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이라는 이야기 - 시네마 천국 [영화]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글 입력 2022.05.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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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영화관을 찾는 것일까? 영화 ‘시네마 천국’은 계속해서 내게 이 질문을 던진다. 아직 TV가 없던 시절, 극 안의 사람들은 하루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영화관을 찾았고, 그 안에서 울고 웃는다. 천진무구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희로애락이 이 안에 다 있었다. 모두 즐거워했고 가끔 분노했으며, 어떤 남녀는 눈이 맞아 가정을 꾸리곤 마침내 자식의 손을 잡고서, 그때까지도 극장을 찾았다.


시네마 파라디소, 이 극장의 이름을 영화가 있는 낙원이라고 불러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낙원을 찾아온 것이었을까? 극장 안에는 무엇이 있었나. 커다란 화면과 사람들과 오물로 범벅이 된 좌석과 흑백의 활동사진, 그리고 이야기, 이야기가 있었다. 빈 바람이 불면 너무도 쓸쓸해지는, 그 마을에는 어떤 실없는 이야기나마 있었을거나.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끼리 모여, 이따금 누군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와-하고 웃어보는 것을 제하곤 무슨 새로움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극장을 찾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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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이고 세계이며, 새로움이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을 주제로 하는 시작과 완결이 있는 작은 세계이고, 늘 새로움이다. 끊임없이 꿈꾸고 탐험하며,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놀라움을 좇아야만 살아내는 우리 존재는 그러므로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세상은 너무 넓고 시간은 한정적이었으며, 운신의 폭은 언제나 좁기만 했기에…

 

그렇다면 이제, 이 명제를 바꾸어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주제로 하는 시작과 완결이 있는 세계라면, 누군가의 살아낸 인생은 그 자체로 모두, 이야기로 치환되는 것이기도 하노라고. 그것이 필멸자인 우리가 아름다이 기억될 수 있는 까닭이고, 유한한 존재의 서사가 다시 이야기되어, 영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 별 새로울 것 없는 말이지만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모두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삶이 다른 이에게 닿았을 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상기되었을 때조차도 삶이란, 시간의 검은 테이프를 따라 이어져 있는 장면 장면들, 망각의 검은 테두리로 분절되어 있는 활동사진의 필름처럼 가끔 느껴진다. 이제 영화 바깥으로 나와 이 이야기, '시네마 천국'을 바라본다.

 

잘 된 이야기는 모두 관객의 마음속에 카르페디엠을 떠올림을 느낀다. 아직 닿지 못한 내 시간의 끝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곤 다시 순간인 현재로 돌아와, 되돌아보게 하고 다시 보게 만드는 힘, 내가 잘 된 이야기에서 느끼는 높은 행복은 이것이다. 인생의 활동사진을 이루는 무수한 컷, 개중 하나를 위하여,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그 순간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느껴야만 한다. 이것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참 행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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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이야기 속에 긴장이나 서스펜스, 혹은 존재를 뒤흔드는 정도의 위기와 절정 등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잔잔하게 가슴에 스미어 이토록 생각 많은 밤을 자아내는 이야기라니… 덕분에 나는 이야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정돈해보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2분, 장년의 살바토레가 홀로 극장에 앉아 짜깁기 된 무수한 키스의 서사 속에서 울고 웃은 까닭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그러자, 우리가 이야기를 찾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동경과 그리움에 더불어 후회가 자리함을 느낀다. 


기억과 상상을 가진 한, 우리가 이 저주받은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하였다. 무수한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시작과 끝을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잊어버린 시작의 단계들, 그리고 아직 기약이 없을 끝에 대한 상념들이 무수히 나를 스치고 지나다가 보면, 나의 안에서도 어떤 끝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대한 기억에서 초상을 빌려 와, 상상하는 나의 본능은 삶이라는 이 서사의 빈자리 끝을 그려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상영할만한 기억의 필름이 조성된 다음, 인간의 감정이 담긴 커다란 공동에는 자연스레 후회라는 엷은 베일이 어리는 것 같다. 과거는 영원히 지나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오래도록 그것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후회는 본능과도 같겠다.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희구하는 만큼 우리 안에서는 나의 서사, 나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상영되기 때문이다. 이 기억의 영화관이 생겨날 즈음, 그러니까 소년에서 어른이 된 즈음부터 이야기는 다르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시작에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 어린 동경을, 그리고 누군가의 끝에서 아직 닿지 못한 시간 속, 더욱 커다란 후회의 전조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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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위치한 나와 나의 삶은, 이 무수한 시작과 끝의 반복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더욱 명료히 자각해 나가고, 누구 말마따나 일순 구토감을 느끼고, 더욱 확장된 인식의 청량함을 맛보기도 하면서, 끝이라는 공허와 찰나라는 희소성으로 빚어진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청춘이 청춘에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다는 누군가의 말을 어렴풋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 안에는 나의 종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 어릴 적부터, 무수한 이의 황혼을 엿보았으며, 어떤 삶의 종말을 목격하였다. 너무 많은 김씨 아저씨들의 이야기, 술이나 담배를 곁들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한숨 같은 이야기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의 서사가 나의 귀에 스치곤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차곡차곡 갈무리되었을 따름이다. 어쩌면 나는 너무 어릴적부터 삶이라는 이야기의 내리막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것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아니지만, 너무 많은 이의 후회와 회한의 만화경을 보아버린 탓에 자연스레 주름진 내 자화상은 영글어버린 것일지 모르겠다. 과장된 생각일까. 그러나, 흔들의자에 앉은 내 짓는 표정이 선하다. 그는, 나는 더 이상 미래로 지급유예를 할 수 없는 공허, 피할 수 없는 후회를 앓고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나의 황혼과 종말에 대해 골몰하느라, 누군가의 서사에 함몰되어버린 탓에 기쁜 젊은 날을 소비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으로 치환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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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를 들여다본다. 알프레도의 전언을 따라, 30년간 고향과 가족을 돌아보지도 않고 객지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알프레도는 어딘가 공허해 보인다. 성공한 영화감독으로서 타지와 고향 땅에서 모두 인정받은 그이지만, 이제 폐허가 된 극장 안에서, 엘레나를 담은 자신의 첫 영화 앞에서, 그리고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그의 공허가 물씬 풍긴다. 이미 내겐 익숙한 향기, 황혼의 냄새다. 공허를 허덕이던 그는 이내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한 통을 영사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집약하는 마지막 2분, 이 장면은 일순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고 돌려보았고, 여기서 생겨나는 이해치 못할 감정을 나는 허덕였다. 


살바토레의 가슴 속에 많은 것들을 불러일으킬 장면 앞에서, 누군가의 사랑 어린 복된 시간들 앞에서, 그는 눈물을 머금곤 미소 짓기 시작했다. 짜깁기된 무수한 키스 앞에서, 그 순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엘레나였을까, 알프레도였을까,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을까. 아마 그 모두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짓는 표정과 그 이면의 감정에까지 내 이해가 닿질 못한다. 그러나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표정은 살바토레의 그것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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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것, 그러니까 엘레나와 알프레도와 자신의 어린 시절은 모두 사랑스러운 것들이며, 잃어버린 것들이다. 키스의 장면이 상기시키는 연인의 실루엣과 이 짜깁기된 필름이 상기시키는 그리운 이의 자취와 필름의 시간대가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어린시절이 한꺼번에 망각의 두꺼운 벽을 찢고 마음에 쇄도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허무의 감정이 아니다. 김씨 아저씨들의 체념 어린 회한, 즉 '익숙한 황혼의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다. 

 

잃어버린 것들, 영원히 다시 마주하거나 겪어볼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것들은 은유가 되어 살바토레에게 돌아왔다. 엘레나와 알프레도와 토토로서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 필름 앞에서 잊고 있던 그들의 기억이 은유로서 되살아난다. 이 기묘하게 짜깁기된 필름을 통해, 그들의 기억과 그 안에 서린 감정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것. 기억과 상상을 가진 우리 존재가 이 저주받은 본능에 맞서는 하나의 방식이 이것은 아닐까?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10년도 더 된 나의 옛날들은 벌써 기억의 곳간 속에서 풍화되고 있었다. 항상 살아남는 것은 잊고 싶은 것들이었고, 언제까지고 생생하게 거머쥐고 싶은 것들은 충분한 시간의 유량 앞에 항상 스러졌다. 장면들은 소실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누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갤러리에 담긴 수천 장의 사진 중 어느 것 하나 다시 꺼내본 적이 없건마는, 심지어는 핸드폰을 바꾸는 때에 같이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순간들을 영원에 편입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렌즈 앞에 서면 어색하기 그지없고, 아름답지도 못한 수더분한 나와 나의 고교 친구들, 그들과 만나는 일은 이제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 되었지만, 그럴수록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꺼내어보면 부끄러움에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저를 알면서도,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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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새 글 쓰는 청년이 된 나는 에세이를 쓰면 쓸수록 사진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인화한 기억들을 가지고서 기억과 감정을 영원으로 편입시키는 작업, 내가 지금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 중 으뜸가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영화감독인 살바토레에게 영화란, 누군가의 이야기를 무한히 회귀하는 영원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그것들이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고 되살아날 적에, 겪어볼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것들인 이 그리움의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되돌아볼 수가 있다. 만질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기억할 수가 있게 된다. 

 

이제 와 두 가지 표정의 황혼, 살바토레의 미소와 김씨 아저씨들의 한숨을 같은 공간에 두고 생각해보니, 아저씨들의 회한은 '멋들어지게 해내 보인 순간들'이라기보다는,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함이었음이 기억 속에 보다 명료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 한숨은 빛나는 순간을 갖지 못한 이들의 후회였구나. 그렇다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순간을 가진 이에게, 그 순간이 이야기로 간직되고 있는 한, 그것은 오래도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성질의 과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도착한다. 

 

내게도 그러한 순간이 있었을까. 영원으로 편입된 오래도록 아름다울 이야기가. 나는 살바토르를 더욱 잘 이해해내기 위해, 잠시 글을 내려놓고 이러한 생각을 안고서 옥상을 전전해보았다. 담배 2개비분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내 방구석에서 먼지 앉은 채 잠들어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기억해낸다. 나의 할아버지, 나의 사랑, 나의 온 유년이며, 내 지금을 있게 한 존재. 내 모든 밤을 지킨, 아마 지금까지도 내 곁을 맴돌고 있을 그는 나의 수호천사이다. 부정 父情의 빈자리는 모조리 그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비어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복된 아이로서 자랐고, 지금 와서야 그 사랑의 크기를 생각해볼 수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가늠되지 않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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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나는 살짝 솟아나려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며,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글로 돌아왔다. 아마 그것이 영상으로 된 이야기였다면, 하다못해 영원한 음성이었다면 이내 참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숨을 고르고, 이렇게 마련된 감정의 깊은 수원으로 들어가 본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바다로. 왜 이렇게 슬프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인지. 왜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미소 짓게 하는 것인지. 그러나 아직 이것에 답해볼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스크린 앞에서 분출되는 살바토레의 순수한 감정들, 그 까닭을 생각해볼 적에, 나는 인간의 이야기 안에는 하나의 감정만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휘몰아치게 되면, 더이상 말로써 표현해낼 수 없는 역설적인 상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마치 할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는 때에 나의 표정 같은 것, 짙은 사랑이 피워올리는 후회와 회한과 그리움과 행복의 기억과 사랑스러움 등등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감정의 집체가 내 얼굴에 그려둔 것도 물기 어린 미소였다. 

 

 

 


이해치 못할 감정의 홍수 속에 빠지는 일은 결코 쉬이 겪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대개 까닭이 단단히 자리해 있기에. 나는 아직도 살바토레의 눈물 젖은 웃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내 시간의 좌표계는 시작으로부터 3할만큼만 멀어져 있기에. 하지만 나 또한 여기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며, 그와 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내게도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넉넉히 있다는 뜻이겠다. 마지막 순간에는 그 유명한 OST인 Love Theme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 음악에 대한 이해는 이 장면에 닿음으로써 비로소 더욱 깊어지고, 이 장면에 대한 몰입은 그 이전의 서사들을 접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대책 없이 밝지만도, 서글프지만도 않은 장중한 이 선율은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하고 내게 말하는 듯하다. 비루하지만도, 그렇다고 드높이 당당하지만도 않은 것. 이 모든 것, 찬란함. 유장한 템포를 따라 왈츠를 추고 싶어진다. 이제 주인공의 마음,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가장 적절히 대변하는듯한 이 선율 속에서 나의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장차 나도 추억의 장면 그 앞에 이르러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헤아리기 시작한다. 


OST 선율이 이해치 못할 감정을 완벽히 대변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것, 잃어버린 아름다움 앞을 울게 하는 마음에 대입되는 듯하다. 그리곤 다 살아보지 못한 내가 쓰기엔 도저한 그 단어, 유한한 삶의 역설적인 환희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쁘지만도, 슬프지만도 않으며, 마찬가지로 후회에 신음하지만도, 추억에 미소 짓지만도 않는 사람의 감정. 눈물 어린 미소라는 이 모순된 감정공식을 내 삶의 이야기 전반에 대입해보면, 나는 차차 살바토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지나버린 것과 지나가고 있는 순간들이 유한한 것이며, 찰나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삶의 애틋함을 틔워 올릴 때, 즉 나의 찰나가 모여 형성된 삶의 이야기가 끝에 다다라, 모든 지나버린 순간을 다시금 소중하게 되새기며 그것을 영원한 필름으로 편입하는 순간, 드디어 나는 넉넉히 웃어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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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율이, 그리고 이 치명적인 추억들 앞에서 지어 보인 살바토레의 얼굴이, 그려진 내 서사의 끝에 다른 색깔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야기의 막바지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감정을 엿보인다. 후회와 동경과 그리움의 쓰라림과 행복한 기억과 등등이 버무려진, 아프고도 달콤한 감정의 집체가 한 인간에게 지펴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색깔의 표정. 나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모든 지나버린 것들 앞에서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다만 주름진 내 얼굴에 미소를 덧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카르페디엠이 되어, 나는 먼 미래의 후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내 그려진 서사에서 놓여나 나의 순간을 본다. 아직 닿지 못한 삶의 황혼, 지어낸 이야기가 흩어지고 다시금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삶이라는 이야기의 끝, 기다리고 있을 서사의 종말을 향해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왠지 나도 삶이라는 이야기의 황혼에 다다라, 미소 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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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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