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한한 무력감, 욕망의 상실 - 도원경 [영화]

아름답지만 무력한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글 입력 2021.12.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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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제목 <도원경>의 원제 는 스페인어 발음 그대로 ‘하우하’이다. 영화 제목과 공간을 동일시 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본 글에선 영화를 <하우하>라고 지칭하도록 한다.)

 

 

 

1. 하우하라는 공간


 

‘하우하’는 영화 <하우하(도원경)>를 관장하는 중심핵이다. 영화는 공간 ‘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마치 만들어진 무대 위에 배우를 연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하우하’란 공간에 대해 설명한다. 고대 신화의 땅이었지만 이젠 ‘부질없는 전설’이 된 곳. ‘허황’되었으며 ‘지상낙원’을 찾다가 오히려 ‘길을 잃는’ 곳이라 말한다. 표면적으로 취한 웨스턴 스타일에 책임이라도 지듯 영화는 ‘사나이’처럼 본인이 내뱉은 말을 충실히 지킨다. 영화 도입부 설명처럼, <하우하>에는 지상낙원을 찾다가 자신이 길을 잃은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다.


<하우하>를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이곳을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오지, 파타고니아라는 단어로 정의 내리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서사를 정복 하고자 애쓰는 부연일 뿐이다. 영화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복장과 직위, 원주민이 등장하는 설정 등으로 시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스크린으로 그려지는 하우하는 대자연, 오지, 그것을 넘어서는 ‘무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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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기 에너지의 이동


 

영화는 인물의 표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클로즈업 대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직하게 보여주는 풀샷, 그나마 가까워지더라도 배꼽이 겨우 가려진 미디움샷 정도만을 사용한다. 인물들은 그저 몇 발자국 걸어가거나 약간의 팔을 움직일 뿐 동작이 거의 없고, 대사 또한 과한 감정변동 없이 무미건조하다.

 

이 스타중심의 영화계에서 우린 우리가 찬양할 수 있을 정도의 명연기가 나오길 기대하며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한다. 때문에 연기의 활동 범위를 대폭 좁혀 버려야만 그제야 그 외의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곤 한다. 마치 모델들이 옷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무표정으로 런웨이를 걷는 것처럼, 영화는 인물들의 연기를 억제해 그 에너지를 공간으로 이동 시키려 한다.


인물로부터 벗어나야 보이는 것은 역시 ‘풍경’이다. 이끼 핀 돌들로 덮여있는 푸르른 광야, 완만한 능선들이 여러 번 굽이쳐있는 벌판, 풀숲만 가득한 평야 너머 보이는 새파란 하늘. 그 ‘속’에 인물들이 마치 인형처럼 배치되어 있다. 인물이 다소 부수적으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그러니 <하우하>는 지나치게 공간성에 주목하는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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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롱샷과 체험


 

공간에 대한 영화의 궁극적 목적은 ‘체험’이다. 물론 이것은 빨강파랑 안경을 쓰는 3D가 아니며 의자가 흔들리고 물과 바람을 내뿜는 4D도 아니다(너무 옛날 사람 같으니 최신 기술에 맞춰 VR도 아니라고 하자). 영화가 사용하는 것은 실제 지속시간을 보존하는 롱샷 방식이다. 영화는 유독 하우하를 돌아다니는 디넨센 대위의 이동 장면을 많이 보여준다.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왔다가 능선을 넘어 면봉처럼 작아질 때까지 그 이동 동선을 전부 보여준다. 보통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이것이 감독의 어떤 뜻깊은 의도일지에 대해 고뇌하곤 한다. 이 정적에는 필히 무언가의 의미, 예를 들면 아버지의 숭고함이나 고난, 책임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걷고-걷고-사라지는 장면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서사 상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 딸과 함께 떠난 청년은 죽었지만 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여장을 한다는 솔루아가 장교도, 떼로 나타나 반격할 것 같던 코코(원주민)들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는 바위 밭에 혼자 사는 수상한 노인을 만나는 클라이막스(처럼 보이는) 장면 후에도 전개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영화에는, 아니 여기 ‘하우하’에는 어떠한 서사나 인과관계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간간히 발생하는 사건/사고엔 별다른 연관성이나 복선이 있지도 않다. 무언가를 이루든 이루지 않던 간에 어떤 식으로든 끝맺음을 지을 것이라는 드라마틱한 기대. 결국 영화는 애초에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무력화 시켜나가고 있었다.


롱샷을 지속하는 것에 있어 서사 상으론 그다지 중요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아무런 스펙타클 없이 그저 인물이 걸어가고, 걸어오고, 사라지는 것만을 보여준다. 관객이 점점 지쳐 가는데도, 심지어 인물이 밖으로 사라졌는데도 화면은 여전히 말 없는 풀숲을 응시하고 있다. 그 의도적인 정적이 지루하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그때서야 하후하는 비로소 체험의 공간이 된다. 걸어도 걸어도 반복되는 풀숲들, 목적지가 없는 전진, 발버둥 쳐봤자 벗어날 수 없는 광활한 대자연. 그것을 인식한 후부터 하우하는 삶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굴욕되는 거대한 무한함을 느끼게 만든다. 이 공간에서 인간이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차츰 그것을 무력감, 막막함으로 이어지게 한다. 결국 바람이 만들어내는 고요함 밖에 남지 않았을 때,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지상낙원을 찾다 오히려 길을 잃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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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한상실의 세계와 욕망


 

아름다운 풍경 속 마치 황홀경과 같은 도원경, 하지만 반복되는 롱샷이 관객에게 체험시키는 것은 일순간의 지루함,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막막함과 막연함이다. 순수 지속시간을 유지하며 그 ‘느낌’에 차근차근 다다르게 한다.

 

그렇다면 그 막바지에서 치닫는 건 무엇일까? 아름답지만 무력한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는 결국 영화의 막바지에서도 중대하게 던지는 의문이다. 노력이 무의미한 곳에서 인간은 무엇을 원하고, 목표하고, 행동해야 할까.


결국 인물들이 살고 있었던 건 지상낙원이 아니라 무한상실의 세계였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던 오프닝, 피타루가 중위의 자위장면은 그 세계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무력한 그곳에서 피타루가는 ‘원초적 즐거움’을 좇는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인간이 가장 단순하고 쉽게 느낄 수 있는 성적 쾌락을 욕망한다. 그의 씬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그 장소가 탁 트이고 심지어 멀리서 누군가가 보이는 야외 공간이었다는 것인데, 야외 자위를 해도 상관없을 만큼 사람이 적고 사회성이 필요 없는, 다시 말해 굳이 사회규칙을 지키려 애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무武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굴 속 노인의 “무의미한 건 못 참아! 무엇이 삶을 가동시키고 나가게 할까?”라는 외침은 꽤 와 닿는다. 이런 공간에서 ‘굳이’ 욕망하고 노력해야 하나 싶지만, 그러면서도 마냥 무력감 속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다는 일종의 저항성 발언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동굴 속 노인이 미래 세계에서 건너온 그의 딸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나레이션의 대사처럼 그녀는 정말로 무의미한 걸 참지 못하고 탈출에 성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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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우하의 의미-의 필요성


 

<하우하>의 마지막은 별안간 하우하를 벗어난다는 내용이다. 천막과 드레스 대신 거대한 저택과 편안한 잠옷이 있다. 사실 허구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교차시키며 특정 메시지를 던지는 기법에 대해 우리는 흔히 쉬운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 허구 세계의 질문을 현실에 대입시켜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라는 일종의 교훈적 암시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도 저곳 하우하와 다를 게 없어. 이 지독하고 이기적이고 물질화된 세상에서 넌 어떻게 네 삶을 가동시킬 거야?’라는 식상한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다. 굳이 위대한 영화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은 양 자아성찰하고 싶지도 않다.


이것은 그저 하우하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무한상실의 세계로 느껴지는 걸 체험하는 영화이다. 관객 개인이 하우하를 어떻게 대입시키던 간에 영화는 상관하지 않으며, 그 무력함과 막막한 공간성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하우하에 대한 이야기다.

 

 

<도원경, Land of Plenty,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2014, 아르헨티나, 덴마크, 미국, 멕시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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