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대가 하나라는 법은 없잖아 -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바퀴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사진가
글 입력 2022.08.2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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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학교에서 축제 일을 돕다가, 갑작스럽게 음향 감독님 옆에서 보조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이런 효과음은 이때 들어가야 한다”라는 선배님의 말에 태연한 척 답하면서도, 실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건 이미 표정에 다 드러났을 거다.

 

물론 내가 기계를 직접 만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면 적절하게 융통성도 발휘해야 했기에 적잖이 부담되었다. 그런데 내 부담을 감독님은 역시 전문가답게 손쉽게 덜어주셨다.


아, 이때는 이 음악을 넣으면 되겠네요.


나의 어설픈 설명에도 아니, 말씀드리기도 전에 미리 알고 계시는 분께 나는 구태여 길게 전달할 필요도 없었다.


초대된 연예인을 가까이에서도 보고 싶었지만, 그날 무대 뒤 감독님과 팀원분들의 노고가 더 멋있어서 연예인을 멀리서 보아도 아쉬운 것이 없었다. 모든 과정이 잘 돌아가도록 빛이 비추어지지 않아도, 묵묵히 역할을 해내시는 그 모습 자체가 내겐 이미 또 다른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빛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대는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공연장의 무대처럼 이 사회의 무대도 각자 보기 마련이었다. 이는 카메라를 들어 숨겨진 무대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켰던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5.뉴욕공공도서관, 1954년경.jpg

뉴욕공공도서관, 1954년 경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그의 작품들은 뉴욕과 시카고, 캐나다 등을 배경으로, 행인들의 일상 모습을 담는다. 그들은 영화의 스틸컷처럼 생동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흑백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인물들의 표정과 인상은 자연스럽고 다양하다.

 

위는 뉴욕 공공도서관 앞에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보는 한 여성의 모습이다. 그의 시선은 정직하게 옆을 향해 있어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까? 아니면 그저 길을 건너면서 주위를 둘러봤을 뿐일 수도 있다. 어떤 서사를 입히든 영화 한 장면 뚝딱이다.


눈 오는 날 창밖에서 보이는 아이들도 영화 포스터 같다. 빈티지한 창문 너머로 신나게 노느라 이미 저만치는 떨어져 있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은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비비안은 무대의 주인공을 특정 인물로 확정하지 않는다. 여러 각도로 다양한 사람들과 그 안에 숨겨진 인생의 순간들을 영원처럼 붙잡아 기록한다.


그저 일상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인데도, 비비안의 기록이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카메라의 시선엔 찍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데에는 애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필자의 아버지가 쓰시던 옛 카메라를 봐도 애정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그곳엔 수백 장의 어린 내가 담겨 있다. 그 기록들을 보면 낯간지러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 주인공처럼, 뜬금없이 엉엉 울면서 밥을 먹고 있거나, 나무 위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깔깔깔 신나게 웃고 있다.

 

처음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던 날, 자전거를 처음 배운 날, 담요 안에서 두 볼이 벌게지도록 동생과 장난치던 개구쟁이의 지난날의 내가 담겨 있다. 나는 그 기록들을 갓 지은 밥처럼 모락모락, 새록새록 떠올린다.


그래서 아버지의 카메라 속엔 나는 굉장히 웃음 많고 울기도 잘하는 철부지 꼬맹이로 등장한다. 역시 사랑이 들어간 카메라엔 일상적인 평범한 순간도 영화처럼 보일 만큼 특별하게 기록되는 법이다. 비비안은 냉정한 표정으로 등장하곤 했지만, 다정한 시각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창틀에 비친 빛의 각기 다른 그림자마저 유심히 담아내는 그의 사진엔, 감출 수 없는 따뜻함이 녹아 있다.

 


7.캐나다, 1955년.jpg

캐나다, 1955년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글쎄요, 나는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인생은 바퀴와 같습니다. 한번 올라서면 끝까지 가야 해요. 그리고 끝에 다다랐을 땐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합니다.] - 비비안 마이어


그의 말처럼, 그는 어디든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곳, 언제이든지 상관없이 이곳저곳을 기록하는 사진가였으니까. 그리고 그 바퀴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았다. 특정 계층만을 위하지도 않았고,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한 그는 타인들의 삶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진정한 사진가였다.



6.시카고, 1960년.jpg

시카고, 1960년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작가 자신을 포함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 모든 무대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의 사진은 시대를 관통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 전시장 월텍스트 참고


 

심은혜.jpg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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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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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두
    • 에디터님의 글은 여전히 깔끔하네요! 낯부끄러운 비유일지 모르나 비비안의 사진처럼 에디터님이 저를 찍어준 흑백 필름 사진을 전달받았을 때, 왜인지 모르지만 '나를 찍은 사진을 받았다' 는 감정 이상의 기쁨이 들었어요.

      아마도 제가 아름다운 피사체는 아닐지라도, 애정이 담긴 사진과 그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에디터님의 마음이 녹아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좀 더 길게 서술해보자면 필름카메라의 사진인화를 기다리고 개인에게 전송하는 귀찮음이 저에겐 어쩌면 애정처럼 느껴지기도 해서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주세요. 좋은 글 감사해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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