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머리, 겨털, 가슴 [영화]

12회 광주여성영화제를 마치며
글 입력 2021.11.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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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보는 세상, 모두를 위한 축제. 12회 광주여성영화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광주여성영화제에서 영화 상영 시작 전에 나오는 멘트다. 늘 관객으로만 참가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자원 활동가 ‘귀니’로 여성영화제에 함께하게 되었다.


이번 12회 광주여성영화제의 주제는 ‘선을 넘다’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선을 넘는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다양성과 평등의 시대로 함께 나아가자는 뜻을 담았다. 다양성과 평등을 품은 영화제답게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다양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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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니로 활동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다양한 여성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 여성들과 자연스럽게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원 활동가와 영화를 보러온 관객 모두가 함께 나아가는 기분이 들어 든든했다. 그 점이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첫날 여성영화제 개막작을 보면서였다.


개막작은 윤가현 감독님의 ‘바운더리’였다. 저번에 기고했던 강유가람 감독님의 ‘우리는 매일매일’이 영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바운더리’는 2016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활발히 활동하며 이름을 알린 ‘불꽃페미액션’과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 1장. 밤거리를 걸을 자유



강남역 살인사건은 많은 여성들과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이 죽었는데 세상은 생사람 잡지마라 했다. 여자가 싫어서 죽였다는 자백에도 여성혐오범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각자의 경험을 떠올렸다.


이는 비단 한사람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늘 공포 속에 살았고, 밤길은 늘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 같은 권리를 가진 시민임에도 우리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불꽃페미액션(이하 불펨)은 여성들에게 밤길을 걸을 자유를 돌려주고자 했다.


밤거리를 다함께 걸으며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외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죽음을 애도한다. 늘 겁에 질려 빠르게 지나가기 바빴던 밤거리를 천천히 바라본 여성들은 연대의 힘과 이제까지의 부당함을 다시금 느꼈다.


그렇게 여성들에게 밤거리를 다시 되찾아주고자 했던 불펨은 이후로도 여성들에게 제한된 많은 것들을 돌려주고자 해방을 목 놓아 외친다. 많은 여성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그런 여성들에게 불펨은 ‘싸우고 피켓 들고 시위하는 거,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그거잖아.’하며 ‘행동’한다.

 

 


제 2장. 가슴을 내보일 자유



여성의 가슴은 늘 검열대상이었다. 같은 가슴인데도 남성의 가슴은 괜찮고, 여성의 가슴은 안 된단다. 여성의 가슴을 성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의 탓이다. 그런 사회를 향해 불펨은 길거리에서 당당히 가슴을 내보인다. 경찰들이 그들의 몸을 가리며 연행하려 하자 ‘왜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데요?’ ‘저희 몸이 성적으로 보이는 거냐’며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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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더리>

 

 

그런가하면 공개적인 해변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뛰어논다. 맨 가슴에 바람이 닿고, 파도가 치는 느낌이 어떤지 아냐며 웃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후련하고 즐거워 보여서 속옷 안에 답답하게 갇힌 내 가슴이 불쌍해졌다.


여성의 몸은 늘 신비한 것이었고,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남성의 몸과 그들의 자위가 미디어에서 보다 자유롭게 다뤄지는 것과는 달랐다. 어린아이들은 여성기의 명칭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 여성들에게 불펨은 다양한 여성기를 보여주고, 함께 여성기를 그리고, 쉬쉬하며 우물거렸던 ‘보지’를 소리 내어 말하게 한다.


이제껏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 없던 것들에 하나하나 태클을 걸며 불펨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되찾아주기 위해 싸운다. 여성의 몸은 음란물도, 신비로운 것도 아닌 그냥 인간의 몸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 3장. 털을 기를 자유



여름이 귀찮다. 솔직히 말해서는 제모가 귀찮다. 제모는 귀찮지만 사회의 시선은 더 신경 쓰이기에 여름에도 긴바지를 입는다. 그런 나에게 불펨은 겨드랑이를 훤히 드러내며 자랑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천하제일 겨털 대회’를 개최한다.


서로의 겨드랑이 털을 뽐내며 경쟁하는 천하제일 겨털 대회는 그 단어조차 웃겨서 나도 모르게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겨드랑이를 자랑하고 싶게 한다. ‘내가 개최잔데 우승을 해서 나 출전 정지 먹었잖아. 나를 이길 사람이 없어서.’하며 웃는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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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더리>


 

그런가 하면 친구들이 다함께 모여 머리를 미는 장면은 정말 유쾌해서 객석 여기저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로의 머리를 밀어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은 ‘눈물의 이별식’ 같은 신파가 아니라 한편의 코미디 청춘 영화 같았다.


영화 ‘아저씨’의 한 장면을 따라하며 스스로 머리를 미는 장면에선 사뭇 진지한 표정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고, 가운데만 남기고 모두 밀어버린 머리를 하고서 ‘아, 더 짧게 잘라 주시라고요!’ 장난스럽게 화를 내던 장면은 숏컷을 하려는데 머리를 짧게 잘라주지 않는 미용사를 떠오르게 해 웃음 포인트가 되었다. 삭발을 모두 마친 친구들이 긴 머리의 촬영감독을 손가락질하며 ‘저 사람 머리 좀 봐!’하는 장면도 익살맞고 유쾌했다.


이제껏 페미니즘 다큐 영화나 여성 영화를 보고 나서 누군가 내게 감상을 물으면 늘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진지한 분위기의 영화가 많아서 이를 설명할 마땅한 표현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재밌었어?’라고 물었을 경우 ‘재밌다’는 말을 하기엔 웃음이 나는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에 괜히 답을 망설이게 되었다.


그런데 ‘바운더리’를 보곤 자신 있게 ‘재미있어!’했다. 진지하면서도 정말 재미있었다. 유쾌한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녀노소 자연스레 섞여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내가 괜히 뿌듯했다.


‘이 멋진 여성들은 웃기기까지 합니다!’

 

 


제 4장.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조용히 글을 쓰는 게 다인 방구석 페미니스트인 내게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부담이나 위험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는 그런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을 보는데 그런 댓글이 있는 거야. 어, 302호 여자다. 그때 소름이 쫙 돋았지. 내가 실제로 301호에 살았거든. 그때 진짜 무서웠던 것 같아.’


‘일베에서 너희들 신상이 다 털렸을 때, 나는 거기에 없었거든. 나는 주로 기록을 맡았으니까 내 얼굴은 안 나오잖아. 근데 그게 너무 미안한 거야.’


‘무서웠지. 같이 있을 땐 너무 즐겁고 행복한데. 집에 혼자 돌아올 때, 그럴 때 무서워지는 거야.’


 

그들 역시 두려움에 떨었다.


 

‘그냥 여자들이 살았으면 좋겠어.’


‘그냥 법 같은 거 하나도 모르는 사람도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후회는 없지.’ 

 


그럼에도 그들은 버티고 있다. 여성들을 위해 싸우고, 많은 경험을 전달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의 고생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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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더리>

 

 

그런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펨과 영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마지막 장면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던 순간의 법정 앞이었는데, 그만큼 그때의 일이 여성이 만들어낸 가슴 뜨거운 성과였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

 

저번 ‘우리는 매일매일’을 보기 위해 광주극장에 갔을 때, 사실 같이 간 친구와 단 둘이서 영화를 봤다. 텅 빈 영화관은 지나치게 쓸쓸했고, 스크롤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바라보며 혼자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이번 영화제는 달랐다. 극장을 꽉 채운 사람들이 영화의 스크롤이 올라가는 것을 기다렸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더라.

 

 

불꽃페미액션 몸의해방.png

<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

 

 

더 이상 여성들의 몸 해방은 놀랍거나 꺼려지는 얘기가 아니다.


대머리여도, 겨털을 밀지 않아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여성이기에.


광주여성영화제에서 함께한 시간은 여성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값진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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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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