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죠팽'의 시간 - 조재혁 리사이틀 '쇼팽'

글 입력 2022.06.1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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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피아노는 동반자 같은 존재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곡을 통해 어머니는 태교를 했고,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우리 집에서는 끊임없이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 나왔기 때문에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동요, 연주곡 가리지 않고 말이다. 유치원에서 음악시간이 있었던 날이면, 집에 돌아와 그 날 배웠던 멜로디언을 동생과 엄마 앞에서 연주하며 자랑을 늘어놓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연주한 음악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기쁨을 그 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을 2달 앞두었을 때였다. 그 때부터 나의 피아노 사랑은 시작되었다.

 

중학교 2학년 올라가기 전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으니까 돌이켜보면 꽤 오랜 시간 피아노를 배웠다. 참 열심히 배웠다. 그 결과 콩쿨 대회에서 입상까지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정형적인 음악보다는 나의 해석이 중요한, 그리고 조금 더 감성적인 음악들을 연주하고 싶어했다. 모차르트, 쇼팽, 슈베르트 모음곡을 연주할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한 음 한 음 악보에 맞춰서 연주하지만, 어떤 감정을 실어 터치를 하느냐에 따라 같은 곡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그 여지가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잠깐 꾸었지만, "너보다 잘 치는 애들은 많고, 피아니스트를 할 만큼은 안 되는 것 같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음악은 그만 두고 다른 걸 했었다.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냥 음악은 취미 정도로만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되면서 연주를 거의 안하게 되었다. 이제는 감각도 무뎌지고, 악보를 보는데도 한참 걸린다. 그래서 나의 못다 이룬 욕망을 음악 감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몇 해 전, 어렸을 때 왜 그렇게 음악을 틀어 놓았냐고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동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때부터 내가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엄마가 생각하던대로 잘 자랐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아주 사랑하는 어른이 되었다. 음악을 빼놓고서는 나의 인생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요즘 나의 평일은 그저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일상, 혹은 일하고 글을 쓰고 집에 돌아와 자기 바쁜 하루의 반복이다. 그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약속이나 공연이 있는 날은 그 날 전체가 비일상적인 하루가 되고는 한다.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날 하루를 살아갈 힘이 배가 된다.

 

조재혁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는 날도 그랬다. 아침부터 그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설렘을 가득 안고 피곤함을 이겨가며 일을 했다. 사실 공연 끝나고 귀가하는 것도 서울을 가로질러야 했기에 무지 지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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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퇴근 후, 곧장 잠실로 달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공연장 근처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분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바삐 움직이다 보니, 잠실역에 한참이나 일찍 도착 했다. 공연 시작 시간은 저녁 8시였지만 왜인지 저녁은 먹고 싶지가 않았다. 좀 더 집중이 잘되는 상태에서 공연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 전까지 모든 감정과 일상을 비워내기 위해 산책을 했다. 석촌호숫가를 돌기에는 그만한 체력이 없었기 때문에 건물 주위를 빙글 빙글 돌면서 생각을 덜어냈다. 날씨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잔디밭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게 상쾌해졌다. 공연 시작 30분 전이 되어서야 건물로 입성했다. 요즘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가고 싶지가 않다. 기를 모조리 빼앗기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공연 직전에 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원체 연주회나 뮤지컬을 볼 때 몰입을 심하게 하는 편이기도 해서, 에너지 비축을 하고자 그랬던 것도 있다.

 

공연 시작 15분 전에야 티켓 부스로 향해, 표를 받고 입장을 기다렸다. 로비는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사실 이번 연주회에 가기 전까지는 해당 피아니스트를 잘 알지 못했다. 꽂힌 연주곡만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새로운 피아니스트에는 도전을 잘 안했던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튜브를 통해서만 연주를 즐기고, 공연장에 가서는 피아노 독주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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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혁 피아니스트는... 

 

"감성과 지성을 겸비하고 흠잡을 때 없는 테크닉과 구성력, 뛰어난 통찰력과 과장 없는 섬세함으로 완성도의 극치를 추구하는 매력적인 연주자"로 평을 받으며 다양한 형태의 연주로 연 중 60회 이상 무대로 오르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연주가이다. 강원도 춘천 태생인 그는 만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황숙중, 김혜자, 조영방을 사사하고 서울예고를 입학하여 1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뉴욕 맨하탄 음악대학 프리칼리지를 거쳐 줄리어드 스쿨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하는 동안 솔로몬 미코프스키 하버트 스테신, 제롬 로웬탈을 사사하였고, 이어 맨하탄 음악대학에서 스베틀라노바를 사사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설명만으로도 대단한 피아니스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쇼팽의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도 무척 흥분되는데, 이렇게나 실력 좋은 피아니스트의 손에서 재탄생된 발라드와 소나타를 라이브로 들을 기회가 생긴 것은 정말 값진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은 쇼팽의 발라드로 시작해서 소나타로 끝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발라드는 중세시대부터 있던 음악장르로 14~15세기 유럽에서 영웅담 등을 담은 성악곡을 의미했는데, 쇼팽에 의해 기악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소나타는 기악을 위한 독주곡 또는 실내악으로 2악장 이상으로 이루어진 곡을 뜻한다.

 

먼저 첫 곡인, 발라드 no.1 in G minor, Op.23은 쇼팽이 슈톡하우젠 남작에게 헌정한 곡이라고 알려져있으며 쇼팽의 발라드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성악곡에 한정되어 있던 발라드라는 장르를 피아노 곡으로의 장르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곡이기도 하다. 당대의 낭만주의가 잘 드러나는 곡이며, 화려한 테크닉과 패시지로 전개되는 곡이다. 도입부의 서정적이면서도 아련한 멜로디,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클라이막스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곡이다. 또한 한 음 한 음 감정을 넣어, 느낌을 살리는 것도 어렵지만 워낙 화성도 풍부하고 마지막에는 많은 힘을 요구하는 곡이기도 하다. 곡의 디테일한 해석은 피아니스트의 자유이니 연주자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른데, 그의 발라드 1번은 깔끔하고 정교하면서도 강약이 살아있어서 생동적이었다. 나 또한 쇼팽의 곡 중 해당 곡을 가장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들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 초집중하며 들었다. 사실 첫번째 연주를 들으면서 음향의 문제였던 건지 소리가 하나하나 살아있지 않고 살짝 먹먹한 느낌이 있어서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있는 관객석까지 그의 열정적인 연주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내가 느끼는 그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두 번째 발라드는 슈만에게 선사한 곡으로, 섬세하고 조용한 바장조주제와 우울하고 전투적인 가단조의 대립이 극명한 작품이다. 상반된 분위기는 마치 지킬앤하이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초반부의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있으면 마치 시골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듯한 착각을 부른다. 이렇듯 목가적인 느낌은 안정감을 준다. 그러다 분위기가 전환되면서부터는 강렬하다 못해 충격적인 소리의 향연이 이어지는데, 그 때부터 몰입도는 배가 된다. 숨을 죽이고 그의 터치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었다. 듣는 나도 이렇게나 힘이 드는데, 연주자는 몇 만배의 힘을 쏟고 있을 지를 상상하니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한 이렇게 긴 곡을 한 호흡으로 소화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대단했다. '악보 그대로를 재연하되, 연주자 자신의 색을 꽉꽉 집어 넣은 공연을 나더러 해야 한다고 했으면 저렇게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의 발라드 연주도 설명할 것 없이 좋았다. 섬세하면서도 명확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요근래 이렇게 좋은 연주곡을 온전히 듣기만 한 적이 없었는데, 그의 연주로 인해 나를 쫓아오는 것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중간에 잠깐의 인터미션을 갖고 소나타 No.3 in b minor, Op.58을 감상했다.

 

작품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분 가량의 곡이었다.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사실 걱정을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초집중상태로 즐길 수 있었다. 물결 치듯 흐르는 멜로디에 절로 눈을 감고 듣게 되었다. 예전에 학원에서 배우던 고전적 소나타와는 또 다른 매력의 소나타였다. 낭만이 가득한 멜로디과 기교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악장의 전개가 드라마틱해서 듣는 재미가 남달랐다.

 

그렇게 준비한 곡을 모두 선보인 조재혁 피아니스트에게 관객들은 약속한 듯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마무리되는 건가 싶은 찰나에 다시 무대로 나와 무려 앵콜곡을 3곡이나 선보였다.

 

즉흥환상곡, 녹턴, 마지막 한 곡은 정확히 어떤 곡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상당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첫 앵콜곡으로 나온 녹턴을 듣자마자 그간 받았던 업무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음 하나하나로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섬세하게 연주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그 마음이 전해졌던 것일테다. 이후의 두 곡도 매우 인상 깊게 들었다. 앞서 연주를 꽤 오랜 시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마지막까지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조재혁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을 복기하기 위해 유튜브를 찾아보다, kbs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서 대화하며 연주하는 영상을 발견했다. 클래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진 않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영상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해서 아주 흥미롭게 시청할 수 있었다.

 

그는 쇼팽의 발라드 음악을 잘 들어보면 멜로디가 모두, 이탈리아의 오페라 아리아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 음 한 음 연주해보이며 설명해주니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정말 피아노가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알고 듣는 것과 모르고 듣는 것의 차이가 이런 걸까 싶었다.

 

또한 해당 영상에서 곡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도 설명해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발라드 2번에 대한 이야기였다. 쇼팽이 슈만에게 헌정한 곡이라고 알려져있는 2번은 곡 안에서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는데, 사실 슈만의 조울증을 표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이런 내용들을 함께 설명해주었더라면 조금 더 재밌게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또 이렇게 다시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 클래식의 매력 그리고 연주자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긱이 들었다.

 

이번 공연으로 그간 지쳐있던 심신을 위로받고 왔다. 남은 삶의 여정에도 클래식이 내 곁에 있는 한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조재혁 피아니스트의 연주 스타일에도 많은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해석적 시각이 협소하다는 것을 느꼈다. 늘 같은 연주자의 영상만 찾아보니 모든 기준이 그에게 맞춰져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 깨어있는 시각으로 예술을 즐기고자 다짐하며, 오늘도 쇼팽의 발라드와 함께 아침을 맞이해본다.

 

 

[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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