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아버지의 언어를 부수러 왔다 - 뮤지컬 '실비아, 살다'

글 입력 2022.07.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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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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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전하고 지겨운 그 이야기


 

한 틱톡커가 올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흑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길거리 행인에게 무작위로 손을 내민다. 남성들은 모두 흔쾌히 악수를 해주지만 여성들은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거나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나칠 뿐이다.


이 영상이 화제가 되자 누군가 여성이 남성보다 인종차별적이라는 의견을 냈고, 여기에 많은 여성이 반박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쏟아져 나온 의견은 공통된 몇 가지로 요약되었다. 이 영상은 여성들이 인종차별주의자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길거리에서 얼마나 다른 경험을 해왔는지를 증명한다고. 낯선 남자가 손을 내미는 순간, 여성은 반사적으로 그다음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한 일과, 그 위험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떠올린다고.


국적과 인종을 막론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공감할 사람이 많다는 것에 위안을 얻어야 하는 건지 슬픔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사진 (1).JPG

 

 

70여 년 전에 살았던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본 세상도 틱톡커의 영상 속 여성들의 세상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무 데서나 자고, 온갖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어린 여성이기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기로 쓰며 분노했다. 실비아는 재능도 야망도 넘치는 시인이었지만 우리에겐 서른 살의 나이에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좀 더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실비아, 살다>는 ‘실비아 플라스가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마지막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뮤지컬이다. 실비아의 대학 시절부터 세 번째 자살 시도까지의 시간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살았던 시대도 국가도 다른 이 여성 시인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를 정도로 여전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에 우리는 위안을 얻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

 

 

 

아버지의 언어라는 벨 자 아래에서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사진 (5).JPG

 

 

뮤지컬에서 보여지는 실비아 플라스는 시종일관 자의식 강하고 욕심과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비아를 실비아로 만드는 특성이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원인이다. 그가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남편 테드 휴즈의 옆자리에서 ‘시를 좀 아는 아내’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당대 많은 여성이 그러했듯이 적당히 교양 있는 아내이자 어머니로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러나 실비아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실비아를 절망시키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이나 입에 담기 힘든 폭언 같은 게 아니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수많은 사소한 말과 미묘한 행동이 서서히 그를 잠식한다. 여성의 시답지 않다는 평을 듣는 일, 남편을 천재 시인이라 치켜세우는 이들에게 “실비아도 결혼은 했지만 짬을 내어 시를 써보세요” 따위의 말을 듣는 일.

 

남편인 테드는 결혼 전 실비아의 시가 다른 시들과는 다름을 알아봤으며, 결혼 후에도 시 쓰는 일을 응원한다. 하지만 실제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매번 실비아 차지다. 테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예술가'로서 일할 때, 그 일이 문제 없이 돌아가게끔 물밑에서 돕는 것도 실비아다. 이를 테면 단순 타이핑을 치고 제대로 된 커피를 내리고 실제 생활비를 버는 일 등 명명하기도 어려운 세세한 일들은 모두 실비아 몫이다.


실비아가 겪는 촘촘한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는 ‘아버지’이다. 실비아가 처음 시를 써 갔던 날 아버지는 기뻐하는 한편 자신의 사전을 건네며 앞으로는 이걸 보고 시를 쓰라고 말한다. 나중에는 남편 테드도 같은 사전을 들고 훈수를 둔다. 다른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여성 시인의 시답지 않다, 시가 아름답지 않다는 평을 들으며 실비아는 신경증에 걸려 점점 지치고 쇠약해진다. 테드가 남성, 남편, 아버지에 앞서 ‘시인 테드 휴즈’로 불리듯, 실비아는 여성, 아내, 어머니 이전에 시인 실비아 플라스로 세상에 서고 싶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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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가 처한 현실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 제목인 ‘벨 자’, 즉 종 모양의 유리 덮개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실제로 실비아가 죽기 몇 주 전 발표했던 이 소설에는 뛰어난 능력이 있지만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에 괴로워하는 여성 에스더가 등장한다. 벨 자 아래에 있는 괴로움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오는 게 아니다. 뭘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분명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유리에 막혀 닿을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새로운 시를 쓰자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사진 (8).JPG

 

 

현실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벨 자 바깥으로 탈출할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지만, 뮤지컬에서는 벨 자 바깥에서 계속해서 노크를 건네는 존재가 있다. 바로 빅토리아다. 빅토리아는 뮤지컬의 시작부터 끝까지 실비아를 따라다닌다. 실비아의 삶 속 중요한 순간마다 얘기를 들어주고 얼토당토않은 다른 이들의 말에 “뭔 개소리냐” 하고 함께 욕해준다. 실비아가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할 때 빅토리아는 그를 설득해 살리는 데 성공한다.


실비아 플라스를 아는 관객이라면 처음부터 빅토리아의 정체를 눈치챘을 것이다. 빅토리아 루카스는 실비아 플라스의 필명이기 대문이다. 실제로 실비아는 이 필명으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벨 자』를 출판했다. 그러므로 <실비아, 살다>는 결국 실비아 플라스가 자기 스스로를 구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미래의 자기 자신인 빅토리아만이 실비아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실비아가 현재의 자기 자신을 구하는 장면이 있다. ‘아빠, 이 개자식’이라는 넘버가 나오는 장면으로,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아빠, 나는 당신을 죽여야 했지”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넘버의 가사는 실제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Daddy)」의 일부를 가져왔다. 남편의 외도에 분노한 실비아는 이 넘버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기성의 언어에 타협해오던 모습을 집어치우고, 미친 듯이 자기 자신의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일시적이었지만 실비아는 해방감을 느낀다. 그렇게 완성된 시는 아버지나 남편이 준 사전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로 쓴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시, 야만적인 시, 아름다움을 위반하는 시, 그러므로 스스로를 구원할 시이다.

 

뮤지컬 속 실비아와 현실 속 실비아의 결말은 달랐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살아남은 실비아가 다른 소녀들을 위해 계속 글을 썼던 것처럼, 현실에서는 실비아 대신 그가 쓴 글들이 살아남아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실비아는 비슷한 결말을 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구원한 실비아의 글은 시대를 건너뛰고 무대를 넘어간다. 그가 쓴 글은 오늘도 벨 자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노크를 하고 있다. 극중 빅토리아가 실비아에게 그러했듯이.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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