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창작자에게 좋은 문화란

글 입력 2022.03.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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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밥을 먹을 때 텔레비전을 틀어놨었다. 딱히 방송에 집중하는 건 아니고, 적적하지 않을 정도의 소리가 들리는 걸 좋아했다. 이젠 텔레비전의 역할이 유튜브로 바뀌었다. 밥을 다 먹는 시간과 비슷한 길이의 영상을 틀어놓는다. 예능, 드라마, 혹은 영화를 이어보기도 한다. 유튜브는 16부작 드라마를 한화에 10분 내외로 요약하는 기적을 보여주었고 나 역시 그 기적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예능, 드라마, 영화가 ‘밥 친구’로 모두 적절하지는 않다. 심오한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콘텐츠, 혹은 지금 하는 행위를 잊을 정도로 빠져드는 작품을 식사하면서 보기는 어렵다. 아마 난 그저 가끔 들리는 소리에 슬쩍 웃고 마는 정도의 작품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집중해서 한 작품을 읽거나 볼 때면 수 없는 감정 소모와 몰입이 일어난다. 나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인데 한 소설을 읽고 일주일 내내 정신이 멍해 있기도 했다. 나는 그 멍함을 즐겼고 그 지점에서 영감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조금 다르다. 힘들게 수업을 듣고 나서는 에너지 쏟는 일을 하기가 싫었다. 현실에 치일 때면 ‘사이다’ 전개를 바라는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했다. 퇴근하고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만히 보기만 해도 적당한 작품을 점점 찾게 되었다.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은데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해지는 작품을 본다면 기절 직전까지 몸과 마음이 너덜거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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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이 더 나은가. 큰 감정 소모 없이 재밌는 스낵 콘텐츠인가, 아니면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인가. 당연히 이 물음은 좋고 나쁨으로 답할 수 없다. 사실, 소비자들조차 완전히 구분하기 쉽지 않다. 시집을 읽는 독자가 웹 소설을 읽기도 하고, 시트콤을 보던 시청자가 독립영화를 보기도 한다. 소비자는 취향의 따라, 상황에 따라, 혹은 그날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소비하는 작품을 바꾼다.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러나 문화를 창작해야만 하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어려움에 부딪힌다.

 

예컨대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린 <오징어 게임>의 경우,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서사, 장치, 배경, 규칙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익숙함 속에서도 수많은 대중이 열광했다. 돈으로 밑바닥까지 가는 인간의 모습과 흥미를 유발하는 게임에서 인물 개인의 서사가 합쳐져 수많은 공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의문을 품겠지만, 이 작품이 그 무엇보다 성공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인가. 예술성과 재미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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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례로, 최근에는 ‘사이다’ 레퍼토리가 인기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 웹 소설에서 ‘사이다’ 전개는 공식이 되었다. ‘참교육’이라는 말로 소비자는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이젠 답답한 캔디형 주인공은 ‘고구마’가 되고 최근 작품에서는 그들이 옳지 않았다고 증명하려 한다.

 

‘참교육’이 유행하면서 ‘사이다’는 더욱더 정교해져야만 했다. 권선징악만의 의미만이 아니다. 잘못을 저리는 쪽은 마지막까지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만 진정한 사이다가 된다. 이를 위해서라면 옳은 방법이 아니더라도 서슴없다. 심지어 그 이야기 속에는 어떠한 조작의 흔적이 남아서도 안 된다. 인위적인 사이다는 다시 외면받는다. 조금의 고난이 생겨도 소비자는 ‘고구마’라고 말하며 새로운 사이다 전개를 찾아 떠난다.

 

‘사이다’와 ‘참교육’의 이야기가 예술적으로 아름다운가. 누군가는 이를 대중문화를 천박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는 건 허구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좋아하는 문화는 좋은 문화인 걸까?

 

수많은 기준에서 좋은 작품, 좋은 문화의 의미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수많은 자기검열 속에서 대중의 흥미까지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명작이라는 평을 받았던 단편소설은 현대에 남성 중심 문학으로 비판을 받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품의 주제가 후에 주목 받기도 한다. 수작이 졸작으로, 졸작이 수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역주행’이라는 말로 과거 작품이 재평가받는 일이 늘어나면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현재의 평가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창작자는 대중성과 개성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니 그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나 역시 창작자지만, 내 작품이 어떤 결말에 이를지 알 수 없다. 그저 대중 혹은 한 사람의 흥미를 이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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