. 황당하게도 집 앞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됐다.


심각한 표정으로 20분간 멈춰 서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날의 일이 내겐 충격이었다. ‘즉흥적이긴 해도 결정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라고 생각하다 사소한 결정이 어려워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택을 유보하고, 당장의 일들만 처리해온 날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는 중요한 결정들을 하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완벽하고 싶어서 시작도 못 하는 완벽주의자의 말로는 혼란스럽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던 내 심리적 문제를 포착한 순간이었다.


그래. 하기 싫은 일을 모두 관둔 김에 여행을 가야겠다. 여러 스트레스와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시퍼런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하루종일 바다를 보면 머릿속도 파도가 쓸고 지나갈 것 같았다. 그러면 다시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몇 일 뒤 강릉행 기차표를 끊었다.

 

 

 

어린 왕자의 일곱 번째 별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나 다른 행성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행성은 지구였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 여행은 어린 왕자가 지구를 향하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그는 사막에 떨어졌지만 말이다.


숙소는 해변 근처에 잡았다. 매일 바다로 걸어 나가고 싶었다. 나는 짐을 던져버리고 바로 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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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2시의 바다는 따뜻하고 강렬했다. 보글거리는 흰색의 거품이 태양 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몇 초면 사라지는 반짝이는 거품이 예뻐서 계속 바라보았다. 여름에도 바다를 찾지 않으니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바다는 원래 그 자리에 항상 있었는데도 나는 신기했다. 파도의 움직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인지 모를 사람들이 저 멀리 지평선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리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바다의 발끝 언저리에서 서성였다. 달과 지구의 중력은 바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만들었고, 바람은 그 위에 화음을 얹었다. 나는 그 진자운동 앞에서 최면에 걸린 듯 평온을 느꼈다.

 

하염없이 바다를 듣고 보며 느끼는 행위가 머릿속을 비워내는 일이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 생각이 한참 동안의 추위를 견디게 했다. 파도의 소리는 귓속의 솜털마저 씻겨 내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깨끗이 비워질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바람은 믿음이 되어갔다.

 

 

 

다소 이상적인 저녁 모임을 꿈꾸다


 

바다도 바다지만, 간 김에 한 끼 정도는 유명 맛집을 가고 싶었다. 몇 년 전 강릉 여행에서 실패했던 식당 몇 군데가 떠올랐다. 예를 들면 조개 구이집인 줄 알았는데 조개 폭탄을 구경하다 온 기억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바닷가 근처는 1인 손님이 환영받지 못하는 식당이 꽤 많다. 꼬막 비빔밥, 물회, 짬뽕 순두부 뭐든 전부 2인 이상 가능했다. 혼밥은 무섭지 않지만, 음식이 남는 것은 무서웠다. 미리 밥 먹을 사람을 한 두 명정도 구해야겠다. 출발 하루 전, 여행 동행을 구하기 좋다고 알려진 카페에 가입을 하고 급하게 게시물을 올렸다.


 

[저녁 식사 동행 구함]

0월 00일 강릉에서 저녁 같이 드실 분 구합니다.

혼자 갈 예정이라 2인 이상 식사는 못 해서요. 그래도 저녁 식사는 맛있는 걸 먹고 싶네요.

여행객끼리 저녁 먹으면서 일과 나누고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평일의 일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쪽지가 왔다.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금 수상쩍은 느낌이 들어 활동 내역을 찾아보았다. 여행객이 아닌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출발도 전에 매우 피곤해졌다. 어찌 어찌 인원을 추려서 두 사람과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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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이 아무리 뜨거워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나는 몸을 녹이기 위해 카페로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며 카페의 정경이 흐릿하게 더해진 바다를 구경했다. 아까는 우주에 도착한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그 풍경을 스크린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영화가 끝나도 한 뼘 앞의 바다를 직접 느끼러 갈 수 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여행온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창 느긋한 점심을 만끽하는데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제가 카페이긴 한데요… 저녁 전까지 하고 싶은 일 없으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벌써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반대로 조금 이른 저녁 시간, 나머지 동행까지 모여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출장 차 들르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이별 여행을 온 듯싶었다. 우연히도 두 사람은 나이가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주최자답게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떤 걸 했는지, 그리고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다. 도착하자마자 먹은 장칼국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첫 대화는 무난히 흘러가는 것 같았는데 5분 만에 다른 화제로 전환이 됐다. 한 사람이 우리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공교롭게도 셋 다 이별한 사람들이었고, 내가 제일 오래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대화 주제가 반갑지 않았다. 두 남자는 동갑에, 이별 스토리까지 비슷했다.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소주잔을 부딪쳤다. 꼬막 비빔밥이 맛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화기애애하게 오늘 내일의 일정과 동해의 멋짐, 여행자의 감상을 나누고 싶었지만 눈만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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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술의 힘은 대단했다. 몸은 겨울바람으로 노곤해져 있었고, 아쉬운 마음은 몇 잔의 술만으로 희석되었다. 내 주변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신기한 마음도 있었다. 둘은 공감을 잘 주고받았는데 그중 가장 공통적인 부분은 혼자인 상태를 못 견뎌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강릉까지 여행을 올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은 그것이 처음이라 너무 어색하다고 했다. 솔직히 남자 혼자 다니는 것은 좀 불쌍해 보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는 남자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든 바다를 구경하든 어디를 가든 혼자라면 가엾게 여겼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에 ‘저는 누군가 혼자 다니는 거에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사실 그들을 인지조차 못 해요. 그러니 판단하는 단계까지 갈 수도 없죠. 근데 다른 사람들도 이럴거에요.’라고 말하며 그에게 용기를 주려고 노력했지만 잠깐의 노력은 소용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랬다. 당연히 혼자 다니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한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연애사로 귀결시켰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남에 대한 아픔과 억울함을 곱씹고 하소연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야기를 성실히 들어줬다.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한편으론 나의 연애관과는 많이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차에서 무르익은 분위기는 2차로 이어졌다. 혼자의 시간을 보내러 왔는데 첫날부터 낯선 사람들과 술 바람이라니 스스로가 웃겼다. 감정은 쉽게 전염되고, 술은 어색한 관계도 막역한 관계로 바꾸어 주었다. 낯선 사람과의 선은 간당간당하고 좋은 기분이 나쁜 기분이 되는 것도 한 순간이다. 모두 말을 놓으면서 더 편한 분위기가 되었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사람들을 한 번 체크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들 괜찮으신거죠? 우리 30분 뒤에 일어나요!”

 

우려는 현실이 됐다. 큰 실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여행이 망가지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은 내게 실수하고도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었다. 난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주소를 확인해 숙소로 보냈다. 남은 사람과 지친 듯한 눈빛을 주고받고 내일 짬뽕 순두부나 같이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

 

후. 역시 이런 자리는 ‘모 아니면 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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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비상 착륙한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2022.김예린.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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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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