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녹아서 사라진다 해도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글 입력 2022.04.0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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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배경으로 풀어낸 상실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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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되는 장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상징, 햐얗고 광활하고 척박해 보이는 공간,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어서 동시대에 존재한다고 좀처럼 믿기지 않는 곳. '북극'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비슷할 것이다.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이러한 북극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잃은 딸의 애도와 성장 과정을 그리는 연극이다.


 

<시놉시스>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은 십 대 소녀 로리, 생전에 북극탐험가를 꿈꾸던 아빠의 서재에서 북극 여행 계획이 적힌 노트를 발견하고, 이대로 아빠의 유골함이 납골당에 안치되는 걸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로리는 유골함이 든 배낭을 매고, 엄마의 카드를 훔쳐 무작정 집을 나서는데...

 

로리와 아빠는 북극에 무사히 닿을 수 있을까?

 

 

가까운 사람을 잃은 뒤 애도의 과정을 거쳐 상실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것은 보편적인, 어떻게 보면 상투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익숙한 상황이 북극이라는 특수하고도 낯선 공간을 만나면 전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북극의 흰 눈과 추위는 로리가 경험한 상실, 죽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북극에 도전했던 수많은 탐험가들을 생각하면 북극은 인간의 끈기와 도전정신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북극은 단순히 배경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다섯 개의 북극, 북극으로 떠났던 역사 속 탐험가들의 이야기, 북극에서 얼음이 움직이는 방식... 로리는 관객에게 북극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는 로리의 여정을 진행시키고 극의 지적 흥미를 더한다. 막연하기만 하던 북극이라는 공간을 알아가면서 관객은 로리가 어떤 아이인지도 파악하게 되고, 그를 응원하게 된다. 소극장에서 배우 한 명이 이끌어가는 극임에도 뛰어난 연기력과 아름다운 대사 덕에 광활한 북극의 풍경을 그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여성 탐험가 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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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의 또 다른 매력은 여성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탐험을 하는 1인극이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탐험은 남자 또는 남자아이의 전유물이었다. 이 극에도 이름을 날렸던 여러 남성 탐험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복하고 쟁취하는 일이 전통적인 남성의 성역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무도 닿지 않은 곳에 가장 먼저 깃발을 꽂겠다는 탐험가들의 '탐험가 정신'은 '남성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반대로 여성은 선택받고 정복당하는 대상으로, 자연과 동일시되었다.


2022년에는 로리 같은 10대 소녀 탐험가가 주인공이 되는 게 어색하지 않다. 장례식 다음날 아빠의 유골함이 든 배낭을 매고, 엄마 카드를 훔쳐 북극으로 떠날 정도로 로리는 당찬 인물이다. 북극으로 가는 중 안드레아스라는 소년에게 반했을 때도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킨십에도 적극적이다. 이러한 로리의 모습은 노르웨이 트롬쇠의 북극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언급되는 북극 최초의 여성 사냥꾼 바니 불트슈타트와 겹쳐진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진취적이며 씩씩한 성격의 로리는 이전 세대의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리는 기존 남성 탐험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안드레아스와 처음으로 밤을 보낸 후의 장면이다. 안드레아스와 성관계를 마친 후 로리는 그와 교감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된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자기 앞에 있었을 수많은 여성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남자와 처음 밤을 보내고 같은 기분을 느꼈을지. 그리고 자신의 딸도 그러할지.

 

답이 없는 질문들 가운데서 로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탐험을 계속하기를 택한다. 그리고 탐험에 나선 여성으로서, 기존의 탐험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북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탐험가들의 끈기와 생존력에 감탄하는 동시에 탐험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파괴의 속성도 함께 언급하는 것이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멸칭으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기후위기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점, 이누이트 남성과 탐험가들 사이에서 식료품과 교환대상이 되었던 이누이트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수많은 우연이 얽혀 만들어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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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점에 깃발을 꽂기를 열망했던 탐험가들은 북극에 지금까지 없던 엄청난 무언가가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따뜻한 바다, 지구의 내핵으로 들어가는 입구 등.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북극에 그런 건 없다. 로리 역시 북극이 놀라우리만치 아무것도 없는, 그저 얼음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얻게 되는 일은 목적지에서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북극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박차고 나왔지만 로리가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아직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이라는 것과, 자신은 아빠를 잃었지만 엄마 또한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로리는 출장차 북극에 온 프리다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만나고, 함께 헬기를 타고 북극으로 향한다. 마침내 북극 상공에 도착한 이들은 비좁은 유골함 속에 있던 아버지를 북극으로 보내준다.

 

목숨을 바쳐가며 도착한 곳에 얼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나, 하루아침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로리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삶은 눈과도 닮았다. 눈은 지상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경우가 많고, 쌓인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물이 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결정체가 모두 다른 것처럼 사람의 삶 역시 제각각이다. 극에서 로리는 이누이트들에게 눈을 부르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정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눈 결정체가 모두 다르므로 그 각각을 같은 눈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에게 눈을 뜻하는 말 수백 가지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극의 초반에 로리는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고 말한다.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 지구가, 그리고 우주가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우연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로리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 상공에 떠 있는 이 순간이 있다. 우리가 결국에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사라진다 해도, 살아있는 한 각자가 경험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유하다. 남겨진 이들의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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