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도서]

말줄임표 엔딩, 덧없는 사랑에 대한 세 사람의 이야기
글 입력 2022.09.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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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폴에게 사랑에 빠진 한 젊은 남성이 내리는 심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46p.

 

 

25살에 외모도 준수한 시몽은 49살인 폴을 좋아한다. 본인을 '늙은 여자'로 칭하며 그와 거리를 두려 하지만 애인인 로제의 잦은 외도에 지친 폴은 시몽에게 흔들린다. 이 세 명의 이야기는 넘치는 사랑으로 인한 화재의 현장보다는 이미 타고 남은 잿더미와 그쪽으로 불어온 바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열정, 친밀감, 결심/헌신: 시몽, 로제, 폴


 

로버트 스턴버그는 사랑을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형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사랑에는 친밀감, 열정, 결심/헌신 세 가지 요소가 있으며 이들의 균형 상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각 요소들이 세 인물에게 모두 존재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들에게서 각기 다른 하나의 요소가 돋보인다. 아쉽게도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균형적으로 있는 '성숙한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었다. 생각이 깊고 조심스러운 폴에게서도 말이다.

 


시몽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심함과 대담함, 때로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함과 즉흥성의 결함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신비로운 태도와 나직한 어조로 "모르겠어요. "라고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43p.


 

사랑에 대한 열정의 소진과 삶 전체에 대한 허무를 알아챈 것일까. 시몽은 그녀에게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묻는다.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취급하며, 늙어 힘에 부치는 폴에게 시몽은 대담하게 다가간다. 로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젊은이 특유의 패기처럼 느껴진다. 그런 그의 사랑은 열렬하다. 그녀가 밟아온 시간들에 대해 거리낄 것 없이 묻는 태도도 그의 열정 덕일 테다.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시몽, 67p.

 

 

한편 그런 시몽의 모습은 사랑스럽기도 하다. '당당하게 애정을 요구하는 건 그 나이 때만 가능할 것이다.'라고 폴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으로 뒤덮는 것, 그런 열정이 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또 삶의 생생함이 인물로서 자신의 앞에 나타나 사랑의 덧없음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폴에겐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일 것이다.

 

 

 

폴은 복잡하면서도 심플한 인물이다. 로제에 대해, 본인을 외롭게 둔 그를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관계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선뜻 관계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는 무심할 법도 한데 나름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고뇌한다. 로제와의 시간들에 헌신하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오면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된다.

 

 

시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고, 폴 자신은 또다시 고독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게 되니라. 그녀는 자신의 숙명, 이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느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행했다.

 

144p.

 

 

'로제와 함께 하겠다.'라는 결단은 곧 헌신을 의미한다. 삼각형 이론의 요소 중 헌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허한 사랑'을 하는 인물로 가장 흥미롭기도 했다.

 

각성의 엔딩이라는 해설의 말이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녀의 사랑 방식 때문이다. 친밀감마저 잃어가는 사랑, 그리고 방금 태어난 듯 미친 듯이 움트는 열정적 사랑, 그리고 자립. 폴은 복잡하지만 단순하다. 결국은 로제에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폴이 재미있는 사람인 건 자극에 결코 무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시몽이 그녀의 그런 면을 끌어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60p.

 

거울 속에는, 방금 누군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얼굴이 있었다. 118p.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 속에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157p.

 

 

폴은 시몽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사랑한다. 어쩌면 지루한 일상에 균열을 내주었기에 시몽과 어울렸을 수 있다. 아직 꿈틀거리는 본인의 열정을 다시 살려볼 희망을 본 게 아닐까. 소설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니라 읊조리는 듯한 어조인 것을 생각해 보면 멈춰있던 그녀의 삶 또는 사랑에 '재생'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로제

 


"난 자유로운 남자야."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72p.

 

'저 여자가 화가 난 나머지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함께 다닐 만한 길 잃은 개를 한 마리 찾아내 하루 종일 들판을 돌아다닐 텐데.'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려웠던 것이다. 125p.

 

 

자유로운 남자 로제는 친밀감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만큼 로제와 폴은 친밀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한다. 같이 있지 않아도 둘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열정이 식고 일방적인 헌신만 남은 이들의 사랑은 우정에 가깝다.

 

이러한 관계가 계속해 지속된다는 건 두려움 탓이다. 자립과 사랑에 대한 고민은 새로운 사랑을 만날 때마다 드는 고민이다.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누구에게나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로제와 폴에겐 더 이상 새로운 이를 만나 성숙한 사랑을 기대하는 건 무리이다.

 

누군가 박차고 일어나 관계를 끝낼 용기가 없으니 관계는 지속된다. 그것이 폴의 헌신이는 로제의 우애적 사랑이든, 어떻게든 지속되는 이들의 사랑은 사랑의 덧없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말줄임표 엔딩, 덧없는 사랑의 정의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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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교통사고로 인한 의식불명, 마약 중독 등의 쉽지 않은 삶을 누렸던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드러나는 말이다.

 

25살, 이 소설을 쓸 때 그녀는 이미 어떤 삶의 허무를 강하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 마약이나 스피드를 즐기는 성향은 강한 자극으로 그런 공허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마찬가지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랑에서의 허무를 그린 책이다.

 

열정이 다 식어버린 사랑과 사랑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강이 생각하는 사랑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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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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