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전차는 어디에 도착한 것일까.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공연]

글 입력 2021.12.0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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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서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문화초대가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희곡을 처음 알게 되고,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초대소식을 접했을 때 매우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정 문제로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아쉬움에 개인적으로 공연 일정을 알아봤고, 가능한 날로 예매했다.


관람하는 날, 외출준비를 위해 거울을 보다가 기대를 잔뜩 한 내 얼굴을 마주했다.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극장에 도착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스토리의 무게만큼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대는 스토리의 색을 그대로 담은 듯했다. 희곡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배우들의 캐릭터 이해도와 표현력, 연기력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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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주인공 블랑쉬 뒤브아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극락에 도착했다. 그곳은 블랑쉬의 동생 스텔라가 사는 곳이었다. 희곡을 먼저 읽어서 그곳에서 블랑쉬가 겪을 일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블랑쉬를 향해 ‘어서 도망쳐!’라고 외치고 싶었다.


블랑쉬는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만 머물러있는 인물이다. 밝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싫어하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연연했다. 남의 친절과 호의는 한계가 있고 진심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오롯이 좋은 것만 보고 들었고, 외로움을 남자들의 사랑으로 채웠다.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포장하기 바빴다. 그녀의 장점인 순수한 면은 미성숙함, 자기중심적, 비현실적으로 변질했다.


이런 그녀에게 극락에 도착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불안에 떨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 동생 스텔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마 그녀는 극락에 도착했으니 원하던 세상이 펼쳐지고, 행복한 날들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극락을 위해 욕망을 선택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결국 그녀는 파멸했다. 제가 제 무덤을 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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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잘못만으로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순수한 만큼 누군가의 따스함 하나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극락이라는 유혹에 속아 욕망을 선택했지만, 가족의 품에서 안정감을 찾고 싶은 바람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블랑쉬의 동생 스텔라는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에 눈과 귀가 멀어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스탠리의 사랑과 관심만 있다면 위험에 노출 되도 아니,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스텔라도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스탠리의 행동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현실을 모른 체했다. 스탠리와 함께 살고, 그의 사랑을 받는 현실만 받아들였으며 여기에 안주했다.


이 모든 것은 스텔라의 욕망이었으며 이를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직면하기 싫어서 가족의 진심 어린 충고를 ‘바보 같은 소리’라며 무시했다. 블랑쉬의 불안과 위태로운 모습을 알면서도 언니는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외면했다.


그녀를 외면한 건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악용하려 들고 약자로 봤다. 그러나 블랑쉬가 호락호락하지 않자 자존심에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스탠리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여자라는 이유로 스텔라를 이용하여 해소했다. 나폴레옹 법전 내용을 운운하며 비논리를 논리인 양 떠들어댔다. 사람을 제압할 때 ‘남자’와 ‘힘’을 사용했다. 가정 내에 왕이 존재한다는 나쁜 가치관을 배우자에게 강요하며 왕 자리에 집착했다. 이 모든 것은 스탠리의 욕망이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보다 우위에 섰을 때 느끼는 극락을 소유하기 위해 욕망을 선택한 것이다.


블랑쉬가 오고 난 후, 스텔라가 조금씩 본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극락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에 더욱더 강함을 내세웠다. 이 방법은 도리어 그를 약해 보이게 만들었다. 겉모습은 강해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블랑쉬보다 더 나약해 보였다. 이를 그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더 그녀를 몰아세운 게 아닐까.


극에서는 결국 블랑쉬는 내몰리고, 스탠리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그 승리가 진정한 승리일까. 과연 그의 승리는 영원할까. ‘No’라고 본다.


미치는 블랑쉬의 남들과 다른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 역시 스탠리의 말만 듣고 그녀를 정숙하지 않은 여자라며 버렸다. 미치의 욕망은 정숙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 여자’로 이유를 제기했지만 그가 더 원했다고 본다. ‘정숙한 여자’에는 ‘나 대신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순종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순결한 여자를 원하는 욕심이 숨어있었다.


그는 스탠리를 통해 블랑쉬가 정숙하지 않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신사적으로 굴지 않았으며, 블랑쉬를 강간하려고 했다. ‘정숙하지 않은 여자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라는 또 다른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블랑쉬 곁에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만 있었다. 극 중 인물들 사이에서 가장 순수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자 약자이며, 가장 위태로운  사람은 블랑쉬였기에 그녀가 그들에게 짓밟히고, 파멸한 게 아닐까. 비록 이야기는 블랑쉬만 파멸한 것으로 끝났지만, 뒷이야기에는 스텔라와 스탠리, 미치도 끝내 파멸했을 것이다. 욕망으로 극락을 얻은 인간의 엔딩은 비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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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통해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을 다시 만난 것은 반가움과 색다름이 있는 경험이었다. 느낀 점을 이십 대와 삼십 대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고, 희곡과 연극의 차이를 눈과 귀로 체험할 수 있었다.

 

*


전차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파멸로 가는 지름길에 데려다주는 이동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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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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