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2월 어느 사찰에서의 [여행]

글 입력 2022.11.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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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절_침엽수.jpg

 

 

절에 갔다 차를 마시는 사이 쌓인 눈에 일주문을 채 지나지 못하고 견인차를 부르는 내용의 소설을 읽자, 지난 연말 다녀왔던 강원도 어드메의 절간이 생각났다. 버스를 탄 채 일주문을 지나는 건 내 생에 처음이었다.


버스에는 나와 내 짝꿍, 패딩을 입은 남자와 동네에 사시는 듯한 할머님, 그리고 수능을 막 친 듯한 여자 두 명이 타 있었다. 갑자기 시작되는 경사로 입구에는 정류장이 하나 있었고, 정류장 벤치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정류장 앞에 거칠게 멈춘 버스는 그를 태우자마자 출발했고, 그렇게 일주문을 지났다.


그런데 일주문을 지나기 무섭게 그 남자가 좌석에서 일어나더니 할머님에게 돈을 받는 것이 아닌가. 돈을 받은 그는 종잇조각을 건넸고, 그렇게 패딩을 입은 남자와 학생을 거쳐 맨 뒤에 앉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사찰의 매표소 직원이었던 게다.


사찰의 매표소라니. 유서 깊은 사찰이라 경건하고 숙연하게 일주문을 지난 내 마음이 괜히 무안했다. 2인분의 입장료를 내자 그가 ‘2인’이 찍힌 입장권을 건네주곤 벨을 누르더니 빠르게 하차했다. 버스는 심지어 정류장도 아닌 휑한 길가에 그를 내려주었다. 템플 스테이 일정이 적힌 현수막이 나무에 걸린 채 흔들거렸다.


급한 하차에 비해 여유로운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 그의 하루가 궁금해졌다. 매일 이렇게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고 입장료를 받고 다시 내려가는 걸까. 몇 시까지 반복하는 걸까. 지루하진 않을까. 도로 위 작은 돌멩이들에 버스가 덜컹거리며 방향을 틀었고, 걸어가던 남자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오지랖 섞인 시선도 매표소의 남자에서 황량하게 꺾인 나무들로 옮겨갔다. 지난 태풍의 흔적이었다.

 

 

[크기변환]절_강.jpg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꽤나 걸어야 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던지면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로 얼어버릴 듯한 살인적인 추위였다. 매운 바람을 도란도란 대화로 외면하며 걷다 보니 꽁꽁 언 천변을 지났고 양옆으로 침엽수가 늘어선 큰 길목을 지났다.

 

 

[크기변환]절_나무 하늘.jpg

 


카메라를 들고 온 짝꿍은 이따금씩 바람 한 점 없는 척 맑고 높기만 한 하늘과 설산, 높이 뻗은 침엽수를 찍었다. 아래에서 보니 가지가 풍차 모양으로 뻗었다며 신기해했다. 하늘은 투명했고 채도 낮은 산은 매서운 풍한에도 아늑했다. 내가 살던 세계는 일주문을 지나며 멀어진 지 오래였고, 얼어버린 물과 땅은 그저 적막했다. 바람 소리와 발소리로만 가득한 시간이 과연 몇 분이나 되었을까. 천왕문이 보였다.

 

돌계단도 얼어있어 모든 걸음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어갔다. 헌데 이게 무슨 일이람. 천천히 올라간 계단의 끝에서 우리는 공사 중인 건물을 발견했다. 그것도 상당히 크게. 절 한가운데에 노란 바리케이드가 둘러져 있었고, 그 뒤의 대웅전은 출입이 불가했다. 이따금씩 보이는 종무원들은 지루해 보이는 낯이었다. 무슨 일을 하실까. 적적하진 않으실까. 또 쓸데없는 참견을 해보다 말았다. 다양한 ‘일’의 형태에 유독 관심이 많던 시기였다.


모든 건물의 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공사 중인 마당만 기웃거렸다. 쇠파이프 사이로 초록색 그물이 보였고, 그 안의 석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석탑을 보려 온 것은 아니었으나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었다. 가질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안 준다고 하면 괜히 탐나는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나는 영락없는 소시민적 인간이라 그런 편이다.


대웅전도 한 바퀴 돌아본 뒤 불교용품점에 들어가 염주를 하나 사 들고 나왔다. 역사 깊으시잖아요, 제 원 좀 들어주셔요, 하는 마음으로. 정작 내 진정한 원은 무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여간 바라는 것만 많다.


자조적인 마음으로 누각 아래를 지나 절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듯한 부부가 서로에게 땅을 조심하라며 우리를 지나쳐갔다. 우리도 조심하자, 말하려던 찰나 짝꿍이 다소 넓게 움푹 파인 땅 위에 고인 채 얼어버린 물 위로 발을 딛고는 스케이트 선수 마냥 미끄럼을 탔다. 사살사살하기도 싫고 재밌어 보여서 나도 같이 탔다. 잠깐을 그렇게 놀았다.


전각 내 찻집에 들어간 우리는 쌍화차 두 잔과 비건 스콘을 시켰다. 계란 동동 쌍화차가 아니라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맛은 좋았다. 에는 듯한 추위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삽시간에 녹자 나른했다. 스콘은 조금 퍽퍽했지만 출출했던 우리는 잔도 비우고 접시도 비웠다. 조금은 중년 부부다운 루트가 재밌어서 조금은 웃기도 했다. 웃다 보니 뭔가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크기변환]절_쌍화차.jpg

 

 

다시 천왕문을 나와 아까보다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아까 숲길을 걸을 적보다 구름이 늘어난 하늘을 찍었다. 하늘을 찍는데 나무가 높아 자꾸 같이 찍혔다. 찍고 싶은 것을 찍다 보니 하늘과 나무와 짝꿍과 은은한 햇빛으로 갤러리가 가득 찼다.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소박한 것들에서 재미의 파편을 찾은 듯했다. 사진을 많이 찍는 날이면 으레 그랬기 때문에.

 

 

[크기변환]절_하늘 나무.jpg

 


2차선임에도 버스 정류장은 하나뿐인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다른 가족과 함께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버스 기사님의 등장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버스 안에서 몸을 녹이며 이동한 우리는 송어회를 먹으러 갔다. 송어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짝꿍이 호언장담하며 이 도시에 데려온 것이 여행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간 송어 전문 횟집에는 금붕어 여러 마리가 사는 수조가 있었다. 김이 펄펄 나는 매운탕 너머로 금붕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식당 안쪽의 테이블에서는 횟집 주인 부부의 손자가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것도 괜히 멋쩍었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면서도 즐거웠고, 그래서 그냥 웃었다. 답답해서 떠난 여행이어서 그랬을까. 그저 웃고만 싶었다.


첫 인턴 생활을 마친 뒤 떠난 첫 여행이었다. 부품처럼 갈아치워졌을 내 자리와 다가오는 연말은 지금 당장 주어진 여유를 즐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무용한 조바심에 하루하루 쫓기다 속이 터져 종내 선택한 비일상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서도 아리송했다. 일상이 막막하다고 해서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될까. 이러다간 나중에 여행 하나에 일상을 버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허나 여행을 시작한 지 머지않아 내 의문은 실로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속에 꼬인 습기는 어떻게든 빼내야 상쾌한 공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거구나. 대부분의 고민은 생각지 못한 찰나에 해결된다는 점은 그리 잘 알면서 왜 약해지는 정신력은 의자에 가만히 앉은 채 지키려고만 했을까. 부처님은 뵈지 못했지만 현답은 얻은 듯했다. 일상 속에서 희미해지는 것은 비일상에서 뚜렷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내 소망은 아마 ‘22년도에는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따위의 것이었을 터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된 듯 안 된 듯해서 약간은 아쉽다. 지금의 모습보단 근사한 모습을 상상했을 텐데, 썩 그만큼 멋있지는 못한 것 같아서다. 하지만 원래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인 게다. 만사에 기대하지 않고 실망할 각오를 품고 살아가는 성정이라지만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매번 논외가 적용되곤 한다. 그래도 인생은 새옹지마고 다들 아등바등 살아가니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만다. 과거에 연연하기 싫은 마음으로 앞으로 바삐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많이 나아가 있을 테니.


공사 중인 석탑과 계란 없는 쌍화차, 거대한 수조에 금붕어를 키우는 횟집과 버스에서 내는 사찰 입장료가 환기해 준 내 속은 예전만큼 단단해졌고, 여즉 그렇다. 앞으로도 이렇게 예민한 듯 무딘 성질로 지난날에 묶이지 않고 앞날을 향해 손을 뻗으며 살기로. 흔들릴 적이면 비일상을 찾고, 비일상은 어디서든 쉬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니.

 

 

[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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