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야기의 은하수 -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2 '미리내(Mirinae)'

창작자들이 만들어 낸 오래된 미래
글 입력 2022.10.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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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년 동안 독립 애니메이션 작품과 창작자, 관객과 함께 성장해온 세계 유일의 아시아 애니메이션 영화제, 인디애니페스트가 올해를 맞이해 ‘서울인디애니페스트’라는 새 이름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사람들의 지속 가능한 소통의 장으로 발돋움했다.

 

찬란한 색의 향연, 이야기의 은하수, 캄캄한 밤 여행자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별, 그 별들이 강물이 되어 반짝인다는 뜻의 ‘미리내(Mirinae)’는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2’가 내걸은 올해의 새로운 슬로건이다.

 

이에 따라 올해 인디애니페스트에 신설된 장편 부문 ‘미리내로(Mirinae Road)’에서는 국내 및 아시아 지역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이는 기존의 영화제 섹션명 ‘새벽비행’과 ‘독립보행’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학생 애니메이터들의 첫 새벽비행으로부터 시작해 기성 애니메이터들이 작가로서 홀로 나아가는 독립보행을 지나, 다양한 빛깔을 내는 별들의 강 미리내로 향하는 확장의 여정을 뜻한다.

 

즉, 미리내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오래된 미래이자,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가능성과 연결된 미래이다. 인디애니페스트는 그들의 출발지 또는 경유지이자 때로는 목적지가 되고, 동시대 독립애니메이션의 이슈를 만들어 내며 작가와 관객, 작품과 관객의 교류를 통해 현안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개최된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2는 올해도 어김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여행의 어떤 순간에도 환대의 기지를 비춰 보였다.

 

 


 

영화제에서 각 섹션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함께하는 트레일러는 언제나 보는 이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 

 

험난한 길을 지나 온 어두운 덩어리의 생명체가 정상에 올라 탈피의 과정을 맞이하고, 다양한 색을 띠기 시작하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렇게 저마다 내는 형형색색의 빛깔들이 모여 파스텔 톤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은하수 동산을 이루는 모습을 그려낸 이번 트레일러는 미리내에 대한 상징 그 자체였다.

 

드넓은 은하수를 이루는 수많은 길 중, 이번에 표를 받아 임하게 된 여정은 짧게는 3분, 길게는 25분 내지 분량의 단편들로 구성된 ‘독립보행3’ 섹션이었다. 방문한 날이 본선 심사 진행이 이루어지는 날이어서, 상영관 입장 전에 투표용지를 배부받았다. 이 중에서 한 작품만을 골라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투표용지를 대신해, 이곳에 기꺼이 표를 던지고자 했던 작품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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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석하고 첫 번째로 상영된 작품은 정지혜 감독의 〈The Stranger〉이었다. ‘손이 매일 바뀌는 남자가 다양한 직업을 갖는다’라는 흥미로운 시놉시스는 이번 인디애니페스트의 수많은 섹션 중 ‘독립보행3’을 보기로 결심한 계기였기에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다.

 

작품에서는 매일 아침 사람들에게 손이 배달된다. 배달되는 손에는 사람들에게 하루 동안 할당된 직업에 필요한 버릇, 생각, 지식이 깃들어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손과 배달된 손을 바꿔 끼우면서 배달된 손에 주어진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손으로 하는 반복적인 작업들로 인해 어떤 움직임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감독은 이러한 점으로부터 손에 기억이 있다는 설정을 착안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보자면, 내게는 몇 년 전 그림을 그리는 지인의 “항상 어떤 사고로 손을 못 쓰게 될 경우를 항상 생각한다”던 이야기가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있다. ‘만약 인생의 절반 이상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나의 손’이 없다면, 과연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포함하는 가정이었다. 그렇기에 얼굴이나 표정 대신, 오직 손만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표현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다.

 

이 작품에서는 단지 3분 남짓의 시간 동안 손으로 하는 어떤 특정한 작업들이 단조롭게 나열될 뿐이다. 작가는 작품의 제목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이야기하는 부조리의 철학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어쩌면 그저 허무하게 반복되기에 알 수 없는 하루이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데에 대한 가치를 궁극적으로 다루려 했다”고 언급했는데, 나를 이루는 것의 가치와 상관없이 이어지는 삶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작품이었기에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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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숨 막히는 몰입력을 지닌 김경배 감독의 〈AMEN A MAN〉은 노인이 어릴 적 저지른 ‘작은 새 살해사건’에 대한 재판 과정이 그 배경이다.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에서는 노인이 어릴 적 참여했던 연극 ‘행복한 왕자’에서 제비 역할을 맡은 소년의 모습이 재현된다. 극 중 왕자의 고귀한 희생을 위해 제비는 자신이 치러야 하는 부당한 대우가 억울하지만, 아무도 그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이 제비를 죽였던 것은, 이렇게 재현된 일련의 과정과는 상관없었다는 사실 또한 심판의 말미에 밝혀졌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선행은 억압과 강요로부터 시작된다. 이로 인해 인물의 극단적으로 내몰린 듯한 표정과 헐떡이는 숨, 장면을 오가는 모든 전환이 전부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연출되며 관객마저 몰아붙였다. 강렬한 원색의 색채 속에서는 심판하는 쪽도, 심판당하는 쪽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그 어느 쪽도 모두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

 

〈AMEN A MAN〉은 위선에 대한 모순을 바라보는 심리에 대한 시각화가 매우 뛰어났다. 애니메이션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역동적인 실루엣과 그 모든 것을 잇는 선들이 요동치며 시선을 빼앗았고, 작품에 심어진 비유가 여러 무대와 시간선을 오가며 촘촘하고 능숙하게 엮여 있었다. 가히 인디 애니메이션 축제의 화려한 꽃이라 해도 무방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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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저화질의 영상으로 시작된 박세홍 감독의 〈인형 이야기〉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박 감독과 그의 스톱모션 인형인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요괴의 이야기이다. 단 한 줄로 이루어진 소박한 시놉시스의 〈인형 이야기〉는 어딘가 어설픈 박 감독의 연기가 어우러진 다큐멘터리 형식 속 스톱모션 인형극이다.

 

스톱모션 세트장의 매무새를 다듬던 박 감독이 인형들에게서 눈을 떼자, 오프 더 레코드처럼 경력 몇십 년 차의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같은 처지의 인형 동료들과 술 한 잔씩을 삼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움직임과 멈춤으로 장면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불사르는 연기자이다. 그런 그들이 카메라가 꺼지자 저마다 한 마디씩 푸념을 얹으며 “스톱모션의 시대는 갔어”라며 솔직하게 인정해 버리는 장면은 웃프다는 표현과 꼭 어울렸다.


사랑해서 하는 것일지라도 꾸준히 창작을 하는 일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작품의 세트장인 낡은 초가집부터, 전래동화적 풍경과 옛날 가요, 판소리 창법, 스톱모션 모두 이제는 보기 힘든 옛날의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저물어 가는 것들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놓지 않고 한 땀 한 땀 자신만의 작업으로 이어가는 작업자가 있었다. 예술가의 혼을 친근한 해학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금 희망으로 나아간다.

 

이토록 영화관에서 러닝 타임 내내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인형 이야기〉가 관객 심사단상을 거머쥔 것은 당연한 섭리였다. 극 중 요괴는 언젠간 한국 스톱모션이 빛을 볼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염원을 담아 이야기했는데, 관객들의 진심 어린 호응에서 그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고 느꼈다는 백지민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인상 깊다. 실제로 감독과의 대화에서, 스톱모션을 공부하는 미래의 창작자와 박 감독이 기법에 대한 전문적인 질의응답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주고받았던 뭉클한 순간이 있었다.

 

효율적인 면에서 당연하게 사라져버린 아날로그적 방식을 누군가는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서 박세홍 감독의 〈인형 이야기〉는 ‘창작자들이 만들어 낸 오래된 미래’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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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은 상당히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오늘날의 애니메이션은 보다 다양한 기법과 스타일로 이야기 끊임없이 나아가고, 움직이는 이미지와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에 대한 고민들은 회화,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영역을 확장시킨다.

 

또한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정답이 없는 문제를 향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으며 매번 새롭게 움트고 있다. 더불어 감독들이 온전히 그려내고 싶은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에 더욱 큰 의의가 있는 인디애니페스트이기에, 창작자들의 엔딩 크레딧을 음미하며 매우 기껍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저마다의 빛깔을 오롯이 간직한 다양한 별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모인 축제라면, 앞으로도 좋은 기회의 장이 되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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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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