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영화]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았고, 벼락치기로 찾아낸 꿈을 이야기했다
글 입력 2022.02.2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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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처음 만난 가오리를 평생 잊을 수 없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 한 장의 그림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느니, 한 권의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느니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말을 유치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가오리를 만난 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비로소 오래도록 멈춰 서 있던 내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 모에가라 장편소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中 52p


 

46세, 시시한 어른이 된 사토는 페이스북에서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연인 가오리를 발견한다. 평범함을 냉소하던 스물 무렵의 가오리는 어느새 평범한 행복에 미소지을 줄 아는 어른이자 엄마가 되어있었다.

 

촌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편과 임신을 축하하며, 두 아이의 돌 사진을 자랑하는 가오리. 사토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가오리는 환히 웃고 있었다. 페이스북을 스크롤하며 묘한 허탈감을 느끼던 사토는 가오리와 펜팔을 주고받았던 1995년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인연은 신문 귀퉁이에 있던 펜팔 모집 글로 시작되었다. 가수 오자와 켄지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가슴 설레는 편지를 주고받던 둘은 실제 만남을 약속하게 된다.

 

직접 그림 그린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독특한 취향, 셔츠가 멋있다는 말에 "여름에 셔츠를 유행시켜볼까 해서요"라며 아토피를 드러내 보이는 투명함... 가오리의 엉뚱하고 솔직한 매력은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빠르게 누그러뜨린다. 사토는 수줍어하면서도 때로 과감하고 자유로운 가오리의 면면들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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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사토에게 가오리와의 시간은 단잠 같았다. 막막한 현실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지만 오직 가오리를 생각하며 버텼다. 그녀가 들려준 미야자와 겐지('은하철도의 밤'으로 유명한 작가)의 이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라며 현재를 자조하는 사토에게 가오리는 "미야자와 겐지는 살면서 멀리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대. 계속 토호쿠의 시골 마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으면서 은하를 여행한 거야.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야"라며 위로한다.


다른 곳에 가면 나아질 거라는 사토의 막연한 기대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복에 대한 발견으로 바뀐다. 가오리와 함께라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눈을 뜨는 하루하루 말이다. 사토는 가오리가 옆에 있다면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가장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두 사람은 시부야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러브호텔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오직 서로에게 집중한다. 사토를 지배했던 좌절감, 갑갑함, 세상에 떳떳한 일원으로 편입될 수 없다는 두려움의 감정들은 이 공간에서만큼은 존재를 잃고 흩어진다.

 

우주 벽지로 꾸며진 작은 방은 그들의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그런 달콤함도 잠시, 둘은 2000년 1월 1일 아침을 마지막으로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 가오리는 "다음번엔 CD를 가져올게"라는 평범한 인사와 함께 사토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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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25년에 걸친 사토의 이야기를 일본을 뒤흔들었던 각 시기의 재난 상황과 엮어서 풀어낸다. 영화 속 무기력한 청춘들은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토와 술집에서 만난 수, 에클레어 공장에서 만난 나나세 등 등장인물들 모두 시대의 우울함에 압도당한 듯 살아간다. 그리고 영원할 것처럼 머물렀다가 예고도 없이 곁을 떠난다.

 

2015년, 사토는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와 이별한다. "내 시간 돌려줘"라며 분노를 쏟아내는 여자친구에게 사토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에도 사토는 여전히 일에 치여 산다. 국가적 재난은 자신과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이닥친 업무 해결이 인생 가장 중요한 문제인 양 살아간다. 그리고 결혼이야기가 오간 여자친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대지진 이후 결혼하는 사람 늘었다잖아... 뭔가, 평범하지 않아?"

 

2008년, 일본의 낙뢰 발생 횟수가 사상 최다를 기록한다. 사토는 창의력을 발휘해보려는 후배에게 "센스 같은 거 필요 없고 평범하게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2000년, 술집에서 '수'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난다. 가오리와 달리 수는 평범한 게 제일 좋다고 했다. 절망한 사람을 찾아내는 게 특기라는 말과 함께 사토의 삶에 성큼 들어왔던 수는 얼마 안 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1998년,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일본 축구팀은 3전 전패한다. 사토는 재현 cg를 맡은 사건 보도 자료에서 어느 겨울날 다친 자신의 손을 감싸주던 조폭을 발견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수도 없이, 그는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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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도쿄에서 사토는 기억의 심연으로 여행을 떠난다. 일상에 틈입하는 작은 추억들을 붙잡아 삶에 치열하게 아파했던 한때로 돌아간다.

 

가오리를 마지막으로 봤던 시부야 길목, 그녀가 일하던 인도 의류 잡화점 앞, 폐허가 된 러브호텔을 거쳐 서툴렀던 첫 만남의 장소에 다다른 그는 불쑥 차오르는 그리움에 도쿄 한복판을 미친 듯이 달린다.

 

살아오면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이들, 지금은 연락도 닿지 않고 얼굴도 흐릿한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때는 그토록 가까웠는데... 지금은 누굴 만나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남기고 간 온기가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건 아닐까.

 

"정말 평범하군". 영화는 사토의 마지막 대사로 끝을 맺는다. 평범하다는 말은 비로소 자조나 멸시가 아닌 안도감의 모양을 띠게 된다. 슬프지만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사토의 얼굴은 평범함의 한계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다.

 

어린 시절 꿈꿨던 자신이 되지 못한 모두에게, 자신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유여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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