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옆구리 터져 버린 저 김밥처럼 [음식]

글 입력 2022.04.2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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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김밥은 가장 평범하게 특별한 음식이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내 끼니를 챙겨줄 시간이 없어 나는 늘 늦게까지 하는 학원에서 밥을 먹고 오곤 했다. 초등학교 급식실 수리로 한동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어야 할 때도 나는 도시락 배달 업체에서 점심밥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바쁜 부모님도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만큼은 이른 새벽부터 준비해 도시락을 만들어주시곤 했다. 도시락의 내용물은 김밥으로, 속 재료는 우엉과 단무지, 햄, 오이, 계란지단으로 항상 같은 조합이었다.


그런고로 김밥은 내게 있어 언제나 같은 맛을 내는 음식이었다. 유치원생 때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한결같은 조합의 김밥을 몇 년간 먹어오다 보니, 그 빈도와 별개로 몇 개 집어먹지 않고 물릴 때도 있었다. 언제나 유부초밥을 싸주는 부모님을 둔 친구는 나와 정반대 상황이었다. 내가 익숙한 맛의 김밥에 투덜거릴 때, 친구는 김밥 좀 먹어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서로의 도시락 사정을 훤히 아는 우리는 소풍날이면 서로의 도시락을 더 탐내곤 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유부초밥과 교환해먹은 김밥들이 조금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는 김밥이 얼마나 수고로운 음식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어렵고 복잡한 음식은 많고 많지만, 소풍 전주부터 마트에서 재료를 사 오고 밥을 짓고 재료를 손질하고 과자와 과일을 담아 도시락을 싸주던 정성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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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많이 가는 탓에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먹지 않던 김밥은 자랄수록 흔하고 친숙한 음식이 됐다. 편의점의 간편식품 코너 덕분이다. 당시 물가로 천원 내외면 사 먹을 수 있는 삼각김밥은 돈 없는 학생에게 가장 좋은 간편식이었다. 학교에서 저녁을 주지 않던 중학생 때나, 석식을 신청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때나 삼각김밥은 끼니를 때우기 가장 간편한 선택지였다. 손에 들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데다, 양도 적절하고, 맛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현재 내 몸을 구성하는 1%는 그때 먹었던 김밥에서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밥을 애용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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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사먹은 채식주의 삼각김밥

 

 

고등학생 때는 학원 바로 밑에 있는 김밥집을 줄기차게 드나들었다. 원래 한 가지 메뉴에 꽂히면, 그것만 파고드는 편인데 그맘때의 내가 빠진 건 모 프랜차이즈의 땡초김밥이었다. 가게에서 먹고 가면 어묵 국물을 마음껏 떠마실 수 있었기에, 학교가 늦게 마쳐 학원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매장 식사를 택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한동안 김밥을 먹을 일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는 김밥집이 없었고, 비건을 지향하게 되면서 밖에서 무언가를 사 먹을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를 줄이고 생전 안 하던 요리를 시작하게 됐다. 해먹는 요리가 한정적이다보니 실력이 좋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요리가 있을 때 레시피를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을 정도는 된다.

 

현재 나는 1인 가구나 다름없다 보니 사놓을 수 있는 재료의 가짓수가 한정적이고, 재료 하나를 다 사용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렇다면 하나의 재료를 메인으로 두고 식단을 짜면 좋을 텐데, 보다 다양한 음식을 해먹고 싶은 욕심에 늘 과하게 장을 보고 만다. 그래서 나의 삼시세끼는 비교적 호화스러운 메뉴 한 가지와 그 메뉴를 만들기 위해 산 재료를 해치우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 더 저렴한 말로 바꾸자면, '냉털'(냉장고 털이)가 일상이라는 것이다.


이 냉장고 털이도 이삼 년 정도하다 보니, 이제는 재료를 소진하는 레퍼토리가 대충 정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애용하는 메뉴는 김밥이다. 다양하고 적은 재료를 한 번에 소진할 수 있는 많은 방법 중 김밥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재료의 합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김밥의 속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도 동그랗게 말린 김과 밥알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식재료 이름 뒤에 김치를 붙여 레시피가 나오면 술을 마신다는 술 게임이 있는 김치에 버금가게 김밥의 베리에이션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더군다나 우엉이나 생당근처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재료도 김밥에 들어가면 아무렇지 않게 먹게 되니, 김밥에는 마력이라도 있는 게 틀림없다.


둘째, 특별히 익혀야 하는 재료가 있는 게 아니라면 불을 쓰지 않아도 된다. 볶음밥이나 파스타는 기본적으로 불이 있어야 하지만, 김밥은 생채소를 이용해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소풍 도시락처럼 정성껏 만들려면 당연히 손이 많이 가겠지만, 집에서 먹는 김밥은 비교적 적은 공을 들이고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맛있다. 파스타나 볶음밥처럼 냉장고 털기에 최적화된 레시피는 많지만, 밥 전체에 양념을 해야 하다 보니 재료 각각의 맛이 소스로 덮여버리기 일쑤다. 그에 반해 김밥은 따로 조리한 재료를 합쳐 만드는 음식으로 재료 본연의 맛과 식감이 비교적 살아있다. 거기에 더해 색감이 돋보이고, 형태가 뭉그러지지 않아(물론 김밥 마는 데 서투른 나는 언제나 옆구리가 터지고 만다) 보기에도 좋다.

 

이렇게 김밥에 대해 잘 아는 듯 늘어놓았지만, 사실 내 손으로 김밥을 만들어 먹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동안은 어릴 때의 기억으로 만들기 만만찮고 번거로운 음식이라고만 생각해, 딱히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던 중 SNS에서 오이 김밥과 비빔면의 조합이 기가 막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꼴랑 오이 하나만 있으면 되는 김밥이라니. 가히 혁신적이었다.

 

나는 그길로 당장 슈퍼에 가 김밥 김과 오이를 사 왔다. 예상했던 것처럼 조리 과정은 매우 간단하고 쉬웠지만, 그 맛은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사 온 김을 쓰기 위해 그날부로 이런저런 김밥을 만들어 먹다보니 어느새 김밥은 메뉴가 고민될 때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 당장 이 글을 쓰는 오늘 점심에도 김밥을 만들어 먹었으니, 소울푸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내가 여태 만들었던 몇 가지 김밥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니고, 김밥을 야무지게 잘 말지도 못하는 터라 그닥 맛있어 보이진 않지만, 김밥에 대한 애정만큼은 드러났으면 좋겠다.

 

 


1. 오이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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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오이 김밥이다. 밥에 소금(혹은 연두)과 참기름, 통깨 약간의 간을 하고, 오이를 통째로 넣어 만 것으로 시원한 맛이 비빔면과 잘 어울린다. 별것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계속 손이 간다. 오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꼭 만들어보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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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오이만 활용한 김밥이지만, 오이를 통째로 넣는 대신 얇게 썬 후 소금에 20분간 절였다. 위의 김밥이 아삭한 식감이라면 이쪽은 꼬들꼬들한 식감이다. 거기에 와사비 마요네즈를 더해 짭조름하고 눅진한 맛을 강조했다. 마요네즈에 들어간 와사비의 알싸한 맛은 느끼함을 줄여준다. 와사비가 없다면 후추를 뿌려도 괜찮을 것 같다. 시원한 오이 덕분에 약간 초밥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2. 템페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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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는 인도네시아의 발효 식품으로, 콩을 발효시켜 만든 음식이다. 청국장과 비슷할 것 같지만, 그보다 꼬순내가 덜하고 조직이 조금 더 단단하다. 흔히들 템페를 두고 두부의 맛, 치즈의 풍미, 고기의 식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복합적인 풍미 덕에 활용도가 높다. 단독으로 먹어도 좋지만, 기름에 굽고 간단히 양념을 해주면 콩 발효식품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줄이고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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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김밥은 튀긴 후 달짝지근한 간장 양념에 조린 템페, 당근라페, 깻잎 그리고 흑미밥으로 만든 것이다. 템페를 조리해야 해서 불을 쓸 수밖에 없지만, 한 입 먹고 나면 남은 템페 개수를 헤아리게 되는 맛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템페의 쫀득하면서도 살짝 무른 식감이 매력적이다. 향이 강한 깻잎은 이 두 가지 재료가 가진 특유의 냄새를 중화시키고, 재료를 한데 어우러지게 하는 킥이다. 홀그레인 머스터드로 만든 당근 라페 또한 적당히 아삭하고 짭조름해 김밥과 잘 어울리는 속 재료 중 하나다.

 

 

 

3. 땡초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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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먹은 횟수가 그 중독성을 증명하는 땡초김밥이다. 한때 꽂혔던 땡초 김밥에는 땡초가 통째로 들어가 있지만, 내가 해 먹은 건 진주 식으로 재료를 잘게 다져 밥과 볶은 후 김밥을 마는 방법이다. 청양고추, 당근이 기본 재료로 때에 따라 비건 어묵이나 유부를 추가해서 먹는다.

 

땡초김밥 역시 일반 김밥에 비해 재료가 간단하고, 만들기 쉬워 자주 해먹게 된다. 짭짤하면서도 매콤해 쉽게 물리지 않고, 마요네즈를 더하면 매운맛을 적절히 중화해 줘 끝없이 먹을 수 있다. 볶음밥으로 만들기 때문에 꼬마 김밥으로 만들 수도 있다.

 

 

 

4. 톳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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톳 김밥은 우들우들하고, 오독오독한 톳 식감이 매력적이다. 톳은 물에 헹군 후 설탕과 간장에 덖어 수분을 날려주고, 당근은 얇게 채 썰어 살짝 볶아준다. 식감을 위해 단무지와 비건 어묵 혹은 유부를 넣어 함께 말아준다. 계란지단이나, 유부를 추가해도 잘 어울린다. 건강한 듯하면서도 재료 하나하나의 식감이 살아있어 먹는 맛이 있는 김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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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다가 다 풀어진 고추냉이 김밥

 

 

그외에 각종 유명 김밥집들의 레시피를 따라하거나 락토오보나 비건으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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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먹는 것 또한 좋아한다. 위 사진은 부산에 있는 비건식당에서 파는 아보카도롤이다. 비건 참치가 들어가있는데, 실제 참치마요와 비슷한 맛이 나면서도 그보다 부드럽고 비릿한 냄새가 덜하다. 신선하고 아삭한 채소와 부드럽고 농후한 아보카도, 참치의 조합은 정말 기가 막힌다. 위에 뿌려진 상큼한 소스는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김밥의 맛 균형을 잡아준다.

 

이처럼 김밥은 김치만큼이나 그 사람의 입맛이 잘 드러나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색감이나 식감을 위해 넣는 재료의 가짓수가 정해져있는데, 이를 무엇으로 대체하느냐를 통해 취향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가장 좋아하는 재료는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

 

*

 

최근에는 김밥을 집밥으로만 해먹었지만 해 좋은 날 도시락을 싸서 근처로 나들이를 가고 싶다. 아무리 친숙해져도 도시락 메뉴하면 김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어린 날의 추억이 계속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직 예쁘게 만드는 데는 별 재주가 없지만, 계속 만들다 보면 어느샌가 익숙해지지 않을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될 때까지 하는 거니 말이다. 언젠가는 '잘 말아워 잘 눌러줘'라는 가사를 외지 않고도 척척 김밥을 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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