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감각한다 고로 실존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도서/문학]

글 입력 2021.11.2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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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감각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소비하는 '과학 기술'은 새로움과 분리될 수 없다. 사전적으로 과학 기술은 자연 과학, 응용과학, 공학 등을 활용해 삶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건과 서비스는 편리를 급부로 재화로서 가치롭다. 시장에서는 시대의 새로움들이 경쟁한다. 선택받지 못한 재화는 도태되었다는, 유용함이 유효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끔은 당대의 신세계가 멋졌는지를 반추해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인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A.L. Huxley, 1894-1963)는 1932년 작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는 공상과학소설(SF·Science Fiction)을 통해 고도화된 과학 기술에 젖은 군상을 보여준다. 디스토피아를 견지한 저자는 과학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이 인간다움을 상실시킨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었으나 자본가의 무리한 생산성 추구가 인간 실격을 안겨 주었듯이 과학 기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물질적 생산력이 보장될 때 사회적 의식이 태동한다고 주장했듯이 인간은 과학 기술로 얻은 풍요로 많은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 존엄을 넘어 민주주의가 대두된 것도 지각의 일부인 감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경제학적 시각에서의 과학 기술은 뿌리가 깊어졌고 감각마저 효율성의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제는 메타버스인 세상에서 "왜 감각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저변에 도사린다. 그것이 감각과 유리될 수 없는 예술계가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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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실존하고 있습니까?


 

     

    이상도 해라. 여러 훌륭한 분들이 여기 계시다니! 사람이란 정말 아름다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니 신기하고 훌륭한 세상(Brave New World)이로군요.

     

    - 『오셀로·템페스트』, 문예출판사, 2018, 285면

     

     

    ‘멋진 신세계’란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템페스트(폭풍우·The Tempest, 연대 미정)』에서 유래했다. 갈등과 분노가 용서를 통해 해소되고 사랑과 관용이 폭풍처럼 드리운 템페스트의 신세계와는 달리 헉슬리의 것에는 격앙된 감정이 부재한다. 공유와 균등 그리고 안정을 기조로 한 세계국가의 아래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개인과 부동 상태의 사회만이 있을 뿐이다. 탄생과 성장 과정에서의 생물학 및 심리적 조종은 만인은 다른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미명으로 정당화된다. 일시적 쾌락을 주는 ‘소마’라는 약과 함께 사회 구성원은 철저히 전체주의 구조에서 한정된 감정만을 맛볼 뿐이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중략) “오오, 멋진 신세계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여!” (중략) “오오, 멋진 신세계여! 그러한 인간들을 담고 있는 멋진 신세계여! 즉시 떠납시다!”하고 존이 거듭 말했다.

     

    -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2021, 177면

     

     

    감정은 인간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리고 감정은 ‘앎’을 전제로 한다. 문명인으로서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는 레니나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를 동요케 한다고 믿는다. 실상은 레니나와 같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견지하는 사회명목론적인 입장과 정반대이다. 사회라는 육신과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만이 있다는 사회유기체적인 논리가 근간일 뿐이다. 문명인이지만 세계국가에 회의를 느낀 버나드는 역동적인 사회에 대한 동경을 레니나에게 내비치지만, 그녀는 끝내 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현재에 만족하는 선량한 구성원이 필요한 지도층은 사회에 최소화된 지식만을 전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앎을 낳는다. 문명인 버나드는 상위 계층임에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인식에 의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부정하고자 했다. 인공 부화를 통해 탄생한 문명인들은 계급별로 정형화된 특징을 내재하고 있으나 버나드는 자신의 계급과는 다른 외양을 가졌다. 구성원들은 ‘천편일률’의 기준을 감각하고,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으로써 차이를 차별의 도구로 삼았다. 표류에서 기인한 그의 결핍은 야만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명의 실체 규명으로 나아갔다. 준거집단과 소속 집단의 불일치를 겪은 이가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생한 모순을 고발한 것이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얼마나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여기에 있는가!’ 노래 속의 가사가 그를 야유하듯 귀에 울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2021, 265면

       

       

      한편 인간의 실존이 개인의 만족을 보장하진 않는다. 야만인 존은 고통과 고독에서 벗어나려 문명사회로의 진입을 꿈꿨다. 쾌락으로의 도피는 그를 시험에 빠트렸다. 존이 보고 느낀 문명에는 불쾌가 진정 없었고 감정도 진정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기쁨을 수반하며 불쾌와 유쾌는 대응한다고 줄곧 생각해 온 존은 문명인들이 결여된 주체성 속으로 느낌을 ‘강요’받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실존으로의 계도에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헉슬리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탈피했음을 알 수 있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당위는 인류의 진보에 힘을 싣지 못한다.

       

      실존하기에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실존해야 하는가?” 세계국가를 이끄는 총통은 행복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문명사회는 과학마저 엄격히 통제하며 적절함과 미덕을 제어한다. 문명인 헬름헬츠는 예컨대 바람과 폭풍과 같이 나쁜 기후 속에서 글이 잘 써진다고 말했다. 버나드가 방황하듯이 그도 첩경의 이면을 느꼈다. 헉슬리는 감정의 폭풍(Tempest)을 지향했다. 인간은 발견과 발명을 통해 과학 기술을 생산하고 향유하지만 그것의 가변성을 오롯이 관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존의 자유가 박탈한 세상에서도 버나드와 헬름헬츠처럼 본성에 이끌리는 예외는 어김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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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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