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단편이어야 하는 이유 -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글 입력 2021.12.1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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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첫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대게 90% 정도 적중한다. 서너 페이지를 읽었을 때,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책들이 있다. 나는 어김없이 그 책들과 사랑에 빠진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내가 첫눈에 반해 빠져버린 책이다. 펼치기 전까지 깨끗한 새 책이었던 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이제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트잇과 연필로 그은 줄들로 꼬질꼬질해졌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자원봉사를 할 때, 단편 애니메이션을 주로 제작한 에릭 오 감독의 GV 행사에서 들었던 말 중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는 말이 있다. 한 관객의 질문에 “단편영화에서 쓰는 영화의 문법과 장편영화에서 쓰는 영화의 문법이 다르다”라는 뉘앙스의 답변을 하신 게 기억난다. 나는 이 말이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는 각자 다른 매력이 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왜 단편소설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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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각종 문학상 수상자들이 거쳐 간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에 실렸던 단편 소설 중, 열다섯 명의 작가가 고른 각자 좋아하는 작품 한 편 들을 묶은 책이다. 수록된 열다섯편의 단편소설 뒤에는 해당 소설을 고른 작가가 자신의 감상평을 기고해, 소설을 한 번 더 곱씹어볼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단편 소설 뒤의 감상평들마저도 너무나 잘 쓰인 한 편의 글이다. 각 단편에 대한 작가들의 감상평은 독자에게 단편소설은 장편소설과 어떻게 다른지, 단편소설에서 쓰는 작가의 언어는 어떤지, 그런 측면에서 해당 단편이 왜 위대한지를 개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거나, 그저 독서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막연히 글 쓰는 것이 좋은 사람이라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의 모든 페이지를 주의 깊게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의 감상평에서는 단편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P30 “단편소설은 개념대로라면 반드시 짧아야 한다. 그것이 단편소설의 어려움이다. 서사를 간편하게 하면서 이야기로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편소설 쓰기와 비교했을 때 단편소설 쓰기의 주된 문제는 무엇을 생략할지를 아는 것이다. 남겨진 것은 반드시 사라진 모든 것을 함축해야 한다.”
 


나는 영화도, 책도 장편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장편은 긴 시간 동안 서사를 쌓아갈 수 있다. 하지만 단편은 인물이나 그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서사를 쌓을 수 없다. 그래서 막연히 단편소설은 몰입이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잘 읽지 않았다. 하지만 단편에는 분명히 단편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존재한다. 단편소설을 선호하냐, 선호하지 않느냐는 취향의 문제이다. 단편소설 특유의 모호함이나 장면의 생략에 매력을 느껴야 비로소 단편소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그 생략되는 부분을 작가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좋은 단편소설과 아닌 단편소설의 차이를 만든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는 “생략”이라는 단편소설의 문법을 탁월하게 사용한 글들이 가득하다.

 

 
P107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긁어야 하는 가려움과 같다. 이런 이야기는 전형적이면서 특별한 감정을 영원히 알려준다. 우리에겐 대답보다 더 많은 질문이, 질문보다 더 많은 대답이 주어진다. 좋은 이야기는 역설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듯하면서도 완벽하게 충만하지는 않다. 주어진 거라고는 조금 더 큰 존재의 작은 조각, 사소한 것들의 집합체, 관점의 전환, 몇 주 늦게 듣는 진술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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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시간


 

열다섯 편의 단편 중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조이 윌리엄스의 “어렴풋한 시간” 이다. “어렴풋한 시간”은 주인공 맬 베스터의 공허하며 방향 없는 외로운 삶을 담아낸 글이다. 우리는 이 60페이지 남짓의 단편소설에서 찰스 부코스키의 시를 읽을 때와 같은 씁쓸함을 느끼고, 끊임없이 소속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맬 베스터의 모습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속 콜필드의 모습을 겹쳐 보기도 한다. 이 단편을 선정한 작가인 다니엘 알라르콘의 감상을 빌리자면, “멜에게 삶은 우연히 발생했고, 충격적으로 가해졌으며, 잇따른 불운은 마침내 망명으로 치달았다.”라고 멜 베스터의 삶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렴풋한 시간”은 간결하다. 조이 윌리엄스는 멜 베스터의 삶을 빠른 속도로 전개한다. 독자는 간결히 제시되는 상황과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대사들 안에서 멜 베스터가 느끼는 공허와 외로움, 죽음을 느낄 수 있다.

 

 
P43 “어떤 일도 그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도 노골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변화하게 한 일들은 흐릿하고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이상하게 거추장스럽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삶을 살게 했다. 죽음은 철저하지 않았다. 죽음에는 선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랑과 책임만 남겨두고 야옹거리며 영영 사라졌다.”
 
 
P59 “믿을 것도 없고 구원받은 것도 없으니까. 태어날 때 머리에 쓰고 나오는 젖은 대망막은 우리를 무(無)로부터 지켜주지 않으며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도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
 

 

“어렴풋한 시간”의 문장들은 마음에 깊게 박힌다. “어렴풋한 시간”의 문장들은 독자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몇 개의 문장으로 누군가의 삶을 체험되는 맬 베스터의 삶. 독자는 이 단편의 몇 문장들만으로 맬 베스터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건 정말 위대한 일이다. “어렴풋한 시간”은 흡입력 있는 문장들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한 사람의 인생에 몰입하게 하는 어려운 일을 해낸다.


어렴풋한 시간 외에도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속 단편소설들은 매력 있고 신선한 문장들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어린 시절 기나긴 여름이 오면 우리의 놀이는 갑자기 불이 붙어 밝게 타오르다가 영원히 사라지곤 했다. 여름은 길고 길어 한 해 전체보다 점점 더 길어졌고, 우리 삶의 가장자리를 넘어 천천히 뻗어 나갔지만 그 광활한 순간마다 결국 끝을 향해 다가갔다. 그게 주로 여름이 하는 일이었다. 여름은 금세 끝날 것처럼 감질나게 우리를 놀려댔고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언제나 뒤로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여름은 언제나 끝이 있었고 그러면서 영원히 이어졌다.”

 

P193 하늘을 나는 양탄자 中

 

 

좋은 문장을 보는 일이 행복한 이유는, 그저 비 오고 후덥지근한 짜증 나는 날이었을 뿐인 여름을 글은 낭만적이며 새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장으로 인해 삶을 곱씹어보게 하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 장거리 달리기라면, 단편소설은 단거리 달리기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마법 같은 글에 사로잡히고 싶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단편소설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읽자.


 

“코니의 고백에 심란해지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해했어야 했다. 친구처럼 코니의 손을 잡고, 꼭 움켜쥐고, 때론 삶이 참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P341 라이클리 호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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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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