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비트로 찍은 성장 드라마 - 판다곰 정규 2집 'Vertigo'

빨리 들어주세요, 현기증나니까.
글 입력 2022.06.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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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드라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장 드라마란 "성장기에 경험하는 일과 감정 따위를 통해 아이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출처 우리말샘를 의미하는데, 2003년부터 KBS에서 방영했던 <반올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아역 배우가 대거 등장하고 교훈적인 주제를 좇는 성장 드라마들에는 "내용이 오글거린다"는 평가가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같은 이유로 성장 드라마를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2022년 6월 2일,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음악 앨범' 한 장이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드라마도 아니고 웬 음악 앨범? 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 에피소드가 하나의 드라마를 이루는 것처럼, 각 트랙이 모여 앨범 전체가 하나의 성장 서사를 완성한 사례가 있다.

 

지금부터 세상에서 가장 힙한 성장 드라마 한 장 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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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tigo

- 판다곰 정규 2집 -

 

장르

힙합, R&B

 

발매일

2022. 06. 02.

 

참여 아티스트

김아일, 그냥노창, 릴러말즈,

빈첸, 오이글리, 키드밀리, 한국사람

 

제작

BAMBOO STUDIO

 

유통

NHN벅스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프로듀서로서 느꼈던

'Vertigo현기증를 담았다.


- 프로듀서 판다곰 인터뷰 中

 

 

6월 22일 발매된 힙합 프로듀서 판다곰의 정규2집 제목 'Vertigo'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한국어로 소리 내어 발음하면 '버티고'라는 의미를, 사전적으로는 '현기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판다곰은 이 모든 의미들을 압축한 서사를 총 11개 트랙에 걸쳐 풀어낸다.

 

힙합 프로듀서의 앨범이니 여자 자랑이나 돈 자랑만 가득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 부디 필자를 믿고 안심하길 바란다. 보장하건대 이 아티스트의 음악만큼은 세간의 '힙합'과 다르다. 'Vertigo'는 차라리 한 편의 소설에 가깝다. 아티스트가 혼란스러운 무의식을 뚫고 자신의 '멋'에 다가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힙합이 처음이라면, 우선 판다곰의 'Vertigo' 앨범 전곡 재생을 누르고 오라. 11개 트랙을 따라 이어지는 화자, 즉 아티스트의 성장 서사를 필자와 함께 좇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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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 Black Swan


첫 번째 트랙은 래퍼의 목소리 없이 프로듀서의 비트로만 이루어진 비트 트랙(beat track)이다. 트랙의 제목 'Black Swan'은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자아를 죽여버린 무용수의 이야기가 담긴 동명의 영화에서 따온 것인데, '멋'에 집착하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의식 속 다른 자아에 접속하는 어린 화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 트랙은 마치 동굴 속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찢어지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때 잡음처럼 들리는 소리들은 평범한 악기 소리들을 인위적으로 늘이고 중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아티스트는 평범한 것들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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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2. 21g

 

사람이 죽으면 몸무게에서 21g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고작 약 한봉지의 무게에 불과한 21g이 우리 영혼의 무게인 셈이다. 두 번째 트랙에는 이 '영혼'을 잃은 채 의미 없는 가사를 반복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트랙의 화자가 '멋'을 좇다 자신을 잃었다면, 두 번째 트랙의 화자는 '멋'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의미 없는 허세를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실체없는 '멋'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가사 속 '하얀 먼지'다. 그리고 화자는 계속 실체조차 없는 아 하얀 먼지 속으로 뛰어들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 '먼지'에 대한 사유는 다음 트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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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3. dust


세 번째 트랙에 등장하는 실체 없는 멋, 즉 먼지같은 멋에 중독된 화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피처링으로 참여한 두 래퍼 김아일, 오이글리의 목소리가 '뭔가에 취한 채' 깊은 생각과 얕은 생각을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화자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경력을 반영해 베테랑 래퍼 김아일의 목소리는 깊은 생각을, 떠오르는 루키 오이글리의 목소리는 얕고 가벼운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다. 뭉툭하게 울려퍼지는 악기들이 비트에 몽롱한 분위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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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4. TITANE


네 번째 트랙에 이르러 화자는 무언가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잠시 벗어난다. 그리고 "I seek beyond borders, I see beyond talk"라고 말하면서 경계 너머, 언어 너머의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규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이전까지의 트랙들과 다른 점이다. 이 트랙을 기점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것만을 좇던 화자는 잠시 멈추어 내면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결과 'TITANE' 에서는 처음으로 화자가 생각하는 '멋'의 정의가 내려진다. 아티스트 판다곰은 해당 트랙에서 의도적으로 정확한 코드 구성과 박자감을 제거했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 '멋'이란 곧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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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5. YAHE

 

멋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확립한 후, 화자는 "가야 해"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다섯 번째 트랙의 제목 'YAHE'는 "가야 해"의 마지막 두 글자를 영어로 쓴 것이다. 빈첸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이 트랙은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YAHE'는 Vertigo 앨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기차고 밝은 곡이자 꿈꾸는 듯한 분위기의 곡이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별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에 대해 아티스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교를 사용해 곡을 풍성하게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린 절대로 살아가야 해"라는 묘한 가사와 어딘가 음울한 빈첸의 목소리는 화자의 내면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준다. 화자는 한 번 내면과 대화를 나눈 이상, 멋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무 방향으로나 헤메던 시절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앎의 무게'를 느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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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말로 벌(skit)

 

여섯 번째 트랙은 다소 특이하다. 'skit'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목소리가 등장한다.힙합에서 일반적으로 'skit'은 구분선 역할을 하는 트랙으로서, 노래나 랩이 담기지 않고 일상적인 대화나 소음이 담겨 있는 트랙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톤을 바꿔 가며 같은 가사를 반복하는 '돌림노래'를 부른다.

 

아티스트는 '한국말로 벌(skit)'에서 회의감에 찬 채 거울을 보며 말을 거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 트랙의 화자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제자리로 돌려 놓을 때가 된 거지"라고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인다. 멋이 무엇인지 알았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내면이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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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7. 어지러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몰랐다." 일곱 번째 트랙에는 이러한 화자의 어지러운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화자에게 가장 절망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피처링으로 참여한 키드밀리의 가사가 이러한 화자의 심정을 대변한다. 화자는 "결국 손에 남아있던 건 뭘까", "넌 몰라 아무것도"라고 말하며 자조한다.

 


Track 8. Kill Your Darlings


이로써 화자는 결국 일곱 트랙 내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일곱 번째 트랙에 뒤이은 여덟 번째 트랙은 무엇이 멋인지도 모른 채 으스대던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는 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목 'Kill Your Darlings'는 동명의 영화를 오마주한 것이자, 과거의 자신을 차라리 죽여 없애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느와르 영화처럼 강렬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인 여덟 번째 트랙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나아가는 화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백그라운드 곳곳에 불안감을 가중시킬 만한 효과음들이 들어가 있다. 심오한 느낌을 주는 베이스와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 치직거리는 잡음 등은 듣는 이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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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9. Failan


아홉 번째 트랙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곡 중 하나였다. 'Failan'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故김광석의 곡을 샘플링할 수 있는 프로듀서인 판다곰이 샘플링을 적용했다고 알려진 두 개의 트랙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Failan에는 故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샘플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의외로 김광석의 색채는 묻어나지 않는다. 판다곰은 '또 하루 멀어져간다'는 김광석의 읊조림을 백그라운드에 활용하되, 원곡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 리프, 하모니카 등의 요소들을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편곡하여 사용해 신선한 느낌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

 

흡사 옛날 느와르 영화를 연상토록하는 아홉 번째 트랙에서 화자는 서른 즈음의 형들에게 절규하고 있다. 故김광석의 목소리와 래퍼 그냥노창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나누는 대화 같기도 한 이 트랙은 결국 나이가 아무리 들고 경험이 풍부해져도 인간이 완전해질 수는 없음을 알려줌으로써 절규하는 화자에게 위로를 건넨다.

 

또한 어쿠스틱 악기들로 채워진 이 트랙은 화려한 것만이 멋이라고 여기던 어린 날의 생각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하고 담백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된, 화자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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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0. Wonderful


열 번째 트랙 'Wonderful' 역시 샘플링이 사용된 곡이다. 이 트랙에는 故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샘플링으로 등장하는데, 아홉 번째 트랙과 마찬가지로 김광석의 색채는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Wonderful'에 이르러 화자는 드디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종종 화자는 "아무도 없다"고 느껴왔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무엇인지도 모를 '멋'을 좇기 시작한 것이다. 멋진 것은 누구나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화자는 이 사실을 "인정 뒤 앞으로" 향하고자 한다. 아티스트가 수많은 김광석의 명곡들 중에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샘플링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화자는 열 번째 트랙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같이 혼란스럽고 힘든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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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1. Last Dance

 

마지막 트랙인 열한 번째 트랙은 첫 트랙과 같은 비트 트랙이다. 아티스트가 외국의 고등학교 무도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 트랙에는 '모두 함께 다음 단계로 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덧붙여 'Last Dance'는 풍성하고 따뜻한 밴드 사운드가 주를 이루어 마치 영화가 끝난 후 크레딧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판다곰은 마지막 트랙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제 음악적 성장에 함께 해준 모두를 위한 애프터 파티를 이 트랙에서나마 열고 싶었어요."

 

**

 

요컨대 프로듀서 판다곰의 정규 2집 'Vertigo'는 '비트로 찍은 성장 드라마'다. 보통의 성장 드라마와 달리 오글거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힙'하지만, 소설 못지않은 탄탄한 서사와 현기증 날 정도로 치열한 고뇌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Vertigo'의 화자가 11트랙 내내 갈구하고 있는 '멋'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꿈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는 점은 똑같다. 인간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닿을 듯 말 듯한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어지러워할 수밖에 없다. 판다곰의 'Vertigo'는 사랑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도 현기증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위 내용은 아티스트와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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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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