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얼룩진 약속의 세상,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영화)

약속의 소홀함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영화 <중경삼림>
글 입력 2022.10.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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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지 못했던 어느 초가을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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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이 생겨서 오늘은 참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활동 중인 대외활동의 단톡방 채팅 알람이 이른 아침부터 스마트폰 화면 제일 위에 걸렸다. 다시 그 카톡을 확인한 건 두 시간 후 서울을 향해 달리는 ktx의 객실 안에서였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약속이 이리도 가벼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진짜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상습적으로 당일 불참 통보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오래전부터 활동 일정을 공지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활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당일, 무언가에 홀린 듯 노트북을 켰고, 이 영화를 재생했다. 러닝타임이 지속되면서 아침에 단톡방을 통해 공개적으로 받게 된 통보와 어겨진 약속이 많은 사람에게 주었을 감정적 소모를 생각하게 되었다.

 

 

 

약속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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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20년도 더 지난 영화지만 MZ세대에게 다시금 유행하고 있는 영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날 이후로 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중경삼림은 1994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두 이야기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금발의 마약 밀매상과 경찰 223과의 이야기, 두 번째는 경찰 663과 음식점 점원 페이와의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서사는 사랑에 대한 상실과 그에 대한 극복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서사는 따로 존재한다. 바로 ‘약속’이다. 첫 번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경찰 223은 4월 1일부터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애인을 두고 만우절 농담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 스스로 유예기간을 주며 한 달 이후이자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은다. 같은 시각 금발의 마약 밀매상은 중경맨션에 거주하고 있는 인도인들을 매수하여 마약 운반을 계획한다.

 

4월 30일에서 5월 1일로 넘어가는 밤, 경찰 223은 끝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여자친구와 이별한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30개의 통조림을 모두 먹어 치운다. 마약 밀매상은 미국인 브로커의 기만으로 인해 공항에서 인도인들을 놓치고, 암살위협을 받는 등의 위기에 처한다.

 

이 이야기들이 약속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가지 약속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찰 223이 자신에게 내린 한 달의 유예기간을 끝내고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두 먹어 치운 것, 속을 달래려 방문한 바에 제일 처음 들어오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로 하고 마침 들어온 마약 밀매상에게 대시한 것 등등……이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경찰 223은 자신과의 약속을 끝내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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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안의 내용물이 썩었을지 아닐지 우리는 개봉하고 맛을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생일이 지났다고 해서 진짜로 한 살을 더 먹은 것일지 정확하게 파악할 방법 역시 없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에 사람들이 큰 의문을 품지 않고 수긍하는 것은 약속의 소중함에 대해 공감하고 있고, 이를 지키지 않거나 의문을 가질 시에 타인에게 불러올 감정적 소모와 피해를 알기 때문이다.

 

이는 가벼운 약속이더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이해관계가 더 많이 얽혀 있을수록 그 정도가 커질 수 있다. 러시아는 국제법적 조약을 어기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또한 영화의 배경인 홍콩은 1997년 영국의 100년 조차(操車)를 끝내고 중국에 영토를 반환하였다. 이는 영국령 홍콩시민으로 일생을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과 불안함을 야기하였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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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그럴 수는 있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담긴 사과 한마디 없다.’는 것과 같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반응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니 잘 새겨듣고 그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대와 무관하게 약속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이러한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것은 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명과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지켜야 할 약속은 많아지고 있지만 이를 대하는 태도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고 느끼는 오늘날, 중경삼림을 보며 약속의 소중함과 그 의미에 대해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길 바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조림 속 내 자아가 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김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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