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탐험의 시작은 말이야 [영화]

사랑하는 패딩턴에게, 넌 대체 어디서 왔니?
글 입력 2022.03.08 15:2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영화 <패딩턴>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크기변환]1.jpg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인간들 틈에 웬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가?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하얀 털옷이 아니라 빨간 모자와 파란 코트를 입은 귀여운 아기곰. 유감스럽게 인형도 아니고 반려동물도 아니다. 그럼 이 요상한 조합은 대체 뭐냐고? '가족'이다. 다소 불친절한 설명에 호기심이 고개를 쳐든다. 저 아이는 대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인간들과 가족이 된 걸까?


폴 킹의 영화 <패딩턴(Paddington)>(2014)은 탐험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탐험가는 머나먼 페루의 숲을 탐험하다가 여태 발견되지 않았던 곰을 발견하고, 탐험가와 곰들-루시와 패스투조-은 친구가 된다. 이후 머나먼 페루 숲 속에서 루시와 패스투조는 꼬마 곰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런던 여행을 갈 수 있길 바라며 말이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패스투조는 실종된다. 루시는 ‘목에 푯말을 걸고 지하철역에 있으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으며, 꼬마 곰만 혼자 런던으로 향하는 배에 태워 보낸다.


하지만 무작정 런던으로 향한 꼬마 곰에게 사람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꼬마 곰은 “이 곰을 돌봐주세요. (PLEASE LOOK AFTER THIS BEAR. THANK YOU)”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있다. 다행히 브라운 가족(매리와 헨리, 그리고 이들의 딸 주디, 아들 조나단)이 꼬마 곰을 발견하고, ‘패딩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그를 돕기 위해 집으로 데려간다.


이 정도면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 독특한 이력을 좀 더 파헤쳐 보고 싶다. 다시, 이 모든 것의 시작인 '탐험'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그 시절, 탐험


 

[크기변환]패딩턴 탐험.png

 

 

<패딩턴>은 영국 탐험가의 내레이션과 흑백 탐험 영상으로 시작한다. 탐험 장소는 '머나먼 페루' '광활한 자연이 베일에 싸여 있는 곳'이다. 탐험 장소가 '낯선' 곳임을 부각하기 위해, 지구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쇼트, 자연 풍경 쇼트가 이어진다. 탐험가는 앞으로 펼쳐질 그의 위대한 여정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탐험가 협회 앞에서 사진을 찍고, 비행기를 타고 탐험길에 나선다. 이 탐험을 위해 꼭 필요한 것만 챙겼는데 지도, 식량, 괘종시계, 피아노 등이 그 예다.


그러다 영국 탐험가는 페루의 숲에서 “박물관 표본으로 딱인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곰”을 ‘발견’한다. 탐험가는 곰을 박물관에 박제시키기 위해 공격하려 하지만, 오히려 곰이 탐험가를 살려주는 일이 벌어진다. 곰은 흔쾌히 탐험가를 자신에 집에 초대하고, 탐험가는 그 보답으로 '문명'을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곰들은 망원경을 방망이처럼 휘두르고, 카메라의 플래시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비누를 입에 넣는 '순수한' 혹은 '원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탐험가는 곰들이 '말'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워한다. 그렇게 탐험가는 곰들에게 언어(영어)를 전해주고, 이들에게 ‘루시(탐험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와 ‘패스투조(콧수염이 멋진 복서 이름)’라는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오프닝 시퀀스는 자연스레 영화사 초기의 '탐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탐험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짧게 설명을 하자면, 서구 근대의 인식론 및 시각 변혁의 틀 위에서 '영화'가 탄생했고 그 주도권 역시 서구가 점했다. 20세기 유럽 열강들은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경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당시 영화 제작을 많이 하던 국가들 또한 대개 식민지를 두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레 영화 제작 경향에 영향을 미쳤다.


제작 지원을 받으려는 영화사와 자본가(권력자)가 결합하여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강대국들의 식민지 촬영이 이어졌다. 카메라는 구경거리를 찾아 전 세계 곳곳을 누볐고, ‘미개인의 기이한 풍습’류의 짤막한 기행 영화가 등장한다.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원주민에 관해 매력적이고 기이하게 때로는 신비하게 묘사하는 한편, 원주민들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보호와 지배에 순종하는 편이며 오히려 미개국을 개화시켜 주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에릭 바누,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 36쪽.)”


하지만 이러한 다큐멘터리 작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듦에 따라, 제작자들은 '탐험가'로서 작품을 찍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자본력, 배급력, 기술력을 갖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 미개발지를 탐험하는 1920년대 탐험 영화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로버트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1922), 메리안 쿠퍼와 어네스트 쇼에드색의 <초원(Grass)>(1925) 등이 만들어졌고 큰 인기를 끌었다.

 

 

[크기변환]image01.png

 

  

이러한 탐험 영화에도 당시 서구의 근대적 시선(주체-타자의 이분법적 인식)이 짙게 묻어난다. 탐험 영화의 대표격인 <북극의 나누크>는 한 이누이트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생활상을 화면에 담아내고자 하였고, 사냥꾼 나누크가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해당 영화는 지도의 위치를 알려주는 영상으로 시작된다. 전체 지도에서 촬영 대상이 사는 공간으로 좁혀 들어가며, 앞으로 살펴볼 곳이 문명과는 동떨어진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크기변환]image02.png

 

 

영화에서 나누크의 모습 또한 미지의 세계 속 순수한 원시성이라는 맥락에서 재현된다. 나누크는 싱글벙글 웃으며 축음기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레코드를 깨물어 보기도 한다. ‘문명’을 처음 접한 ‘원시인’의 모습이다. 나누크의 아이들이 피마자 기름의 냄새를 맡으며 카메라를 향해 살짝 웃음 짓고 있는 장면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구의 문명을 접한 이들은 마치 어린아이 같이 순수해 보인다. 또한 나누크는 영화를 위해 자신이 평소에 쓰던 총 대신 전통 창을 들고 사냥을 했다. 벽이 뚫린 이글루 세트가 지어졌고, 가짜 부인이 캐스팅되었다.


필요와 낭만에 의해 실재와 허구가 뒤섞였지만, 이를 보는 관객(서구인)은 모든 것을 사실로 여겼다. 영화는 문명 세계와는 다른 원시적인 생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누이트족의 삶을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낭만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영화를 통해 나누크를 바라보는 이들(서구인)에게 원주민의 삶은 시공간적으로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나누크는 그저 미적으로 숭배되는 대상으로서의, 고귀한 야만인일 뿐이었다.

 

 

[크기변환]image06.png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영화 <초원>은 50,000여 명에 이르는 유목민이 가축의 먹이인 풀을 찾아 터키와 페르시아에 걸쳐 있는 자르데 쿠흐산맥을 넘는 장정을 포착한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구인이 등장한다. 위 이미지의 왼쪽부터 해당 이주 기록을 생각해 낸 탐험가 메리안 쿠퍼, 카메라로 이를 기록한 어네스트 쇼에드색, 이 기록 여정에 함께 참여한 작가이자 여행자인 마거릿 해리슨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잊혀진 이들(유목민)을 목격하고 찾는 존재다. 영화에서 발화자는 서구인이다. 즉, 서구인의 눈에 비서구인이 어떻게 비쳤는지에 대해 묘사한다.


<초원>은 <북극의 나누크>와 마찬가지로, 지도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알려주는 영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영상이 함의하는 바는 카메라에 담긴 곳이 문명과는 동떨어진 원시의 세계라는 것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이국적인 사운드 또한 비서구인들의 '야만성'과 '원시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묘사는 서구인 화자의 자막 내레이션에 의해 잘 드러난다. 화자는 유목민에 대해 ‘고대의 삶(ancient life)’, ‘삼천 년 전의 삶(The life of three-thousand years ago)’이라고 묘사한다. 즉 서구와 비서구의 삶의 형태 차이를 ‘지식의 격차’로 인식하며 비서구인이 열등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서구인 화자는 유목민들의 삶의 형태를 이미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막 내레이션을 통해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맨발로 눈 위를 헤쳐!”, “눈 위에 낙타가!”, “"살아있는 송아지를 등에 업은 소녀!” 등이 그 예다. 또한 유목민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염소 가죽을 부풀려 뗏목 밑에 장착하고, 뗏목은 강 위로 떠오른다. 서구인 화자는 이에 대해 놀라워하며 “포장마차 시대의 개척자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단순히 놀라움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앞서 논했듯 화자는 비서구인이 제한적인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이러한 자막은 조롱조로 다가온다.


또한 <초원>에서 대규모로 등장하는 유목민들은 하나의 집합으로 등장한다. 물론 일부는 이름이 붙여진 존재로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하나의 무리(horde)로 연출된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찍은 것이 아니었기에 관객들에게는 그냥 한 무리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해 말을 할 수 없고, 서구인의 해설에 의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유목민들 개개인의 인간성을 앗아가고, 관객이 이들과 관계 맺기 어렵게 만든다.

      

 

[크기변환]image07.png

 

 

더 나아가 <초원>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은유의 원천으로 삼아 차별적 태도를 표현한다. 인간의 ‘동물화’다. 위 이미지는 “모두들 저녁 시간!”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이어지는 컷들이다. 해당 자막의 원문은 ‘everybody’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뒤에 바로 등장하는 건 새끼 동물이 젖을 먹는 컷들이다. 이후 유목민이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동물들의 젖을 짜는 장면이 등장한다. 해당 장면은 동물과 유목민들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엮는다.


영화는 때때로 동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기도 하고, 앞서 말했듯 유목민들을 하나의 집단(horde)으로 연출하면서 그 안에 섞인 무수히 많은 동물 또한 함께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는 보는 주체(서구인)과 보여지는 대상(유목민)을 가르고, 대상의 원시성, 열등함 등을 부각하는 명료하고 생생한 이미지가 된다. 영화에서 비서구인들은 (혐오의 맥락에서) 동물과 결부됨과 동시에 원시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 시절 탐험 영화에서 보는(말하는) 존재와 보여지는(말해지는) 존재의 구분은 뚜렷했다. 재현 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북극의 나누크>는 주체(서구)의 시선으로 타자(비서구)를 ‘숭배’하는 식으로, <초원>은 주체(서구)의 시선으로 타자(비서구)를 ‘혐오’하는 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러한 시선은 그 너머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 이주
 

[크기변환]common.jpg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지만, 영화 <패딩턴>의 오프닝 시퀀스를 이러한 탐험 영화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패딩턴>은 한 영국 탐험가의 내레이션과 흑백 탐험 영상으로 시작해 원시적 공간(머나먼 페루, 광활한 자연이 베일에 싸여 있는 곳)에서 ‘동물(곰)화된 인간’을 포착한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곧이어 흑백 영상과 과거의 화면비는 지금 이 시대의 컬러와 화면비로 전환되고, ‘곰’이 영화의 발화자가 된다. ‘곰’인 패딩턴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 ‘문명’으로 표상되는 런던에 당도하며,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런던에서 패딩턴은 이주민이자 이방인이다. ‘곰’인 ‘패딩턴’이 런던이라는 서구 문명(주류 세계)에 편입되는 방식은 ‘언어’다. 그를 수식하는 ‘말하는 곰’의 전제는 ‘곰은 (열등하기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곰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서구의 언어가 기준이 된다. 주류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타자의 언어와 목소리는 통용되지 않는다. 타자가 무언가를 말할 때, 주류적 가치에 선 이들은 낯선 언어에 놀랄 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소수자들이 주류(지배) 언어로 말하길 요구한다.

 

 

[크기변환]패딩턴 이름.png


 

영화에서 “이름이 뭐니? 곰도 이름 있지? (What your name? Do bears even have names?)”라고 묻는 헨리에게 패딩턴은 곰의 언어로 답한다. 하지만 헨리는 낯선 ‘곰’ 언어(소리)에 놀랄 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숙하게 말을 흉내 내지만 이는 왜곡되어 무례한 표현이 될 뿐이다. 이후 패딩턴은 자신의 이름은 발음하기 힘들 거라고 말하며, 매리가 지어준 ‘패딩턴(꼬마 곰이 발견된 역 이름)’이라는 이름을 기꺼이 받는다. 앞서 언급한 ‘루시(탐험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와 ‘패스투조(콧수염이 멋진 복서 이름)’ 또한 같은 맥락이다.

 

 

[크기변환]스플래쉬 이름.png


 

론 하워드의 <스플래쉬(Splash)>(1984)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알렌(미국인, 뉴욕 거주)은 물 위로 올라와 인간이 된 인어에게 “당신 이름이 뭐지? (What’s your name?)”라고 묻고, 이에 인어가 영어로 말하기 어렵다고 답하자 “당신 언어로 말해봐요. (Well, just say it in your language.)”라고 말한다. 이에 인어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만, 알렌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 ‘screech’, 즉 낯선 언어(소리)의 출현으로 들릴 뿐이다. 알렌은 인어에게 ‘메드슨(당시 지나가던 거리 이름)’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1719)에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영국인)가 표류한 섬의 원주민으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로빈슨의 충실한 하인으로 거듭난다. 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은 로빈슨이 원주민에게 부여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둘이 금요일에 만났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속한 주류 세계의 기준에 따라 원주민은 ‘프라이데이’가 된다. 그가 크루소와 만나기 전에 불렸을 이름은 박탈당해 사라진다. 크루소는 그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복종과 충성을 약속받는다. 소설에서 원주민의 언어나 문화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이방인의 언어는 ‘이해 불가의 낯선 것’으로 제시되고, 이는 '이름 짓기'에 합당한 원인이 된다. 그렇게 세계는 '덜 낯선' 언어로 가득찬다. 마치 성서에서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 나간 것처럼 말이다.

 

 

[크기변환]267600fb-d29c-494e-9921-ecf6343062c3-2060x1236.jpeg

 

 

런던으로 건너온 이방인 패딩턴을 대하는 주변의 태도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인 밀리센트는 ‘희귀한 존재(말하는 곰)’인 패딩턴을 ‘박제’시키려 한다. 밀리센트에 따르면 박제는 대상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의 상징이자, 그 대상은 탐험가의 발견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된다. 박제품은 이러한 사실(탐험가의 발견)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하나의 상징적 수단, 살아있는 생명체의 대상화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러한 박제는 낭만화되어 그 이면의 권력관계를 감춘다. 장기를 제거하고 방부 처리되어 그저 생생하고 아름다운 박제품은 대상에게 가해진 도살의 과정을 누락시킨다.


또한 브라운 가족의 이웃인 커리는 ‘자신보다 못한 존재(런던 토박이가 아닌 머나먼 페루에서 온 곰)’ 패딩턴을 혐오하기에 “우린 곰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We don't want him here.)”라고 말하며 제 눈 밖으로 치워버리려 한다. 영화 속에서 밀리센트와 커리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한패가 되는데, 이는 숭배와 혐오가 대상화(타자화)라는 하나의 전략 아래 공모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패딩턴 2>에서 패딩턴이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가는 과정 또한 우리가 이방인(타자로 상정되는 이)을 대하는 방식을 닮았다.


하지만 <패딩턴>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이 영화를 사랑할 수 없었을 거다. 탐험에 시작이 있다면, 그 뒤에는 분명 시작과는 다른 끝도 있으니까 말이다.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에릭 바누,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 다락방, 2000.

 

 

 

20201231173442_odvpzfke.jpg

 

 

[최은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45946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