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로라가 이끄는 북극 여행에 초대합니다. -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글 입력 2022.03.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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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의 북극 여행을 준비하는 한 소녀가 있다. 랜턴, 지도, 털모자, 패딩, 간단한 식량, 지침서가 되어 줄 탐험가 난센의 책까지 가방에 꾹꾹 눌러 담고 외출에 나선다.


 
“아빠, 내가 꼭 북극에 데려다줄게.”
 


그 소녀의 이름은 오로라다. 그 반짝이면서 순식간에 하늘을 지나쳐 가는 북극광 말이다. 그런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그녀는 대신 ‘로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관객들은 약 90분 동안 로리의 북극 여행에 함께 한다. 로리가 집에서 출발해, 다시 돌고 돌아 안전히 돌아올 때까지 로리가 이끄는 대로, 로리가 느끼는 그대로 로리의 생생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춥지만, 오히려 마음은 따뜻해지는 착한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다. 오로라가 이끄는 북극 여행에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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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극여행; 아버지의 마지막 꿈



로리의 아버지는 지리 선생님이자 탐험가셨다. 로리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로리와 함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그 어딘가를 찾아 나서고 싶어 했다. 로리는 흰색 커튼으로 이글루를 지으며 소꿉놀이를 통해 아버지에게서 북극,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아빠와 함께하는 모험을 꿈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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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로리와 엄마의 품을 떠난다. 정말 하룻밤 사이에 남편이 사라진 부인은 딸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힘들어하고, 로리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유골함만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게 된다. 로리는 아버지가 화장된다는 소식도 모른 채, 기다리다가 갑작스럽게 조그마한 통에 담긴 뼛가루가 된 아버지를 손에 쥐게 된다.  자신에게 말도 없이 화장시켜버린 엄마를 원망하며 어떻게 아버지를 정리할지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되물어본다. 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엄마는 나중에 하자고,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하고 자신의 마음을 감싸기 바쁘다.


큰 키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나의 한 품에 들어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조그만 유골함에 들어간다는 게 어린 로리로서는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선산에 가면 묘지마다 돌아가면서 절을 올렸었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큰아빠의 유골은 납골당의 아주 조그만 정사각 공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아래 좌우 모두 일면식도 없는 유골함 사이에 끼워진다는 게 싫었고 벽 한 면에 수백 명이 잠들어있는 납골당이 너무나 섬뜩하게 느껴졌었다. 엄마에게 왜 선산 땅에 묻어 묘지를 만들지 않았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한다는 답을 듣고는, 그래도 할아버지 옆에 묻어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 속상해했다.

 

화장시키는 기계엔 수백 수천 명의 고인들이 다녀갔을 테니 아무리 청소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그 가루가 섞이지 않을까 걱정하던 로리의 이야기처럼 나도 ‘화장’이라는 방법이 싫었다. 어렸을 때의 나와 로리는 같은 생각을 하며 인생의 끝, 죽음을 쓰디쓰게 맛보았다. 유족에게 남겨진 빈자리는 너무나도 큰데, 정작 사람은 한 손으로 들 수도 있을 만큼 작은 유골함으로 남겨진다니,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게 아직 로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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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는 아버지의 유골함이 식탁에 올려져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미워, 유골함을 품에 안고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간다. 책상 위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니, 버킷리스트가 적혀있다.

 

 
“로리와 북극여행 가기”
 


북극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 적혀있었고, 가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위해 쓸 필수 단어 목록엔 “딸”이 있었다. 이에 로리는 결심한다.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에 도착해 아빠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뤄주기로!

 

 

 

2. 북극여행; 로리의 성장기



연극에서 북극 여행 과정을 이야기해주는 로리를 따라가다 보면, 로리가 느낀 것들, 체험한 것들,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세세히 느낄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살아생전 마지막 꿈을 이뤄주기 위해 북극 여행을 떠난 것이긴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는 로리라는 어린 소녀가 처음으로 혼자 밖에 나와 자신 앞에 놓인 위기 혹은 일들을 해결해가는 ‘성장’이 녹아있다. 그리고 그 성장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다.


홀로 떠난 여행은 로리 자신에 대해 인지하고, 세상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북극을 가기 위한 경유지 노르웨이에서 박물관을 둘러보고 공원에 앉아있다가 현지 또래 친구들과 말을 섞게 된다. 전형적인 북유럽 미남 스타일이던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오늘 밤 열릴 파티에 초대하고 그가 마음에 들었던 로리는 그들을 따라가 술을 마시고 파티를 즐긴다. 결국 그녀는 안드레아스와 대화를 나누다 그의 집에서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해하던 그녀는 그의 능숙한 손길에 따라 첫 경험을 한 뒤, 솔직하게 그 심정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사실, 아빠의 유골함이 든 가방을 안드레아스 차 트렁크에 두고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밤을 보내는 전개에 거부감이 들었다. 굳이 왜 이런 이야기로 흘러가나 싶었고, 사랑에는 수많은 표현과 방식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처음 온 도시에서 처음 본 남자와의 사랑을 선택해 연출한 이유가 잘 와닿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위험이 수반되는 선택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기에 이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나 낯설고 극이 끝날 때까지 몰입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까지 작용하기도 했다.


극이 끝난 뒤, 곰곰이 로리의 북극 여행을 곱씹어보며 로리의 첫 경험에 대한 상징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로리의 성장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위해 필요한 목적을 둔 장치인 듯싶다. 한없이 어리게 느껴졌던 로리는 사실 어른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는 위치이기도 했고, 남자와의 사랑은 난생처음 겪는 경험들을 함축해 표현할 수 있는 소재였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하룻밤보다 더 복잡한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건이 있을까 싶다.


북극 여행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로리에게 첫 경험이었다. 혼자 가출해본 것도 처음이고, 다른 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정말 탐험가가 된 것처럼 구체적인 계획 없이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 것도 처음이다. 더구나 아빠의 유골함을 고이 가방에 숨겨 넣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미성년자인 로리가 밥과 숙식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모두를 일일이 관객들에게 전할 순 없으니 모든 것이 처음인 로리의 그 무모한 과정의 대표적인 이야기로서, 처음 본 남자와의 하룻밤을 선택해 묘사한 것 아닐까?


극이 시작되고 로리가 하는 첫 대사는 자신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대사이다. 자신의 아빠는 죽었고, 아빠는 퇴근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보다 그 전엔 자신인 딸 로리를 낳았고, 그 전엔 엄마와 아빠가 만났다는 식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초를 찾아가 보는, 다소 황당한 시작이다. 그러한 비슷한 방식으로 그녀는 첫 경험을 하고 곤히 잠든 남자를 옆에 두고, 침대에 누워 엄마도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며 수백 수천 명의 여자들이 이 천장을 바라보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엄마를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여자가 보냈을 밤을 상상해본다. 이러한 성행위가 없었더라면, 이어져 오지 않았을 인류와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해가 밝자 먼저 조용히 안드레아스의 집에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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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건 안전장치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건과 로리가 느낀 감정들을 절대 미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지막이 아직은 미성년인 로리가 느낀 감정들을 말한다. 피가 침대에 묻었고, 아팠고 다른 세계로 간 것같이 눈이 돌아있는 상대 남자에 대해 약간의 무서움을 느끼던 도중에 끝나버렸다고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 황홀함은커녕 허무함이 살짝 느껴지는 로리의 대사를 통해 그녀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고, 사람 간 사랑과 여러 가지 싹트는 감정에 대해서 하나둘 알아감을, 성장해감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숙한 로리는 눈물조차 별로 나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도 아니었기에 무모하게 아버지의 유골함을 몰래 들고 나가 아빠와 함께 하는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여행 중에도 지금 아버지가 옆에 있다면 아버지는 무슨 말을 했을 거라고 자연스럽게 상상하면서 점점 아버지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갈 무렵,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버지가 그렇게도 염원했던 북극으로 그를 고이 보내주며 눈물을 흘린다. 점점 세상에 대해 알아가며, 누군가를 향한 사랑, 그리고 삶에서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로리가 되어간다.

 

 

 

3. 북극여행;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들



자칫하면, 이러한 위험한 도전과 선택으로 연결되는 이 이야기의 흐름 때문에 로리의 마음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화제성에 몰두 되어 극의 의도가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가출한 소녀’로 시작해 그녀가 만들어나가는 상황들은 정말 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무모하다. 첫 경험은 물론, 모르는 사람의 차에 타서 그의 숙소까지 같이 가서 음식을 얻어먹고, 북극곰이 나타나 사이렌이 울려 퍼지는 위험 지대에서 유골함을 들고 얼음 위를 달려가는 그녀는 어른의 시각에서 보기에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는 골칫덩어리 아이일 뿐이다.


단편적으로 이 사건들을 나열해 보여줬더라면, 관객은 집중력을 잃고 드라마의 고구마캐릭터를 보는 것처럼 짜증을 내거나 답답해하며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본질은 흐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극은 1인극으로 로리가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로리가 체험한 그 감정 그대로를 전달받을 수 있다. 여행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로리가 흉내 내 표현하고, 여기 앉아있는 관객들에게 실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소통한다. 자신이 겪은 사건들,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녀가 진심으로 아빠를 향해 눈물을 흘리고 그를 보내주기까지의 감정을 물 흐르듯 따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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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 가보지 않은 내가 북극에 간 것처럼 이 극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섬세하게 그리고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이 본 것들을 표현해주는 로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극을 실제로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잡고 최대한 이를 전달해내고 싶어 하는 배우의 연기가 이를 가능하게끔 만든 것 같다.


지구 온난화와 환경 악화로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북극에 대한 사실들을 간간이 말해주면서 내가 현실에서 알고 있는 그 북극과 이 연극 속의 북극을 동일시하게 만들고, 어린아이가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을 극대화해 표현하는 대사들을 통해 다른 시야에서 북극 여행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이글루 모양처럼 네모 조각이 둥근 반원을 이루는 무대와 그 안 영롱하게 빛나는 얼음 조각들까지. 객석에 들어앉으면 조그만 극장이 아늑한 이글루로 바뀌어 우리를 이끄는 로리와 함께 춥지만 따뜻한 북극 여행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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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는 우여곡절 끝에 아빠를 무사히 북극으로 보내준다. 극에서는 숱한 위험과 고난이 있었지만, 로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안전히 로리가 다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어린 청소년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 공항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프리다가 공항에서 그녀를 차에 태워 안전한 숙소에 함께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호의와 걱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끝까지 북극 여행을 마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이 있었기에 연극에서의 로리는 무사히 어머니를 다시 만나 헬리콥터를 통해 북극을 투어하며 하얗고 하얀 얼음으로 가득한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함을 꺼내 아버지를 보내드린다. 그녀가 북극까지 갈 수 있었던 여정에는, 프리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그녀가 북극 여행을 통해 많은 것들을 얻고,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큰 절망을 굳게 딛고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을 모든 사람의 희망, 연대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누이트어로 눈을 뜻하는 단어는 수백 가지나 된다는 설은 사실 잘못된 이야기다. 그런 단어들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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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센이 사랑이란 삶의 눈과도 같다고 말한 것처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의 눈과 같은 존재는 수없이 많다. 하얗고 순수하게 소복이 쌓여가는 삶의 눈은 우리의 아픈 곳을 아물게 하고, 다시 미소 짓게 한다. 그 단어는 사랑이며, 희망, 연대, 안정감, 사람, 일상의 힐링, 행복, 휴식이다. 수백 가지가 넘는 눈을 뜻하는 단어들을 삶에서 경험하고 만나면서 올곧게 나아가는 로리를, 나 자신을, 이 세상 모든 오로라를 응원한다. 오로라가 밤하늘을 하나의 명작으로 탄생시키는 것처럼 이미 나 자신도 누군가에겐 삶의 눈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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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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