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다는 물론 잘 있겠지요 [도서/문학]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7)
글 입력 2022.09.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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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눈에 보인다. 숫자는 빠르게 깎여나간다. 채워놓은 것이 적고, 채워질 구석은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요즘은 먹고, 자고, 아주 조금만 움직인다. 벌써 꽤 오랫동안, 끝을 정하지 않고, 이런 시간을 보낸다.

 

불안감은 거의 매일 찾아온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쉼.’ 휴식은 휴식일 뿐이고, 휴식은 휴식이어야 할 테지만, 그런 휴식은 없다. 그래서 오늘 내가 보내는 시간은 불안한 휴식기. 휴식이라는 말 앞에 무언가 덧붙이는 순간 휴식이 아니게 되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하기로 한다.


텀블러와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 8층에 마련된 공공 도서관에 자리를 잡는다. 넓게 트인 창문 밖을 본다. 비가 조금 흩뿌리고 흐린 하늘 아래 작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참 조용한 동네, 드물게 보이는 움직임들을 좇다가 그만두고 노트북을 펼친다.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다지 빽빽하지 않은 책장들 사이를 서성이고, 헤집고, 조용히 누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시집을 찾는다.


자리에 돌아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작고 얇은 시집을 펼친다.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읽는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거짓이

세상을 덮어버릴까 두려워서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파먹다가 안쓰럽게 부스러기가 되었습니다

 

 

시인은(일단은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라 믿기로 한다. 멋지게 사는 듯 보이는 시인의 지질한 고백은 어쩐지 나를 위로하므로.) 연인과의 끝을 앞두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조금 원망하고(“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거짓”), 자기 자신마저 탓하게 된다(“서로 오래 물들어 있었던 탓이겠지요”). 그들의 사랑은 한낱 “부스러기”가 되고 말 테다.


물론 시인에게도 이별은 “엄청난 일”이므로, 그는 정직한 방식으로 그 통증을 견뎌보려 한다. 여행 산문집을 여러 권 출간했을 정도로 삶이 여행 그 자체인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역시나 떠나는 일. 시인은 “냄새를 따라”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어쭙잖은 방식으로는 슬픔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기어이 “사라지기”를 선택했을 테다.


 

광채는 사그라들고 공기는 줄어들고 나는 마비되었습니다

이별의 원심력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사라지기 위해 아이슬란드 폭포에 와 있습니다

 

- 이병률, 「이별의 원심력」 중에서

 


사랑이 내부에서 마음 안쪽을 향해 당기는 힘(구심력)이듯, 시인에게는 이별도 내부에서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원심력)이다. 외부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 일, “혼자만이 혼자만큼” 떠나고 잊어야 하는 일. 사랑도 이별도 오로지 나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힘이라고, 시인은 믿는다.

 

그래서 홀로 읊조리듯 이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을 테다. “폭포”도, “바다”도, 모두 잘 있겠지만 본인은 그렇지 못할 거라고. 그렇지만 당신도 나도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인은 결국 이별에 성공할 테지만, 그의 이번 성공은 유독 아프게 다가온다.


분명 어떤 바다를 상상하며 시집을 펼쳤다. 하얗고 파란 여름의 바다. 끈적한 습기로 버무려졌다가 이따금 선선한 바람으로 씻어내는 그런 바다. 불안이 없는 바다, 자유로운 바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었던 바다와 시인이 그려낸 바다는 질감도 색감도 달랐다. 그저 언제나 ‘잘 있다’는 간편한 말로 안부를 전할 것 같은 널찍한 바다의 이미지를 언뜻 공유했을 뿐이었다.


시집을 조금 더 뒤적이는데 분명 누군가 책갈피로 사용했을 명함이 남아있었다. 식품유통 업체에서 일하던 그가 기대하며 펼쳤을 바다가 나의 바다인지, 시인의 바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명함이 시집의 중간 즈음에 꽂혀있었으므로, 그가 시집의 끝까지 도달하지 않고서도 자신만의 바다를 찾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바다에 대한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났지만 어쩐지 기분은 상쾌했기에, 여름이 완전히 가기 전, 다시 한 번 바다를 찾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에서 전해 듣는 안부라면 그걸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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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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