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애도와 성장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글 입력 2022.03.3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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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를 향한 애도의 방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주체 못할 슬픔을 고장난 수도꼭지 마냥 쉴틈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허심탄회하게 흘려보내거나, 보다 완벽한 사자死者와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위해 눈 앞에 직면한 상실의 고통을 애써 부정하거나. 슬픔을 분출하거나 연장하려는 저마다의 애도 방식은 다음 생을 위한 발판으로 혹은, 수렁으로서 명암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오늘의 주인공, '로리' 또한 바로 그 갈림길을 맞이한 소녀다.

 

십대 소녀 로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한순간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로리와 그녀의 어머니는 상실의 고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소한다. 극에 달하는 슬픔으로부터 헤오나오지 못한 어머니가 일상에 자리잡지 못하는 동안, 로리는 생전에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를 가지고서 다른 의미로 일상을 벗어난다. 아버지가 생전에 방문하고 싶었던 북극으로 유골함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식탁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유골함과 함께 아버지의 일기장을 가이드로 삼으며 생면무지의 땅 북극을 향한 비행을 남모르게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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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2018년 볼트 오리진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작 작품상 수상, 헤러틱 모노극 어워드에서 우승에 빛나는 작품으로서, 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 1인극(모노 드라마)이다. 북극을 향한 로리의 여행기는 죽음과 상실, 그리고 성장이라는 삶의 알 수 없는 변주와 더불어,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의 선망과 설렘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이들 모두 극 중에서 평행선을 이루며 우리가 명확하게 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섬세하게 구축된다. 인물의 상하 동선을 형성하는 특유의 무대 셋팅은 예측 불허한 세상으로 한 걸음 나서는 그녀의 굴곡진 여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로리의 풍부한 지식과 도전의식은 아버지가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다. 아버지가 전수한 가르침은 그녀가 상실의 고통을 무릅쓰고서 거친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선사한다. 가령, 이누이트와 관련하여 잘못 퍼진 인식은 순 엉터리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무분별하게 지식을 맹신하는 사람들을 그녀가 판가름 해주는 지표로 작용한다("이누어트 어로 눈을 뜻하는 단어가 수백가지라는 말, 다 헛소리에요") 중간중간 그녀가 인용하는 수많은 탐험가들의 일대기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주저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이 사진 속에 있다. 나, 마이클 콜린스만 제외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에 기록된 난센의 북극 탐험 코스는 로라의 막연한 탐험심에 불씨로 작용한다. 그녀에게 삶은 곧 세상을 향한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모험, 그 자체다.

 

단 한 명의 배우가 무대 위를 끌고가는 에너지는 관객들에게 짙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아빠의 장례식부터 북극으로 떠나는 길에 펼쳐지는 다양한 경험담은 공감을 유발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십 대 소녀가 생전 처음 겪는 크고 작은 충격들을 섬세하고 재치있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소소하게, 때로는 가슴 뛰는 벅찬 순간이 등장한다. 이는, 머나먼 타지에서 얻는 첫경험과 생면부지에서 느끼는 동질감으로 요약 가능한 작품의 서사적 핵심과 직결된 지점이다. 노르웨이에서 처음 만난 한 청년과의 짧은 하룻밤은 짜릿한 감정을 잠시나마 선사한다. 비록, 잘못된 상식으로 이성을 유혹할 만큼 지적인 구석이 전무하지만, 이를 보완하고도 남는 그의 이국적인 미모 앞에서 로리는 순식간에 무장해제 당한다. 처음이기에 설레이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서 로리는 첫 경험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내 상대의 배려 없는 행위와 함께 짧게 타올랐던 불꽃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잠식된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그녀는 잠든 남자를 뒤로한 채 잠시 일시정지했던 모험길을 다시 떠난다. 그녀의 첫 경험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이난다. 소중한 인연으로 기억될 뻔했던 노르웨이에서의 허무한 하룻밤과 대조적으로, 북극에서 만난 프리다와의 그것은 온화한 감흥을 선사한다. 대화 나눌 사람 하나 없는 외지에서 프리다는 로리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유일한 말동무가 된다. 북극 한복판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에게 프리다는 동양의 한 외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의를 베푼다. 폐부를 파고드는 북극의 추위로부터 잠시 움츠려든 로리는 프리다의 온정을 통해 험난한 여정을 뚫고 감내할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 받는다. 각기 다른 배역들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유주혜/송상은' 배우의 호연은 시시각각 변하는 로리의 내면과 관객 사이의 가느다란 감정선을 유지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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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은 곧 성장이다. 여정 도중에 직면하는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서사 구조는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더 커진 나 자신을 주인공이 발견함으로써 종결된다. 결국, 자신이 부모님 몰래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프리다에게 탄로 난 그녀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지와 함께 머물고 있는 캠핑장을 뛰쳐 나온다. 방향을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어둠 한 복판으로 아버지의 유골함과 함께 뛰쳐나온 로리는 지금까지의 여정이 강제종료 당할 위기에 처했음을 실감하며 흐느껴 운다. 그녀를 쫓아 황급히 뛰쳐나온 프리다와 캠핑장 가이드는 로리를 발견하자 마자 쉽게 알아들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 순간, 로리의 귓가에 울려퍼진 한 마디가 그녀의 귓가를 관통한다. "비욘"(björn: 스웨덴어로 곰)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던 북극곰은 공교롭게도 로리가 가장 불운한 순간에 찾아온다.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이들로부터 회피하려고 발악하던 로리는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저 멀리 응시하는 야생의 눈동자를 확인한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있던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북극곰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정말 뜻하지 않은 순간에 성취한다. 그렇게 황급히 숙소로 복귀한 다음날, 경찰서로 로리가 연행되면서 다사다난한 나홀로 여정은 여기서 끝이난다. 과연, 그녀는 아무런 성과 없이 이대로 귀국할 것일까? 물론, 어디까지나 '나홀로' 여행은 끝났을 뿐이다. 그 시각, 어머니가 출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답변은 그리 어렵게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의미없는 가정을 시도한다. 몇번의 가정을 거친 끝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도 태어나지 않았을텐데라는 마무리와 함께 은연 중에 현재를 거부하는 자기비관이다. 서두를 장식하는 로리의 거듭되는 의문은 망자를 향한 남아있는 자들의 죄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의 부산물이다. 어머니와 달리 의연한 태도를 견지한 로리 역시 다른 의미에서 아버지의 상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함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아버지의 유골함과 함께 떠나는 북극 여행은 망자를 향한 그녀만의 애도의 방식이지만, 동시에 부정하고 싶은 상실의 아픔을 어떤 식으로든 회피하고 싶은 의지 또한 기저에 깔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으로부터 촉발된 북극 여행은 로리의 반쪽자리 애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환임에 다름이 아니다.

 

그간 로리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망자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지난 시간에 준하는 애도 기간을 거쳐야만 한다. 로리가 아버지의 유골함과 함께 북극으로 떠나는 여정이 바로 그렇다. 상실과 슬픔,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까지 경험한 끝에 그녀는 아버지를 진정 애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로리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이막스가 감동적인 이유는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망자를 기렸던 두 여자가 같은 마음으로 애도를 시도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한 남편으로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준 이를 향한 완벽한 애도는 생전에 그를 상징하는 모험과 도전정신이 깃든 공간에서 완성된다. 두 모녀가 탄 헬리콥터가 북극 상공을 유영하는 동안 로라가 뿌린 아버지의 유골이 북극이 아닌, 창공을 향해 날라가는 순간은 그녀들의 애도가 하늘에 있는 망자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이별을 진정 받아들일 줄 아는 순간, 비로소 애도는 성공하고 소녀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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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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