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탈을 거쳐야 자라나는 감각들에 관하여 [사람]

S와 사울 레이터를 통해 한껏 만개한 사유와 다채로워진 오늘을 조명하다.
글 입력 2022.04.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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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무력감 속에서



간신히 쥐고 있던 끈이 탁, 하고 끊어진 것만 같다. 몸이 반쯤 물에 잠긴 채로 꾸역꾸역 연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 이도저도 못 하게 만드는 무력감이 또 한 번 나를 덮친 거다. 분명 영화 평론을 쓰려고 했지만 단 한 글자도 못 쓰겠다. 마감이 임박했다는 사실만이 나를 옥죄어온다. 계속해서 영화를 보며 무엇을 글로 녹여낼까 생각해보는데 어떤 것도 시원찮다. 보고 난 뒤에는 잠시나마 감정이 동하다가도, 빈 종이 앞에서 다시금 무력해진다. 더욱 더 구체적이고 가감 없이, 속속들이 분석한 글을 내놓겠다는 포부 앞에서 별 대단치도 않은 문장들만 쏟아져 나온다. 끊임없이 가라앉는 기분으로 글을 찍어내 보지만, 쌓이는 건 없다. 백스페이스만 연신 닳아간다.


이렇게 된 데는 관성적인 글쓰기 방식 때문도 있을 것이다. 나는 쓰기 전에 거치는 패턴이 상당히 고정적이다. 거기서 어떤 순서만 빼먹으면 상당히 불안해진다.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다. 그때부터는 제동이라도 걸린 것처럼 더 나아가질 못한다. 나보다 더욱 정교하고 세심하게 분석하고 유려한 글을 내놓는 사람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원하는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나로서는 내가 밟는 과정들이 유독 길고 지난해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무언가 스케줄이나 약속이 끼기라도 하면 역량 부족이라는 단어는 지워지고 공연히 그쪽으로만 원인이 돌아간다. 탓만 계속하고 가시적 결과물은 없다. 참담했다.

 

 

 

S와의 조우: 일탈 아니, 어쩌면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



그러던 차에 대학 동기 S를 만났다. S는 대뜸 전시회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물론 그렇다. 작품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시선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고,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사색에 잠기는 과정도 좋다. 그런데 넘쳐나는 할 일 앞에서 자꾸만 나중으로 미뤄온 게 사실이다. 그때 S로부터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전시회 링크가 날아왔다. 이 전시회 평이 좋더라고. S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지 S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간헐적으로 만났을 때 대화 결이 비슷해 잘 통했던 S가. 꼭 전시회를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렇게 거의 등 떠밀리다시피 다녀왔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S와 보고 온 전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시 시답잖은 결과물들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침잠하기를 반복했던 내게 손을 내밀어준 S에게 고맙다.

 

지금부터 전시회에서 본 사진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당시 했던 사유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미리 말하자면, 작가의 세계관이나 인생 전반을 천착한 것은 아니기에 깊이 있는 소개를 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저 전시회장을 배회하며 부유했던 지극히 사적인 생각과 즉각적 감상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이것이 해당 글을 전시가 아닌 ‘사람’ 카테고리에 배치한 이유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글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그다지 구도를 생각하고 찍은 사진들은 아니다. 해명하자면, 전시회장으로 향할 때만 해도 이 경험을 오피니언으로 녹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내용을 중점적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관조자의 위치에서 조명하는 사울 레이터의 시선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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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의 한 공간에는 암실이 마련돼 있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을 통해 방출됐다. 위 사진은 그때 포착해낸 것이다.

 

 

사울 레이터가 활동했던 1940년대 뉴욕은 다양한 예술 사조들이 판을 치던 때였다. 그러나 사울 레이터는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메시지나 주제 의식을 담아내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포착했다고 한다.

 

전시회를 방문하면 대개 작가들의 작품을 당대의 정치적 흐름과 무관하게 보기 어렵다. 나만 해도 예술계에서 어떤 것이 유행하거나 중심 화두로 부상한다 싶으면 우선 필사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니 말이다. 때로 가만히 손을 얹고 보는 경우도 있다. 전에 문단계의 누군가가 ‘문학이 때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종의 답처럼 제기해왔던 것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조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신 있게 담아낸 그가 용기 있게 느껴졌다.

 

물론 사울이 내 말을 들었다면, 자신은 그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가볍게 화답했을지 모른다. "컬러 필름을 사용하는 본인을 선구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생각보다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 될 거다."라는 식으로 발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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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펜릴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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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빨간 커튼] S의 말대로, 제목은 대개 직관적인 경향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전시회 제목이 표방하듯, 사울 레이터는 '도시의 풍경 뒤에 스며들어 말없이 관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위 사진들만 해도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속한 것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전시회장에는 이러한 구도의 사진들이 주를 이뤘다. 가령 어떤 철조망의 너머로 바라본다거나, 거울을 경유해 살핀다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포착해낸 사진들 말이다. 잠시 아래의 사진을 살피고 제목을 맞혀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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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전면에는 버스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누구든 이 사진을 보며 그것과 유사한 제목으로 추측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상 밖에도, 이 사진의 제목은 '구두'다. 왜인지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다. S와 나는 옅게 웃었다. 특이하다. 우리 둘이 입 모아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울 레이터만의 위트는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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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떤가. 놀랍게도 '구두 광고'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구두를 홍보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다. 1958년 사울 레이터는 헨리 울프로부터 의뢰받아 패션 잡지의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다른 누군가가 레이터의 사진을 전시회에 있을 작품으로 여겼지만, 헨리 울프는 기존의 패션 잡지 문법에서 벗어난 그의 사진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패션 잡지의 사진작가를 제안하는 모험을 시도했으리라. 결과적으로 헨리 울프의 선구안 덕에, 평은 갈릴지라도 누군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구미를 당기게 할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사진이 탄생했다.

 

이렇게 사울 레이터의 색채가 담긴 독보적인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최근에 본 영화 <선희와 슬기>에서의 어떤 대사가 떠올랐다. "나를 찍은 것도 아닌데 찍고 보면 다 내가 담겨 있다?" 꼭 생업을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마다 사진관은 다를 것이다. 필자와 가까운 친구 J는 풍경 사진을 위주로 찍어달라고 요구한다. 본인은 그저 ‘걸쳐져’ 있는 정도로만 그쳐도 된다고 첨언하면서. 반면 필자는 주변의 풍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가 되지는 않고, 피사체로 등장하는 나만 만족스럽게 나오면 된다. 평소에도 스스로 자기중심적이며 나만의 틀에 갇혀 세상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런 성향이 사진관에도 오롯이 반영되는 셈이다.

 

사울 레이터 역시도 그러했다. 온갖 사진들에서 레이터가 피사체로 등장하지 않아도, 그가 보였다. 물론 이는 그의 자화상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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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화상]

 

 

자화상의 중앙 틈새가 의도적인지, 우연적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틈새를 필두로 그가 분절되기라도 한 듯 이분화되어 찍혀 있다는 게 흥미롭다. 본인이 제대로 나오는 것을 중요한 미학으로 여기는 필자와 달리, 레이터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위 사진은 어떤 점에서는 기이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갈한 것을 완벽하다고 느끼는 기존의 문법이나 통념을 해체하려는 시도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게 확실하다. 이렇게 그만의 독보적인 시선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존의 방식을 또 한 번 비트는 그의 시도들



흥미로운 건 그의 사진에서 자주 보이는 특성 즉, 주변부에 속한 것을 중심으로 잡는 구도가 모든 사진에 적용된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래 사진을 주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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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진을 보고 주변부에 위치한 어떤 것을 제목으로 명명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사진의 중심에서 포착되지 않는 것들을 작가는 제목으로 상정하는 경우가 잦다는 패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에도 표지판에 적힌 'CANEL'이라는 단어가 이 사진의 제목이다. 다른 사진들과의 간극에서 오는 의문을 필자의 방식대로 메워본다. 표지판은 대개 그것 자체로 주목받기 보단 어떤 길에 당도하기 위해 반드시 살펴야만 하는 것 즉, ‘경유하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대개 표지판이 어떤 식으로 설치돼 있고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를 자세히 뜯어보진 않으니까. 하여 사울 레이터는 위와 같은 재현 방식으로도, 주변부로 밀려난 대상을 중심부로 전복하여 위치시키는 시도를 성사해낸 셈이다.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모델 사진.jpg
제목 [솜스 밴트리, 노바 매거진]

 

 

그런가 하면 그가 정면에서 정확하게 피사체를 담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고양이 혹은 본인의 애인, 가족들을 담을 때 그랬다. 물론 이들 역시 옆에서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들을 평소 자신의 사진관과는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길 시도했단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선 그들이 도드라져 보이고 선명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것들은 유독 튀어 보이는 법이니까.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이것도 애인.jpg
제목 [솜스] 솜스 밴트리는 사울 레이터의 애인이다. 둘은 각각 모델과 작가로서 만났는데, 미술이나 음악에 천착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대화가 끊이질 않았던 모양이다. 사울 레이터는 솜스 밴트리가 죽은 이후 그를 회상하며 "우리는 행복한 어리석음으로 스스로를 낭비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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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앨리스와 솜스] 여기서 고양이 이름이 앨리스다.

 

 

 

사울 레이터의 인생관을 통해 '그'를, 또 그를 관조하는 '나'를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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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부를 조명하는 그의 독특한 촬영 방식은 '세상에서 잊히기를, 별거 아닌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다.'라는 그의 인생관과도 닮아 있었다. S와 나, 둘 다 신기해했다. 그래도 사람은 은연중에 조금이라도 기억되고 싶어 하지 않나?

 

사실상 예술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도 있지 않나 싶다. 비록 출발점은 그렇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대개 본인의 작품을 지지하고 진심을 담아 봐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작업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니 말이다. 조금이라도 그런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곧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고 싶다는 것과도 동의어가 아닌가. 연쇄적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물론 사울 레이터는 다르다. 그는 상업적 성공이나 명성을 알리는 데 일절 관심이 없었다. 처음 사진에 입문한 것도 어떤 목적성을 띠지 않았다. 그저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 홀로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35mm 라이카를 들고 나가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서 출발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전시회를 보며 그의 가치관과 모순되는 지점을 발견했다. 레이터의 연인이었던 솜스 밴트리를 주제로 하는 문장이 그러했다. 솜스 밴트리는 지병으로 인해 사울 레이터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자 사울 레이터는 자신이 성공한 모습을 그녀가 보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더라. 이는 앞서 성공에는 관심이 없었다던 그의 말과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울 레이터는 자신의 예술이 주목받지 못할 때도 솜스 밴트리가 자신을 열렬히 지지해줬고 사진을 사랑해줬다고 한 바 있다. 이를 보면 앞서 한 발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자 팬이 자신이 감격할 만한 순간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을지 모른다. 뭐 사실 어떤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든, 뭐든 다 납득 가능할 것이다.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좀 더 기울 뿐, 양가적인 경향을 탑재하니까. 게다가 기존의 사유나 가치관을 단번에 전복시켜도 그렇구나, 하고 단 번에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 그의 심리를 추측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거다. 그는 '나는 대단한 철학은 없다. 그저 카메라를 들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는데도 말이다. 레이터는 정해진 규격에서 벗어나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고 포착하는 데 심취했던 사람임에도 나는 자꾸만 그를 특정 틀에 가두려 한다. 어쩐지 그의 삶을 두고선 이런 방식이 부적확한 것만 같다. 때로는 정답을 찾지 말고 사진 안에 온전히 몰입해 흐름에 맡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또 그게 필요하지 않을까. 사울 레이터의 전시를 보면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불쑥 틈입해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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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린다는 것



전시회의 후반부에는 사울이 생을 마감하고 난 후 지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개최한 추모식을 중심 테마로 전시해둔 공간이 있었다.

 

추모식을 말하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례일지 모르겠으나,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내 본다. 전에 내 경조사에는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싶었다. 장례식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결혼식은 어떨까. 지금의 나로서는 생각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으로 깊은 친밀감을 나누고 있는 지인들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워낙 소수의 인간관계만 맺는 걸 좋아하고 그게 편해서 고수해온 것도 있지만, 그나마 몇 안 되는 사람들도 잘 못 챙기는 탓이다. 무언가 천착하고 있는 게 있으면 연락을 며칠 동안 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약속을 먼저 잡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게 틀린 방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내가 초대하는 어떤 행사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거란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위 테마의 전시를 보면서 사울 레이터가 나랑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이는 레이터가 애인인 솜스를 두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었다. 레이터는 성공과 연인 중 어떤 것을 택하겠냐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라 했다. 본인은 엄청난 성공을 원치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본인을 무한히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삶이 무의미할 것 같다면서. 이런 것만 보아도 나와 상반된다. 내겐 사랑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명예도,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어 정점을 찍고 싶다는 욕구도 그에 비등하게 중요하니까.

 

사울은 죽은 이후에 사람들 틈에 둘러싸였다. 역설적으로 잊히길 바랐던 그를 주변 이들은 잊지 않았다. S가 최근에 봤다던 알쓸범잡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범죄 심리학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발언했는데, 죽음은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고 했단다. 하나는 내 영혼이 죽는 물리적인 죽음이고 하나는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단 한 사람까지도 사라졌을 때 진짜로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었다. S는 죽어서도 호명되는 이들을 떠올리며 "그럼 그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는 거잖아.”라고 했었다. 

 

그런 점에서 죽어서도 내내 주변 이들에게 기억됐던 레이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게 아닌가. 더욱이 후세들은 그의 예술작을 추앙하며 전시회까지 올린다. 이 상황을 보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물론 상업적 성공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내심 나쁘지는 않네, 싶을까. 아니면 으레 본인의 작품을 엄격하게 재단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작품으로서 전시해두긴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울까.

 

그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그의 죽음을 기억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살아생전에 그를 지지하고 사랑해준 이들이 있었다는 방증임은 확실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레이터는 사진에만 몰입하며 주변 사람들을 변방으로 모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으리라. 추측일 뿐이지만,늘 사람들 틈에 둘러싸였던 그의 삶 전반을 생각하면 완전히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울을 보며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겠다는 걸 배웠다. 꼭 지금처럼 폐쇄적인 방식만이 답은 아니겠구나.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의 문에 노크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쩐지 꼭 내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능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전부라던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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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자국] S는 이 사진이 전시회의 시그니처라고 했다. 사울이 남겼을 족적을 따라가본다.

 

 

 

일상성을 해체하는 데서 발견 가능한 낯섦에 대해



전시회장을 나오면서는 돌연 전시장에서 봤던 "신비로운 일들은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늘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라는 사울 레이터의 말이 떠올랐다. 이는 일상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조금이라도 틀어서 낯설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얘기겠다.

 

매일같이 방안에만 틀어박혔던 내가 S와 만나기로 결심하고 전시회장으로 향한 것도 내겐 일상 속 방향과 틀을 벗어나는 시도다. 일종의 도전적인 일탈인 셈이다. 물론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경험하고 나니 레이터의 표현처럼 ‘신비롭게도’ 해방감을 얻음과 동시에 리프레시가 됐다. 당연하게 재창되는 이야기이지만, 꼭 내가 추구해온 방향만이 길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이 글도 원래는 영화를 보고 분석 글을 쓰려다가 하도 안 풀려서 힘을 뺐는데,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고, 의도치 않게 점차 글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돌연 그간의 가치관을 두고도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완벽해지고 싶어도 완벽해질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누군가를 탓하는 것으로 자위해왔던 건 아닐까. 그러면 내 잘못은 없어지니까. 나는 하나도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 약속이 있어서 못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니까. 알고 보면 나는 한없이 게으르고 할 일을 잘 미루는 것뿐인데 그렇게 변명하는 것으로 연명해왔던 건 아닐까. 사실상 잘 생각해보면 내가 일에 단기적으로 집중하는 데는 혼자 매달리는 시도가 필요하지만, 오래 이어가는 데는 주변 이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이를 절감하면서도 당장의 일들만을 해치우느라 늘 이기적이고 치졸한 마인드를 유지해왔던 건 아닐까 싶었다.

 

전시회를 다녀온 그날 꿈을 꿨다. 내가 삶의 무상감에 관해 이야기하자 어떤 아이가 그래도 네 옆에 누구누구가 있잖아, 이런 말을 전해줬다. 나는 거기다 대고 "그건 그런데" 하고 말을 끊으며 내 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꿈에서도 나는 마감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그때 뜬금없게도 그 애가 어떤 연인을 가리키며 그들이 난관에도 불구하고 서로 얼마나 잘 도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지를 말했다. 아이의 말을 듣자 돌연 누군가가 보고싶었다. 꿈에서는 전시회에서 본 거 같은 하얀 계단이 펼쳐져 있었는데, 나는 말하기를 멈추고 그 계단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그 누군가를 계속 떠올렸다. 그간 내 할 일이 바빠 어떤 것을 하자는 약속을 계속 뒤로 미뤄왔지만, 불평하지 않고 옆에서 묵묵히 내 보폭에 맞춰 걸어주는 그 누군가를.

 

그렇게 꿈에서 깼을 때 사울 레이터를 떠올렸다. 꿈의 특성상 분절되고 두서없었지만, 그가 내 생각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전시회장에서 사울 레이터가 그의 연인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이 있는 게 가장 큰 성공 같다’고 하는 영상이 여러 번 재생될 동안 나는 내내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 본 말이 머릿속에 각인됐나 보다.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동의를 표했던 것 같다.

 

내 안에만 갇혀있던 나머지 뭔가를 놓친 것만 같다.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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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장에는 빨간 우산이 구비돼 있었다. 이는 레이터의 사진 중 [발자국]이라는, 빨간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을 피사체로 담은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구성이겠다. 사진은 S가 손수 담아준, 빨간 우산을 든 필자 본인이다. 

 

 

 

일상으로의 회귀. 그러나 다른 감각으로 지각하는 오늘



어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글을 쓰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그때 멀리서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카메라 프레쉬라도 터뜨린 듯 공원이 환했다. 발걸음은 카페로 향하면서도 그 광경이 못내 마음속에 남았다. 카페에 들어와서도 밖을 내다봤다. 지금 놓치면 저 풍광을 더는 못 볼 거 같다는, 이것만큼은 미루지 않아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돌연 치밀었다. 그래서 과감히 밖으로 향했다. 집 뒤에 있는 공원이 이렇게 황홀하리만큼 예쁘고 다채로운지 몰랐다. 그때 어떤 나무다리가 있기에 홀린 듯이 길을 따라 걸었다. 놀랍게도, 그 다리는 9년을 여기 살면서 처음 발견한 거였다.

 

공원의 꽃들은 몇 가지 색으로는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고 풍부했다. 아이들이 잘 쓰지 않는 크레파스와도 같은,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듯 평소 발화하지 않는 색들. 나는 멀리 벚꽃놀이를 보러 가자는 약속도 이행하지 못한 채 방안에만 틀어박힌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에 무심한 새 꽃들이 잔뜩 만개한 거였다. 보다 보니 연신 감탄이 나왔다. 엄마의 영향으로 꽃을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는데 왜일까. 더욱이 꽃은 선물로 받아 품에 안기도 하는데 왜 지금 이 공간에 만개한 것들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걸까. 

 

돌아다니면서 꽃 사진을 찍어댔다. 혼자 꽃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게 어쩐지 민망했던 터라 재빠르게 행했다. 지금 여기가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오는 게 아무리 황홀해도 끝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인 거라면, 더더욱 놓치기 싫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공간이 낯설게 다가오자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기꺼이 몸을 숙여 꽃을 바라봤다. 꽃이 그렇게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처음 알았다. 규칙적으로 정갈하게 배열된 게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가만 쓰다듬었다. 어떤 작고 하얀 꽃은 만져도 아무 느낌이 안 났다. 그냥 손에 꽃술이 스치고 있는 게 눈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것 역시 처음 알았다. 


사울 레이터가 주변부에 있는 것들을 중심에 배치하며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듯, 나 역시 그를 경유해 주변에 놔뒀던 것들을 중심으로 위치시키며 새로운 감정적 경험을 연이어 한 셈이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다 아기한테 하는 말을 들었다. "가서 꽃구경해." 그 말이 뇌리에 오래도록 박혔다. 어릴 적 경험한 것들은 처음으로 감각해서인지 유독 오래 기억된다. 아이들한테 좋은 것을 많이 쥐여주고, 품게 하고, 좋은 곳을 많이 데려가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 내가 이렇게 꽃을 꺾지 않고 바닥에서 고개를 숙여 관찰하는 것도 누군가의 행동이 떠올라 따라한 거였다. 크게 동했던 기억은 오래 남는다. 이 사실만 보아도 더욱 현재를 놓치지 않고 밀도 있게 포착해야 할 것만 같다. 

 

문득 이 풍경을 혼자 보고 있는 게 아까웠다. 꿈에서도 그렸던 그 한 사람이 자꾸만 생각났다. 손잡고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을 맞으면서 조용히 공원을 걸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벚꽃 핀 날에 둘 다 할 일을 뒤로 하고 아파트 부근을 느릿하게 걸었던 그날처럼. 좋다,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간만에 여유롭게 걸으니까 좋다. 풍경에 심취한 나머지 직관적인 감상을 담은 이야기만 주고받던 그때처럼. 나는 그제야 무엇이 중요한지 알 것 같았다. 곧바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야 글이 나올 것만 같다. 

 

 

*글에 적힌 사울 레이터에 대한 설명은, 전시회 내부에서 소개되었던 그의 생애에 관한 글들을 참고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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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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