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왜 능소화인지 아시나요?

삶이 끝나지 않는 한여름 같을 때
글 입력 2022.02.22 23:10
댓글 16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에게는 작은 소원이 있다. 언젠가 마당이 생기면 꼭 직접 꽃을 심는 것. 꽃을 심는 사람들의 마음이 늘 궁금하다. 심자마자 꽃이 피는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씨앗을 고르고 마당에 심기까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기 어렵기 마련이지 않나. 새싹 하나 보이지 않는 그 꽃의 만개를 상상하며 땅에 꾹꾹 심는 마음을 알고 싶다. 아마 꽃을 심는 사람들만 알겠지. 그게 질투가 나서라도 꼭 심고 싶다. 나도 그 마음을 알아야겠어. 심는 마음은 모르는 주제에 무슨 꽃을 제일 먼저 심을지는 이미 정했다. 이 글은 그 꽃에 관한 이야기다.

 

벚꽃, 진달래 등 온갖 봄꽃이 다 지고 세상이 초록색으로 물들 때쯤, 능소화가 핀다. 핀다는 말보다 주렁주렁 열린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능소화는, 주황빛의 덩굴나무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본 적이 있겠지만, 그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능소화는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이름이 왜 능소화여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내가 이 꽃을 사랑하는 이유다.

 


KakaoTalk_20220222_232240196.jpg

 

 

 

凌霄花


 

능소화는 ‘업신여길 능’, ‘하늘 소’자를 쓴다. 즉,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꽃의 이름치고는 꽤 거친 이름인데, 대체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그 답은 능소화의 개화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능소화는 7월부터 9월에 피는 꽃으로, 만개 시기는 한여름인 8월이다. 꽃이 8월에 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8월은 장마와 태풍, 그리고 푹푹 찌는 더위가 도사리고 있는 달이다. 그러니까, 자라나는 식물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시기다. 능소화는 그런 때에 핀다. 장마와 태풍을 견뎌내고 핀다. 궂은 날씨를 퍼붓는 하늘을 업신여기듯 피어난다고 해서 능소화인 것이다. 이름의 의미를 알고 나니 능소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난리 쳐봐라. 나는 피어나고 말지.’

 

여름 내내 깨끗하고 오롯하게 피어 있으면서 그런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처음엔 놀랐고 그다음엔 부끄러웠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나. 나는 나의 발걸음을 막는 것들에 콧방귀를 뀌고 유유히 걸어간 적이 있었나. 부슬비에도 겁을 먹곤 숨어 버리고, 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호들갑을 떠는 나에게 능소화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었다. ‘피할 수 없음 즐겨라’도 아니고 ‘맞서 싸워라’도 아니고 ‘코웃음 쳐라’ 라니. 그 쿨한 마인드가 그대로 담긴 이름과 그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리는 그 붉고 커다란 꽃을 알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훗날 마당에 심을 꽃을 능소화로 정한 것도, 능소화가 피는 여름을 봄과 가을, 겨울 내내 기다리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KakaoTalk_20220222_231942299.jpg

 

 

 

지는 건 지는 게 아냐


 

‘지다’의 반대말엔 ‘피다’와 ‘이기다’ 두 가지가 있다. 꽃은 보통 전자의 주어다. 후자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쓴다. 그런데 능소화는 예외다. 능소화는 피기도 하며 이기기도 한다. 그것의 피어남은 그 자체로 승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능소화의 ‘지다’는 어떤 모양새일까. 얄궂은 방해에도 지지 않고 피어난 능소화는 떨어질 때도 저답다. 9월이 끝날 때쯤 능소화 덩굴 밑을 잘 보면 큼직한 붉은 꽃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능소화는 꽃잎 하나하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통꽃이 한 번에 툭- 하고 떨어져 나뒹군다. 여름 내내 수많은 방해를 이겨내고 피어나서는, 여름이 지나면 미련도 없이 떨어진다.

 

이는 비단 능소화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누구든 어느 날 활짝 만개했으면, 툭, 툭 떨어지는 날도 있는 게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진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낙화는 결코 패배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한 번에 툭 떨어지는 게 무서워서 얼마나 오랜 시간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 이처럼 떨어지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데, 나뒹구는 능소화를 보고 있으면 조금은 생기는 것도 같다.

 

꽃을 잘 피워내는 것만큼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온 힘 다해 무언 갈 해냈으면, 그 마무리도 잘 해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어느 시처럼, 가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마당에 후두둑 떨어져 있을 능소화도 기대가 된다.

 

 

KakaoTalk_20220222_232618410.jpg

 

 

 

삶이 끝나지 않는 한여름 같을 때


 

온 삶이 전부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위에만 먹구름이 껴 있는 것 같을 때. 닦아도 닦아도 땀이 계속 나는 것 같을 때. 삶이 영영 끝나지 않는 한여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우리의 능소화를 떠올리자. 까짓것 나를 짓누르는 하늘을 능멸의 눈빛으로 쳐다봐 주자. 그리고는 그저 한 뭉텅이의 꽃을 턱, 피워 내면 된다.

 

끝으로, 한줄기 넝쿨 위로 주렁주렁 피어나는 능소화처럼 우리도 하나의 넝쿨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이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로는 다시 한번 하늘을 비웃을 힘을 준다. 이 모든 것을 겪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것 자체만으로 또 한 철 이겨낼 용기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 함께 피었다가 우리 함께 떨어져요. 그리고 그다음에 다시 피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또다시, 여름이 온다. 능소화의 시간이다.

 

 

[김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6
  •  
  • 여동
    • 좋은글입니다
      저도 지금 너무힘든데 주위사람들이 도와줘서 버틸수있어요
      저 잘난맛에 살았는데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겸손하고성실히 살겠습니다
    • 0 0
  •  
  • 라자
    • 와 글쓰는 클라스.. 술술읽히네요
    • 0 0
  •  
  • 신도리코
    • 좋은글에 영감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0 0
  •  
  • 브리짓
    • 저도 좋아하는 여름꽃입니다.시집올때 친정아버지가 친구분께 부탁해서 능소화와 무궁화를 그린 액자를 주셨어요.
      슬픈 전설도 구전되어 오는 그런 꽃이랍니다.
    • 0 0
  •  
  • water.flower
    • 지금 저에게 꼭 필요한 글이네요.
      ‘우리 함께 피었다가 우리 함께 떨어져요. 그리고 그다음에 다시 피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잘 떨어지고 또 다시 피는 날까지 대체로 내내 행복하실길.
    • 0 0
  •  
  • 능소화
    • 요즘 길가에 예쁘게 핀 꽃이 궁금해서
      쳐보다 들어오게되었는데 필력에 감탄하고갑니다..
      다들 봄에 꽃을 피울 때 태풍과 바람을 이겨내고 피어서는
      떨어질 때는 미련없이 통꽃으로 떨어지는 능소화가 너무 좋아지네요
    • 0 0
  •  
  • 짱미
    • 좋은글 감사합니다
    • 0 0
  •  
  • 김수링
    • 길가에 핀 주황색 꽃이 너무 눈에띄어 이름을 찾아보니 ‘능소화‘였군요..게다가 이렇게 멋진 꽃 말 까지...! 끝나지 않을 한여름 더위도 언제그랬냐는 듯 끝이나듯이 능소화처럼 무더위 같은 힘든시기 꿋꿋하게 즐겨볼래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_^b
    • 0 0
  •  
  • 배롱나무
    • 옛날 어느시절엔 천민의 집안에서 능소화를 키우면 잡아다 참수를 할  만큼 양반가문의  귀부인 꽃으로 정했었다고 하네요 나무도 마음대로 못키우게 하는 악법이지요.
    • 0 0
  •  
  • 능욕화
    • 글이 멋집니다. 간직하고픈 문장이 많아요
    • 0 0
  •  
  • 실바람
    • 어느 글 하나 허투루 읽히지 않고 재밌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멋진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0 0
  •  
    • 좋은글 감사합니다
      능소화가 피는 날이 기대가 되네요
    • 0 0
  •  
  • 파도
    •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실 수가 있나요
    • 0 0
  •  
    • 너무 큰 위로를 받고 가요..
    • 0 0
  •  
  • 창성
    • 넘 힘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 0 0
  •  
  • sujoengluv
    • 너무 좋은 글입니다. 생각이 나 또 읽으러 방문했어요.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