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스펜스가 이토록 재밌을 줄야 - 레이디스

글 입력 2022.12.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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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 시린 겨울이 다가올 때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러브레터', '윤희에게', '이터널 선샤인' 등 설원과 아련한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 멜로가 즐비하는데 그중 결이 조금 다른 것이 하나. 바로 '캐롤'이었다.

 

두 여성의 사랑이 별나다고 언급하고 싶은 건 아니다. 눈에 띄는 건 그들의 사랑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말랑말랑하고 숨 떨리는 모습보다는 불안하고 위태롭고 어딘지 수상쩍기도 한 감정선을 그렸다. 감시와 도청, 도망 같은 요소까지 들어있어서 서스펜스 드라마 같다 할까.


그 와중에 인물들이 서로에게 비치는 애정은 더할 나위 없이 깊어만 간다. 이 언밸런스한 장치들을 '잔잔함과 따스함'이라는 톤 앤 매너로 이끈다. 격정적이고 절제하는, 강인하고 불안한, 유약하고 다부진, 정반대의 성질이 동시에 드러나는 별난 영화였다.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작 소설이 있다.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소금의 값'. 그는 당시 리플리 시리즈 등 추리와 스릴러에 능통한 작가로 알려지기도 했고, 자신이 겪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캐롤과 테레즈의 이야기를 실명으로 드러내기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캐롤'에도 나오는 설정이지만,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에드거 앨런 폴 상, 오 헨리 상 등 다수의 수상 기록이 있는 그. 많은 독자에게서 사랑받았다는 말이기도 한데 당시에 책을 읽었던 이들 중 그의 글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가 쓴 『캐롤』은 완독까진 아니어도 절반은 읽어보았으니, 비교를 위해선 그의 또 다른 책을 보아야 했다. 유명한 책들을 뒤로하고 우선은 불안과 기괴함을 주된 정서로 삼은 그의 초창기 소설집 『레이디스』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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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미지의 보물

최고로 멋진 아침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공 튀기기 세계 챔피언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

시드니 이야기

영웅

애프터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

마법의 문

달팽이 연구자

 

 

단편소설집답게 제목마다 끌고 가는 이야기가 짤막하다.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처럼 열 페이지 남짓하거나 아주 길어봤자 「최고로 멋진 아침」처럼 사십 페이지 언저리다. 전체 370쪽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지만, 짧은 글들이 여럿이라서 술술 읽기 좋았다. 하루 이틀만 시간을 들여도 충분할 정도로.


이건 단편 소설이 지닌 공통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 특이한 인상이 있다. 이야기가 헷갈리지 않았다. 단편 소설집이 읽기 쉬운 반면 기피했던 이유가 바로 불분명한 경계 때문이었다. 앞 이야기와 뒷 이야기의 차이가 별로 없어서 챕터를 몇 가지로 나누든 간에 결국 하나처럼 뭉뚱그려졌다.

 

제목을 봐도 내용 연상이 안 되는 건 당연하다시피 했고. 그래서 단편 소설집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잠시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정리가 된 후에 다음 장을 열기. 은근 번거로운 일이라 어느 순간부턴 단편 소설집에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읽은 소설집은 굳이 독자가 경계선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인물들이 저마다 제각각의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겹치는 설정도 없다. 배경도 다르고, 벌어지는 일은 당연히 다르고. 소설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적당히 기억해 두는 걸로 충분한 읽기 시간이었다. 덕분에 작가가 만드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변주에 흠뻑 빠져 들었다.


한 사람이 쓴 글을 여럿 읽다 보면 그의 스타일, 이른바 문체라는 게 보인다. 퍼트리샤 작가는 우선 미사여구가 적다. 불분명한 표현도 없고, 직접적이고 분명하다. '끝없이 계속되는 좀 묵직하고 기분 좋은 꿈 한가운데서 눈을 뜨고 있는 느낌(p.98)'처럼 비유적인 표현은 종종 보이지만 말이다. 이 또한 감정과 상황을 명확히 드러내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가장 특색 있다고 느낀 점. 사물이나 배경 묘사의 큰 틀을 제시할 뿐, 세세하게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이건 문장을 보면 훨씬 와닿을 것이다.


 

루이자는 윤나게 닦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채색 유리가 끼워진 높은 이중문을 열고, 네모난 타일이 깔린 현관을 거쳐, 양지바른 브라운스톤 계단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로 가서 한 블록 북쪽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p.187~8

 

 

깨끗한 작은 강을 따라 한 시간 넘게 달리던 기차가 숲이 울창한 굽이를 돌아 경적을 울리고는 산기슭에 위치한 아담한 소도시 쪽으로 차분하게 증기를 뿜었다. p.45

 

 

문장 호흡이 긴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다만 번역이 잘 된 것인지 번역체 특유의 수동태가 거의 없고 주어부터 술어까지 매끈하다.

 

무릇 단편소설이라면 시작은 명료하되 끝은 살짝 덜 지어진 매듭처럼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짧은 이야기가 지닌 임팩트가 오롯이 느껴지니까. 긴장감 조성에 능통한 작가여서인지 그는 언제, 어떤 말로 끝내야 가장 적절한지 잘 아는 것 같다.


 

"프림로즈라네. 어, 뭐더라, 영국의 프림로즈는 노란색이라더군." p.181

 

 

중간에 뚝 끊겨버린 대화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느낄 때가 있어서인지 그의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깊은 여운이나 의문에 빠져 멈칫할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얄팍한 전개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휙휙 넘겨댈 정도는 아닌. 오묘한 줄타기가 재밌어서일까. 분명 사람의 불편한 감정을 콕콕 건드리는 설정들이 넘치는데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았다.

 

안타깝고 애석하고 다소 허망한 감정이 들다가도 재밌다는 생각에 지배된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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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가 넘는 이야기들 중 그렇게 재밌던 몇 가지만 꼽자면, 음, 그랬다간 제목을 모두 나열해야겠다.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남다르다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재밌는 포인트가 소설마다 다르다 보니 하나하나 다 의미 있다.

 

다만 특징적인 소설 몇 가지는 말해볼 수 있겠다. 우리 일상에서 쉽게 느낄 정서로는「공 튀기기 세계 챔피언」, 소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해하며 읽은 건「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관찰자 시점의 전개와 자유로이 넘나드는 관점이 돋보인「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 이렇게 세 가지다.


추리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은 작중 인물들의 심리를 흥미롭게 보여준다고 한다. 퍼트리샤가 '서스펜스의 대가'라고 불린 위상을 느끼기도 했고, 그 또한 심리를 교묘하게 들춰내고 감출 줄 안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그 반응들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끝맺음에 다다르는지. 특히 상황 묘사를 할 때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충분히 'showing'이 가능하단 걸 처음 깨달았다.


그가 직접적인 어휘와 문장으로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풀었을 『캐롤』을 끝까지 읽어보고, 이걸 토드 헤인즈 감독이 영화의 언어로 어떻게 구현했을지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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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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