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토미에를 갈아 마신 선희 씨 [공연]

2022 코미디캠프 : 파워게임
글 입력 2022.11.0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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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에 보고 온 공연을 무려 11월이 다 되어서야 리뷰합니다.

 

인생 처음으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다 스탠드업 해있죠?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저는 오래전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매력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한 사람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로 시작해 전개하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람을 얼마나 웃게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까다로운 이유는 공연이 그저 우습기만 해서는 안 되어서입니다.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는 분명히 꼬집는 대상이 있습니다. 레이시즘, 안티페미니즘, 논비건. 이런 어려운 단어로 보니 상당히 진보적인 주장을 내뱉는 공연일 것 같지만, 꼭 정치적인 건 아닙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일상적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무대에는 네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 조금은 찌질해 보이는 남성, 장애를 가진 남성, 큰 개와 함께 있는 여성. 이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매일 고뇌합니다. 우리처럼요. 이따금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철학적인 고민이며 보통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성별을 가졌고, 혹은 성별이 없습니다. 대부분 만족하지 못할 만큼의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너무 말랐거나 굴곡이 보기 좋거나 볼이 이상하게 패였거나 머리카락 숱이 적거나 많거나 구불구불하고 다리 모양이 이상하거나 아무튼 그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특징을 머금고 태어납니다. 한 사람의 특징은 너무나도 많아서 그 수천 가지의 두드러지는 점을 모두 특징이라고 불러도 될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사회는 라벨을 붙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지 않게 모두 특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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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 씨는 개와 함께 삽니다. 일반적으로 대형견으로 분류되는 크기의 개입니다. 안담 씨는 길을 걷기만 해도 자신의 특징을 목도합니다. 버거워 보일 만큼 큰 개와 함께 걷는 마른 여자. 무대에서 내려와 잠시 인사한 안담 씨는 여성인 제가 보기에는 그리 키가 작은 편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를 마르고 왜소하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그 특징은 일반적으로 그를 '만만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를 쉽게 생각하고 개에 대해 훈수를 두며 개 주인의 몸매 따위를 평가합니다. 세상은 그래요. 원하는 특징을 꼬집어보고 그걸 이유 삼습니다. 저는 길에서 안담 씨를 마주쳤다면 눈을 흘기거나 피했을 것 같습니다. 안담 씨는 큰 개를 산책시키며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저보다 키도 큰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다 상대적인 것이겠죠.


선희 씨는 엄청난 공연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지만 눈에 선한 그녀의 부엌에는 각종 가전제품들이 있습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에어프라이어, 오븐, 커피포트. 뭐든 생각나는 주방용 가전제품은 전부 그녀의 부엌에 있어요. 선희 씨는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러다가 토미에를 만나요. 토미에는 죽고 싶다고 합니다. 토미에는 이토 준지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남자에게 사랑받는 순간 살해당하는 루프에 빠져있어요. 만족과 끝을 모르는 작가 덕에 영원히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토미에는 선희 씨에게 자신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선희 씨는 그 일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를 죽이고 자르고 갈고 곱게 만들어서, 그걸 마셔요. 벌컥벌컥. 그걸 보는 저조차 토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무대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조명과 선희 씨뿐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선명한 혈흔과 토미에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그 행위에 빠져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희 씨가 토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선희 씨가 그 이상한 부탁에 왜 동참했냐고요? 선희 씨는 토미에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로맨틱하지 않나요.


강수 씨는 장애인입니다. 그것도 잘 숨겨지지 않는 장애 말입니다. 강수 씨는 자신의 장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었지만, 그 단어가 너무 길고 부담스러워서 듣자마자 잊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남의 장애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데도 말이죠. 강수 씨도 이에 대해 말합니다. 뻔히 휠체어를 타고 가고 있는데 지하철 버스 타는 게 뭐가 그렇게 불편하냐고 묻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에게 '출근길에 분란 만들지 말고 일단 기다려라'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정치인도 말이죠. 강수 씨는 그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습니다. 이렇게나 선명한 장애(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무례함을 압니다.)를 가지고 있는데도 기다리랍니다. 방해하지 말고요. 할 수 있는 걸 하고, 죽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라고 기껏해야 안경을 쓸 정도의 시력을 가졌거나 환절기에 불편한 비염을 가진 이들이 말합니다. 다들 불편한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그 눈과 코가 언제 얼마나 더 나빠질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강수 씨는 무대 아래의 예비 장애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예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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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의 제목은 <파워게임>이었습니다. 힘을 가지고 놀아보자는 슬로건을 가지고 다 같이 구호를 외치기도 합니다. '파워'라고 말할 때는 목소리에 힘을 싣고 뒷글자를 한껏 끌다가 '게임'이라고 말할 때는 두 손을 앙증맞게 쥐며 모기 목소리로 짧게 발음해야 해요. 무대 아래에 있는 우리마저 조금은 우습게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언제나 좋을 건 아닌 자신의 특징을 내보이며 무대에 서있는 이들과 조금은 웃음으로 연결되는 느낌도 들었고요.


이 공연에서 제일 처음 무대에 선 은한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객과 관객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아주 흥미로운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대 중간중간 제로투와 유사한 자세로 춤 혹은 어떤 몸짓을 선보였고 저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공연 내내 그게 언제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해 하며 봐야 했어요.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은 어떤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이를 긴장하게 만들 수 있다니 세상은 역시 <파워게임>인가 봅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이 공연을 보고 난 후에 나의 특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토미에를 갈아 마신 선희 씨의 충격에서 다 벗어날 즈음에요.) 일단 어린 아시안 여성이니 시작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아직 고백하고 싶지 않은 특징도 여럿 가지고 있네요. 제게는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누군가는 제 특징에 놀라며 배를 잡고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고민한다는 건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 공연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해 명확한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다면, 저는 그건 가짜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본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라고는 이 하나가 전부이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이 글도 공연의 소재로 쓰죠, 뭐. 그렇게 생각하니 삶에 부담이 좀 적어집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사회 전반에 나쁘지 않은 영향일 것 같아 제안해 봅니다.

 

 

2022 코미디캠프 : 파워게임

2022.08.18-28 용산 펀타스틱 씨어터


기획공연 작.출연

김은한 배선희 신강수 안담

인스타그램 지금아카이브 @wenow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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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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