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사랑, 두 번째 이야기

글 입력 2022.01.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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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1편 [언어의정원] 사랑과 이어집니다.


 

*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은 문화예술 작품에서 얻은 사유를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여러 단어들의 의미를 저만의 언어로 재정립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각 문화예술작품이 지나간 자리에는 생각의 씨앗을 심습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조그마한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글의 말미에는 열매로 맺힐 것입니다. 혹 열매가 되지 않더라도, 메말라있던 땅에 생동하는 힘을 느끼게 해준 씨앗들에게 감사하며 계속해서 심어나갈 예정입니다.

 

(시리즈 제목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에서 차용했습니다.)

 

 

 

근사한 사랑



늦은 저녁 리모컨을 손에 쥐고 채널을 돌리다 보면 우리나라는 마치 사랑 강국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전보다는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등장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로맨스 장르가 압도적이지요. 심지어 범인을 추적하다가도 느닷없이 키스를 갈기고, 집안을 풍비박산낸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천추의 한을 풀 듯 복수극을 꾸미다가도 다음 날이면 평화롭게 새가 지저귀는 침실에서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거리에는 죄다 사랑노래뿐입니다. 사랑에 빠지기 전 설렘을 노래, 사랑의 순간을 노래, 사랑 후 이별을 노래, 사랑 후의 찌질함을 노래…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비난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으로 누군가를 매료시키기란 참 어려울 것 같다고 막연히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최근, 놀라운 작품을 하나 만났습니다. 매료당했다기보다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를 충격으로 몰고 갔던 책이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라는 소설입니다. 책의 말미에 다다랐을 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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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전적 이야기밖에 쓰지 않는다고 자인했던 아니 에르노는 뜨겁고 격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여성으로, 이 책에서 그녀는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간결한 고백으로 풀어냅니다.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프랑스 독서계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읽어야 하는 글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술 방식이 너무도 사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직 강렬하고 생생한 사랑의 경험들이 틈새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낱낱이 적어내기에만 바쁜 것 같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하고 적확한 단어들을 통해서요.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쓸 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문화예술을 다룬 제 글에는 취향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인물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 글에서 생생한 존재감을 잃고 손쉽게 납작해지는 모습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아끼는 친구에 관한 글을 한편 기고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잔가지들이 전부 소중해지는 것, 그렇게 디테일의 장인이 되는 것, 세부사항들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 구석구석 핍진하게 그려냄으로써 그것이 입체감과 생동감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는 사실을요. 어쩌면 사랑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정확함에 대한 열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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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랑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고 싶어 하고, 정확하게 듣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불완전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근원적인 절망 앞에서 우리는 자주 무너지지만, ‘말’이 아닌 ‘사랑’ 앞에서는 적어도 정확하게 사랑받고(하고) 싶다고 바랄 수는 있습니다. 불완전한 언어는 필연적으로 감내해야하는 것이지만 불완전한 사랑은 누군가의 온기로 잠시나마 해결할 수도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해질 수 없다는 언어의 장벽 아래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정확함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랑은 그 공허를 잠시나마 채워줍니다. 설사 완전함에 가닿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에요. 어쩌면 우리는 밑 빠진 독을 반복해서 채워가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근사하다’는 칭찬의 취지는 ‘가까울 근’과 ‘닮을 사’자를 쓴 근사(近似), ‘거의 같다’라는 의미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27p) ‘정확함에 대한 열정’으로 어떤 사랑을 근사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지난한 과정임이 분명하지만, 결코 정확해질 수 없는 사랑을 근사치에 다다르게 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볼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요. 이 부정확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최대한 근사하게 지켜내는 마음. 그게 사랑인 것 같습니다.


 

[정원사가 심은 씨앗: 사랑]

 

정확함에 대한 열정으로 근사(近似)해지려는 마음.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시는 정확하게 사랑을 말하는 방식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무지개의 색깔을 수만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무지개의 색깔은 사실 7가지가 아니라 무수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따위로만 한정했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의 색깔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시인들은 일상어를 초월한 시적 언어로 그 사이의 색들을 표현합니다.

 

시에서 등장하는 은유라는 개념은 사랑에도 곧잘 적용되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통해 사랑과 은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 내려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은 은유로 시작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언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 입을 거쳐 봄날의 곰(‘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이 되기도, 함께 녹슬어가고 싶은 양철지붕(‘양철지붕에 대하여’, 안도현)이 되기도,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보내진 사람(‘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의 어원은 아직 확정된 바가 없지만 ‘생각하여 헤아리다’라는 ‘샤랑(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속설이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 속설을 좋아합니다.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대부분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니까요. 그들은 도처에 깔린 무엇을 보든 그것을 사랑과 연관시킵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별개의 두 가지의 개념을 엮어내는 일이 바로 은유이고, 사랑은 그렇게 홀연히 찾아오는 은유로 시작됩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될 뿐 아니라 은유와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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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 멋대로 찾아옵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도 모를 민들레 홀씨가 시멘트 틈 사이에 사뿐히 뿌리내리듯이 찾아오지요. 사실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상반된 두 가지의 개념이 연결되고 정의되는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는 B라고 정의 내리는 행위는 일종의 박제와도 같아서, 그 외에 다른 것을 떠올릴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민들레 홀씨의 순간의 판단으로 인해 앞으로의 민들레가 살아갈 삶의 터전은 변명의 여지도 없이 딱딱한 시멘트 틈 사이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에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부터 성격까지 전혀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티끌만한 유사성에 온몸을 내던지고, 어떻게든 엮어냅니다. 그리고 돌연 사랑인 것을 알아차리지요.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든 마침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이미 모든 것이 벌어지고 난 뒤의 일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세상의 수많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쓰이지 않았겠지요. 우리는 이미 사랑에 참여하게 된 뒤에 그것이 사랑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급작스런 판단이 그 뒤를 결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위험한 일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낭만적이기도 합니다. 애석하지만 세상의 많은 역사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덕분에 탄생하기도 하니까요.


 

[정원사가 심은 씨앗: 사랑]

 

은유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은유와 닮아있는 것.

은유란 상반된 두 가지를 하나로 엮어내는 것, 홀연히 찾아오는 것. 찾아온 뒤에야  알아차리는 것. 바로 그런 이유로 위험하고 낭만적인 것.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앞서 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은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들춰냅니다. 이것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물음과도 이어지지요.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이후 저는 쿤데라가 여든이 넘어서 출간한 다른 책, <무의미의 축제>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 이런 구절을 발견합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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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무게가 없고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무의미한 것들 중에서도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가장 눈여겨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삶의 무의미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의미를 부여하는 것, 민들레 홀씨처럼 다가오는 것,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 무의미한 삶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삶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않으면서 의지를 갖고 지속하게 하는 것. 그건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원사의 열매: 사랑



다양한 사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무정형의 사랑을 말하며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고, 외줄타기를 떠올리며 균형감을 유지하며 믿음으로 이어진 관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근사(近似)해지려 애쓰며, 홀연히 찾아오는 민들레 홀씨 같은 사랑에 대해 떠올렸고요. 대단한 깨달음이 찾아올 줄 알았지만 본질은 여전히 밑바닥에 잔존할 뿐, 무르익지 못한 사유로 다 꺼내지 못했다는 알량한 패배감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위대해서, 어느 때이던 패배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라는 사실에 실낱같은 위안을 얻습니다. 일시적 성취가 아닌 지속적 도전의 사랑. 그것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잔속의 출렁이는 물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의 목덜미 뒤의 점이나 따뜻한 다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기면서, 근사해지려 노력하면서, 갖은 은유로 노래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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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or Love. 너를 움직이는 게 두려움이야, 사랑이야? 최근 본 영화, < Tick, Tick… Boom >에서 등장한 대사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그때,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어쩌면 각각의 삶의 모습은 이 양자택일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선택하면 불행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를 택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전자의 경우를 선택했을 때라면 결국 완전한 행복에는 당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이 뒤에 이어지는 노랫말은 “대답하지 마”였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에요. 여태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사랑은 행동할 때 빛을 발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대답하지 않고, 아끼는 시를 하나 첨부합니다. ‘비’의 자리는 언제든 다른 단어로 치환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붇는다


외투는 입고 구두끈은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할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이근화, 소울메이트

 

 

[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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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곤한 개복치
    • 사랑은 나를 움직이는 연료 같아요.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많은 생각과 감정 속에 사랑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불타며 에너지를 내주는 것 같아요. 사랑은 삶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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