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이는 먹되, 잊지는 마세요 [사람]

글 입력 2022.01.1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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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도 없는데 나이만 한 살 더 먹었네.'

 

해가 바뀔 때면 여기저기서 서러움 섞인 한탄이 들려온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이 먹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도 이제 나이 먹는 것이 슬슬 두려워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친구와 연락을 할 때면 '나 아직 젊지?' 혹은 '우리 아직 젊지?'라는 말을 종종 내뱉곤 한다. 이십 대 중반이면 아직 젊은 거겠지 싶다가도 이제 패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찾으려 머릿속에 수많은 '나'들이 복작복작 들끓는 지경에 이른 요즘이다.


새해가 밝자 갑자기 어릴 적 사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어린 시절이 더욱 멀고 낯설게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배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엇이든 겁내지 않던 그 생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저 추억에 잠겨 사진들을 보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어렸을 적에 뚜렷하게 드러나던 나만의 색채가 소모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밀려오는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살갗을 베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젊음이란 상대적인 개념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로 나의 젊음과 그 속에 녹아든 나의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새하얀 도화지를 낙서하는 데 써버린 기분이랄까. 어딘가 찝찝하고 암울한 기분에 잠겨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 꽃을 참 예쁘게도 피워냈구나. 기특해라."

 

그때, 마침 거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들뜬 목소리에 방 밖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뗐다. 엄마가 가꾸던 화분에 못 보던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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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화초가 많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식물을 가꾸는 일, 그리고 정성스러운 보살핌 끝에 피어난 아기자기한 새잎들을 관찰하는 일을 사랑해왔다. 엄마에게 화초란 단순히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주는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날마다 사랑이 가득한 손길로 작은 생명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다정한 말들을 건네고 그들과 교감하는 것. 그것이 엄마의 반려 식물 보듬기 철학이다.


엄마에게는 집안의 화초뿐 아니라 길가에 홀로 외로움을 안고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도, 동네 공원에서 계절의 색깔을 갈아입는 나무도, 매일 아침 집 앞 나무에 앉아 목청껏 안부를 건네는 새 한 마리도, 무리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점박이 길고양이도 모두 교감의 대상이자 친구였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쳐버렸을지 모르는 존재들마저도 엄마의 특별한 선물이 되었고, 엄마만을 위한 축복이 되었다. 물론, 그 누구도 아닌 엄마에 의해서 말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본 엄마의 모습과 지금의 엄마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엄마는 기나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어린아이 못지않은 맑은 눈빛과 순백의 감성은 엄마가 오랜 시간 동안 지켜온 젊음이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문득,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지 않고자 한다면 평생토록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젊음이지만, 세월의 흐름에 휩쓸려 젊음을 망각한다면 그때 비로소 늙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없는 것에 억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 속에 처참히 버려진 젊음을 외면해온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어렸을 때 아빠에게 종종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아빠가 그림을 그려주면 그것을 학교에 들고 가서는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만큼이나 아빠의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아빠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해서 작가를 꿈꾸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어렸을 적의 꿈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걷게 된 아빠였지만, 어린 나에게 그림을 그려줄 때나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신작을 읽을 때만큼은 소년 같은 눈빛이 되살아나곤 했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어가는 아빠의 그림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빠의 젊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번 주말엔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무심한 척 슬쩍 내밀어 볼 계획이다. 우리집 거실에 피어난 엄마의 싱그러운 사랑을 그려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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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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