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사연은? [공연]

박물관은 이제 더이상 지루한 공간이 아니다.
글 입력 2022.10.04 17:23
댓글 2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박물관은 과연 살아 있을까?

 

기실은 그러하다.

 

구석기부터 개화기까지 우리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 때문이라는 지겨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박물관을 언뜻 본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실...


 

KakaoTalk_Photo_2022-10-04-16-04-26 001.jpeg


 

8개월간 박물관 구석구석을 누볐다. 지난 몇 달간 TBWA라는 광고회사에서 진행하는 주니어보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어떻게 오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나는 화장실부터 휴게실까지 박물관을 구체적으로 누려 보았다.

 

 

img_mobile_intro_bg03.jpeg

 

 

박물관은 크고, 깔끔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해 보였다. 거대한 건물 숲 한구석에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안락한 휴게 공간처럼 보였다.

 

내내 구체적으로 박물관을 보고 있으니 어느 날 번뜩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박물관은 진짜 살아 있다.


박물관에는 유물들이 전시된 방이 수도 없이 많다. 선사, 고대관부터 조각, 공예관까지. 그 방에 있는 유물들은 그냥 전시되는 것이 아니다. 때를 닦고, 광을 내고, 필요하다면 오랜 복원 기간을 거쳐야만 전시관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방 안의 유물들은 고정되어 있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치료받고, 지하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유물이 전시된 방은 몇 달간 문을 닫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찾는 그 유물이 그날, 하필 그 자리에 있다는 건 당신이 매우 운이 좋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매일 매일 변화를 거듭하는 박물관에서 살아 있는 건 유물도, 건물도, 도깨비도 아니고, 바로 사람들이다.

 

유물을 옮기고, 닦고, 복원하고, 보존하는 사람들. 화장실을 청소하고, 박물관 문 앞을 지키는 사람들. 나는 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들의 기민한 발걸음을 보았고, 그들이 이 거대하고, 깨끗한 박물관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매일 다른 밀도로 감탄했다.

 

그뿐 아니라 박물관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이 폈다. 그 덕에 박물관을 감싸는 향기는 달에 한 번씩 달라졌다. 하루는 폭포를 구경하러 갔다가 폭포 너머로 핀 무지개를 보았다. 그것은 그날만 볼 수 있었다.

 

날씨의 신에 의해 박물관은 살아 있다. 아름답고 청결한 모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광장


 

몇 개월의 고민 끝에 우리는 현재와 과거가 박물관을 축으로 이어진다, 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머시브 연극을 기획하게 되었다. 김홍도 그림 속 사람들이 살아서 뛰놀며 현재와 과거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연극 제목은 ‘살아-잇다’였다.

 


KakaoTalk_Photo_2022-10-04-16-04-27 004.jpeg

 

 

그런데 도대체 박물관은 무엇을 이을 수 있는가?

 

그러던 중 연극을 제작해주시는 연출가님과의 회의에서 나는 도대체 해소할 수 없었던 그 궁금증의 답을 찾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 시대에는 얼마나 억압된 목소리들이 많았을까요. 보통 사람들의 억압된 목소리를 풀어놔 주는 게 그 시절 김홍도가, 그리고 우리의 연극이 해야 할 일이겠죠.”

 

 

연출가님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풍경은 국립중앙박물관 열린 마당에 걸린 거대한 현수막들이었다. 그 현수막의 내용인즉슨 국립중앙박물관의 공무직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는 것. 1,000명 중 700명가량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몇 년이고 같은 말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지금 이곳에도, 과거의 그곳에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해도 가닿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있다.


빽빽한 건물 숲, 유일한 휴식 공간처럼 보이는 위풍당당하며 쾌적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순 내 눈에 ‘광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무작위 공격으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뭐라도 시끄럽게 외칠 수 있는 공간. 사람들을 아주 많이 모으고, 그들에게 유의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공간. 그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 현재의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울려 한바탕 놀 수 있는 공간.

 

현대의 우리에게도 김홍도의 “씨름” 속 공간처럼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광장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잇다라는 도전


 

그렇게 기획하고, 제작한 이머시브 연극 ‘살아-잇다’는 적절하다 못해 완벽한 광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변모시켰다.

 

그림 <씨름> 속 엿장수는 박물관으로 뛰어나와 이런 대사를 외친다.

 

 

131.jpg


 
“인생이 나한테 빅엿을 줬지만, 나는 사람들한테 이 달달한 엿을 주기로 했어. 인생은 어떻게 엿을 안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맛있게 엿을 먹는가! 이거거든!”
 

 

과거의 엿장수 목소리를 빌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위로를 전한다. 엿장수의 목소리에 공감한 관객들은 ‘얼쑤’ 소리가 절로 나는지 곳곳에서 환호가 들려온다.

 

 

IMG_9081.JPG

 

 

그리고 기존의 복잡한 엿 타령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이런 엿 타령을 부른다.

 

 

“이거 하나 먹고 일어나엿. 쓰러진 사람 버얼떡 일어나게 하는 엿이란다. 슬픈 거 툭툭 털고 일어나엿. 엿이나 먹어라.”

 

 

괴롭고, 고단한 일상이 과거 사람들의 춤과 흥 덕에 유머로 점철되는 경험은 놀라웠다.


그 외에도 그림 <시주> 속 인물이 요즘의 불안 사회를 꼬집고, <신행길> 속 인물들이 보여주기식 결혼 문화를, <주막> 속 인물들이 알바생들의 고충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넓은 공간을 백분 활용하여 배우들은 관객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연극을 진행한다. 관객들에게 서슴없이 말도 건다. 결국 현대와 과거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좋은 삶’에 대한 고민까지 나아간다. 어떤 시대에나 탐구해온 문제이지만 정답은 없다.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열린 광장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대화를 주고받고,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

 

 

IMG_9059.JPG

 

 

연극의 말미에는 ‘김홍도’ 역을 맡은 배우가 무대에 선다. 그는 외로웠던 생의 말년 <추성부도>를 그렸다. 그를 유일하게 위로해주던 존재들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었다는 듯이 무대 위로 그림 속 사람들이 모두 올라온다. 김홍도는 그들과 함께 멋진 춤사위를 보여준다.

 

김홍도에게 예술이 그러했듯 관객들 개개인에게도 자신을 위로해줄 무언가가 있길 바란다는 마음이, 춤을 추며 살아가자는 과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IMG_9067.JPG

 

 

박물관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사람들은 살아 이었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 어떤 슬픔과 고민, 잊고 있던 일상의 춤사위.

 

연극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의미를 찾자면 이러하지만, 박물관에 직접 방문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연극을 즐길 수 있다.

 

현대적인 공간에 침입한 과거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이 충족된다.

 


KakaoTalk_Photo_2022-10-04-16-04-27 006.jpeg

 

KakaoTalk_Photo_2022-10-04-16-04-27 007.jpeg

 

 

10월 5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의 유물들에 얽힌 우리가 몰랐던 슬프고도 무서운 이야기가 가을밤 오싹한 연극으로 찾아온다. 수요일과 토요일 총 네 번, 저녁 8시마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연극을 놓치지 마시길!

 

 

 

IMG_5438.JPG

 

 

[최유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2
  •  
  • 현웅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런 걸 하다니.. 박물관을 바라보는 참신한 시각이네요:) 좋은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야간괴담회도 가봐야겠어요 !
    • 0 0
  •  
  • 문어지지말기
    • 억압된 목소리를 김홍도의 그림과 함께 연극으로 풀어내다니 아쉽게도 관람하진 못했지만 무척 재밌어보이네요! 야간괴담회 기대하겠습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