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하나의 움직임에 무수한 감정을 담아서 - 정인정 배우

글 입력 2022.11.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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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거울 포스터_최종.jpg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흐르는 땀, 떨리는 손, 가빠지는 호흡이 새어 나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몸은 표정이나 말보다 솔직하다. 상대방의 몸짓에서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읽어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한 가지 보게 되는 셈이다.


움직임극을 추구하는 극단 정:지는 사람들이 숨기려 하지만 이내 드러나 버리곤 하는 감정과 생각을 무대 위에서 다양한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이를 ‘어글리 무브먼트(Ugly Movement)’라고 명명한다. 최근에 공연했던 <거울>로 예를 들자면 주인공 해정이 의사에게 병 진단을 받는 순간은 총을 맞는 것으로, 뒤이어 의사의 말을 듣는 모습은 해정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정:지의 움직임을 만드는 사람은 정인정 배우다. 정:지의 대장이라는 그는 연출도 하고 배우도 하고 움직임도 만든다. <거울>에서는 해정 역을 맡아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어려워하는 딸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줬다. 무대에 서는 것은 어느덧 10년 차. 어렸을 때 한국무용을 전공하며 춤으로 무대에 서기를 꿈꿨던 그는 방식은 좀 다를지라도 결국 무대에 머무는 사람이 되었다. 해정과는 달리 인터뷰 내내 유쾌하고 솔직했던 정인정 배우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우리 안의 ‘어글리 무브먼트’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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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도 움직임이고 손을 뻗는 것도 움직임이거든요.”

 


최근 정:지의 여섯 번째 작품, <거울>을 끝마치셨습니다.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지난 두 달간은 <거울> 연습을 하며 해정에게 빠져 있었어요. 해정이 불안정한 면이 있는 친구였기에 저도 아직은 우울감이 남아 있어요. 그래도 배우로 10년 차가 되니 예전보다는 배역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요. 곧 새로운 공연 연습을 시작하면 기분이 많이 바뀔 것 같아요.

 

 

<거울>에서 움직임을 담당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연극에 움직임 담당자가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배우님은 움직임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나요?


정:지가 추구하는 움직임은 ‘어글리 무브먼트(Ugly Movement)’라고 해요. 어글리 무브먼트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여주기 꺼리는, ‘못생긴’ 모습이에요. 연극에 나오는 인물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인물의 진실한 내면에 가까워지는 듯해요. 성격도 더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요. 저희는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을 고민합니다.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은 특별한 것 없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요. 이렇게도 움직여보고, 저렇게도 움직여보고. 저희가 다 전문 무용수가 아니다 보니 표현하고 싶은 게 마음속에는 선명한데 몸으로는 잘 표현이 안 될 때도 있죠. (웃음) 그럴 때는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 앞에서 실제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생각해봐요. 

 

초반부 소개팅 장면을 예로 들면, 저희는 인물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럼 우리가 실제로 긴장할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부터 생각해보는 거죠.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긴장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말을 더듬고, 때로는 과하게 열심히 말하려 하기도 해요. 그런 부분을 포착해서 움직임으로 표현합니다.

 

 

배우님은 움직임을 담당하면서 배우님이 맡은 인물 연기도 해야 하니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계속 일반 배우로만 활동했다면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정:지를 만들기 전에 1인 극단을 운영하며 움직임극을 계속해 왔거든요. 그때 여러 배우와 만나서 다양한 몸이 움직이는 방식을 공부하게 됐어요. 지금도 공부 중이고요. 사람마다 움직이는 모양이나 간격이 다 달라요. 스트레칭만 해봐도 잘 되는 사람, 좀 힘들게 하는 사람, 아예 안 되는 사람이 있죠. 그런 다양한 사람과 함께 어느 범위에서 어떻게 몸을 움직였을 때 감정이 좀 더 잘 드러나는지 의논하면서 움직임을 찾아갑니다. 

 

 

그런 것들을 무용이 아니라 움직임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용’이라 하면 어렵고 엄격한 규칙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정해진 각도만큼 팔을 올리고 다리를 벌리는 식으로요. 반면 움직임은 더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어요. 걷는 것도 움직임이고 손을 뻗는 것도 움직임이거든요.

 

 

 

모두에게 공부가 된 작품,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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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을 나가야만 비로소 끝났다는 느낌이 들길 바라요.”

 


공연을 하며 움직임이 수정되기도 하나요. 


물론이죠. 움직임의 전체적인 틀과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배우들의 컨디션이 매일 다르고 오늘 느끼는 감정과 내일 느끼는 감정도 아주 미세하게 다르거든요. 그 감정의 차이는 배우 본인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거울>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정이 혼자 움직이는 부분이 있는데, 정해진 순서를 따르되 디테일한 부분은 제 감정에 따라 매일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죠. 

 

 

움직임 담당자로서 <거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움직임은 어떤 것이었나요?


해정이 병원에 갔던 장면이요. 극중 해정에게 의사란 냉담하고 무서운 인물이라서 의사의 말이 상처가 되고 있다는 것을 해정이 여기저기 맞는 것으로 표현했어요. 모두가 보는 순간 바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서 움직이는 모습, 공연이 끝난 후에도 퇴장하지 않고 무대에 남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해요. (웃음) 저는 관객으로 연극을 보러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연극이 시작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기다리는 동안 텅 빈 무대를 보고 있는 것보다 무대에 사람들이 나와 있어서 이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건 뭘까 궁금해하는 게 좋아요. 마찬가지로 끝날 때도 이야기가 끝났다고 끝이 아니라 극장 밖을 나가야만 비로소 끝났다는 느낌이 들길 바라요. 

 

 

배우님이 바라보는 해정은 어떤 인물인가요? 해정에게 공감했던 부분, 또는 공감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엄마랑 굉장히 친하고 솔직한 이야기도 많이 하는 사이인데, 해정이는 엄마가 어려워서 해야 할 말도 그냥 삼키잖아요. 제게 당연한 것들이 해정에게는 그렇지 않아서 낯설고 놀라웠어요. 해정과 엄마가 통화하는 장면은 잘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많이 했던 장면이에요. 나였다면 솔직하게 다 얘기할 텐데 말을 자꾸 돌리는 해정을 연기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고민 끝에 해정이를 다시 분석해보기로 했어요. 해정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을 줄여서 하는 아이, 많은 것들을 참아내는 아이예요. 제 주변에 그렇게 참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보니까 그냥 잘 웃더라고요. ‘네, 괜찮아요.’ 하면서 웃음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해정을 연기할 때도 그런 식으로 접근을 했던 것 같아요.

 

 

정:지에게 <거울>은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요?


저의 경우 엄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요. (웃음) 이번 작품은 슬지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게 의미가 커요. 여러 가지 여건상 슬지가 해보고 싶었던 모든 걸 다 해보지는 못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죠. 또 이번 작품은 순영 역을 맡은 최서연 배우의 입봉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어요. 다들 고생을 했기에 저희 팀 모두에게 많은 공부가 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무대 위에서 보낸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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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연극만이 불러올 수 있는 향수가 있다고 믿어요.”

 


배우 일을 10년 하셨다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춤을 전공하셨다고 들었는데,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4살 때부터 17살까지 한국무용을 했어요. 그러다 발목도 안 좋아지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만두고 방구석에만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저희 이모가 연극 표를 가져와서 18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봤어요. 항상 큰 공연장에 익숙했는데,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에는 처음 가본 거죠. 극장이 너무 작고 낡아서 놀랐고, 공연도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몇몇 장면만 파편처럼 남아 있죠. 근데 그걸 보면서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지도 모르면서 눈물이 나고. 이걸 해야겠다 싶어서 그 길로 극장에서 청소하면서 일을 배웠어요. 

 

 

고등학교 때 처음 본 연극으로 연기를 결심하고 극장 청소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거의 청춘 드라마 스토리 아닌가요? (웃음)


그때는 제가 춤을 계속 춰왔기에 무대 위에 서지 않는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걸 아예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연극영화과에 다니기도 했는데 자유분방한 제 성격과 학과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 유학을 갔어요. 미국에서 극단 생활도 했는데, 영어에 서툴러서 힘들었어요. 제가 입을 열 때면 자꾸 극의 몰입이 깨져서 대부분은 대사 없는 역을 맡았죠.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며 거기 계신 연출님께 연극을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연출을 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우연히 기회가 생겨서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첫 연출을 하게 됐어요. 근데 솔직히 망했거든요. (웃음) 지인들 표정이 묘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누군지 모르는 관객 한 분이 치유가 되었다는 말을 해줬어요. 그 말 하나로 “그럼 난 연출을 해야겠다.” 그렇게 된 거죠. 

 

 

그래도 연기가 잘 맞았으니까 10년간 해오셨을 것 같아요.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때론 엄청난 공포고 연습할 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요.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내가 맡은 인물만 생각하게 되고요. 그 인물과 계속 함께 사는 거예요. 맡는 역할에 따라 살이 빠질 때도 있고, 반대로 확 찔 때도 있어요. 그래도 그 친구들과 함께할 때 또 다른 나를 발견해요.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치유와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걸 느낄 때도 있습니다.

 

 

처음 꿈꿨던 무용수의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무대를 계속 떠나지 않은 셈인데요, 배우님이 무대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연예술의 무엇이 좋은지 듣고 싶습니다. 


연극은 소설책 읽는 느낌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장소도, 표현 방법도 한정적이기에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거든요. 또, 저는 좋은 극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한 달에 만 원 좀 넘게 내면 온갖 영상을 다 볼 수 있는 시대에 공연예술은 어떻게 보면 클래식한 것,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대에도 빈티지 샵에 가고 레트로를 찾듯이, 연극은 연극만이 불러올 수 있는 향수가 있다고 믿어요. 그게 공연예술의 매력 아닐까요?

 

 

배우님이 앞으로 맡아보고 싶은 배역이나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나요?


배역은 뭐든 다 재밌어요. 저는 활기차고 웃긴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많이 못 해본 게 좀 아쉬워요. 해보고 싶은 공연은… 대극장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구상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50명 넘는 사람이 무대에 등장해서 패싸움하는 모습을 움직임화하는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지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웃음) 함께하는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규호, 소연, 선민, 영서, 서연, 슬지. 그리고 저 인정에게도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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