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의미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온 발자국을 따라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1인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그리는 '북극'의 의미
글 입력 2022.03.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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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온 발자국을 따라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주인공 ‘로리’가 지리 교사였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으로 가는 과정을 그린다. 로리의 아버지는 평생 북극을 탐험하는 것을 꿈꾸었다. 딸인 로리의 이름도 오로라(북극광)에서 따왔고, 로리에게도 북극을 탐험했던 많은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북극 탐험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로리의 아버지에게 ‘북극’은 어떤 의미였길래 그렇게 평생의 목적지가 되었을까? 연극을 보면서 어떤 존재가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김상욱, 『떨림과 울림(2018)』 中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된 것일까?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우주는 어떤 의도와 의미 없이 변화하고 움직일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결혼을 어떻게 했냐’는 농담 섞인 질문을 받자, 그는 자신 또한 ‘의미 없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아내 될 사람을 만났을 때 아무 의미 없는 우주에서 거대한 의미가 생겼다’며, ‘너를 만나기 위해 단세포 생물로부터 진화해 왔어’, ‘너를 만나기 위해 공룡이 멸종 했어’가 되는 것이라며 답했다.

 

이 방송 장면과 함께 연극을 보며 들었던 의문을 떠올려보니,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만들어 온 발자국을 따라가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더해 왔다. 로리의 말처럼, 북극은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다섯 가지나 존재할 수 있고, 그저 눈과 얼음으로만 뒤덮인 곳이다. 어쩌면 그런 북극이 우리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북극을 목적지로 삼았던 수많은 탐험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극에서 유독 로리는 자신 이전에 있었을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다. 로리는 로리와 로리의 아버지 이전에 북극으로 떠났던 수많은 탐험가들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누이트, 그리고 북극으로 떠나 돌아오지 못한 탐험가들을 기다렸던 탐험가의 가족들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져 온 발자국을 따라가는 로리의 여행은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비록 로리는 어쩌면 충동적으로 혼자 여행길에 올랐지만, 그동안 로리의 삶 속 수많은 여정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 내내 로리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하며 스스로 그 여행의 의미를 더해간다.

 

로리의 여행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많은 여정도 어쩌면 이러한 로리의 여행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온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시간의 스펙트럼 끝에 '그저 존재할 뿐'인 현재의 우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 의미를 주고 받아온 수많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이누이트의 사회에서 눈을 뜻하는 단어가 수백 가지나 있다는 이야기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해도, 눈을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따라 눈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에게는 출근을 불편하게 만든 장애물일 뿐인 눈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는 매개체가 되고, ‘로리’의 아빠에게는 사랑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의미’라는 것이 인간의 만들어낸 허구적인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이로 인해 배우고 성장하며 새로운 의미를 또 만들어 간다.

 

연극을 보며 특히 나의 존재에 의미를 더해 줬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스스로 선택해서 남겼던 발자국들을 생각해 보았다. 하나하나 소중한 존재들과 경험들이 떠올라 참 고맙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들이 있기에 또 새로운 모험과 여정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남긴 발자국도 누군가가 향하는 여정과 연결되며, 그것에 ‘의미’를 더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1인극이 선사하는 이야기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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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1인극이다. 1인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줄거리를 보았을 때, 북극까지 향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1인극으로 표현할지, 걱정되기도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1인극이라는 형식 때문에 더 풍부하게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인물들을 연기할 때 발성부터 표정까지 한순간에 바꾸어 내는 뛰어난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명의 화자가 존재하는 책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그동안은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못했던 음향에도 더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북극의 얼음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거대하고 고요한 북극이라는 공간이 와 닿았고, 바람소리나 북극곰이 등장할 때 나는 경보음 등을 들으며 긴장된 분위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연극을 ‘본다’기 보다는 ‘읽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장면 장면을 더 풍부하게 상상하고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장면이나 감정을 묘사하는 대사들도 굉장히 구체적이고 문학적이었고, 연기와 음향, 대사들로 인해 작은 무대를 넘어 새로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독특한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또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여성 배우 한 명이 모든 서사를 이끌어가는 1인극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정말 귀한 연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로에서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성 배우들이 더 다양한 역할을 맡고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다. 이 작품 또한 대학로 연극의 다양성을 높이는 의미 있는 발자국 중 하나가 되었으면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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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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