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혐오에는 성역이 없다 - 혐오의 시대 #3

글 입력 2021.11.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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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이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나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해의 끝물에 접어들면 지나간 시간들을 복기해 보곤 한다.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정인이 사건’이었다. 아마 여러분도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양부모의 학대로 입양 9개월 만에 사망했던 아이.

 

작년 10월, 처음 세간에 보도되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던 이 사건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여러 시민단체에서 엄벌을 촉구하는 집회를 했던 모습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1심은 지난 5월에 끝났다고 한다. 양부는 징역 5년, 양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피고와 검찰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했고 현재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결과는 이번 달 말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내게 이 사건이 유달리 인상적이었던 건 단지 학대의 잔인함과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그즈음부터 유난히 아동학대와 관련된 보도가 많았다는 것을 혹시 기억하실까? 지난 3월엔 인천에서, 지난 5월엔 경남에서 초등학생 아이를 부모가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 7월엔 자지 않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20개월 아기를 폭행하여 살해한 후 시신을 아이스박스에 유기한 사건이 보도된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아동학대 관련 보도가 갑자기 많아진 이유를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관련 뉴스 보도가 자연스레 늘어난 건지, 아니면 과거에 비해 올해 유독 아동학대 사건이 증가한 건지. 다만 이것의 이유를 유추할만한 자료는 찾을 수 있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아동학대로 인해 접수된 사건은 8,800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본격적인 통계를 조사하기 시작한 2014년 이래 최고치다. 그런데 올 상반기엔 벌써 7,200여 건의 사건이 접수됐다고 한다. 고작 반년 만에 작년 통계 기록의 83%가 채워진 셈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나라에서 아동학대 관련 사건이 얼마나 빠르게 급증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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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천일보)

 

 

한편 최근에는 인천 영종도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다른 아파트 아이들을 데려다 관리실에 가두고 폭언을 한 사건이 알려져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는 경찰을 부른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앞에다 두고 너희는 커서 도둑이 될 거라는 둥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당연히 아이들은 그의 말에 겁을 먹었고, 이를 알게 된 시민들은 분노했다.

 

생각해 보면 꽤 웃긴 일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파트 놀이터에서 다른 아파트에서 온 아이들을 만나는 건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종종 다른 아파트의 놀이터에 가서 놀곤 했다. 이는 우리에게 그저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더 늘어나는 것뿐이었다. 물론 종종 왜 여기서 노느냐는 시비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같은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지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협박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슬픈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 있어서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건 어른들의 중대한 의무다. 오죽하면 세계 각국에서 어린이날을 만들어 기념하고, 유엔에서도 아동권리위원회를 따로 두어 운영할 정도일까. 말하자면 어른에게 있어 어린이는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면 그러한 성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매년 급증하는 아동 학대 사건이 바로 그 증거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오게 된 데에는 사회 전반에 걸친 ‘혐오’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린이조차 이젠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1) ‘잼민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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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데일리/ebs 트위터)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에는 ‘잼민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 중 하나인 트위치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사실 무례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저연령층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사실상 모든 어린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유튜브에 ‘잼민이’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무례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어린이가 등장하는 영상에조차 ‘잼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새로운 호칭이 곧 혐오의 신호탄이기 되기 때문이다. 틀딱, 맘충, 메갈, 한남 등은 우리가 특정 대상에 대해 가진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욱여넣어 만든 용어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집단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나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추가적인 판단을 하지 않게 만든다. 나아가 이러한 호칭의 반복적인 사용은 그들에게 박힌 잘못된 편견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과정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독일 국민들에게 유대인 혐오를 조장하던 방식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치는 유대인 전용 구역을 설정하고, 유대인들의 가슴팍에 다윗의 별을 강제로 부착함으로써 유대인을 독일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언제든지 식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가짜 뉴스를 지속적으로 퍼뜨려 사람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독일 사람들은 유대인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혐오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다윗의 별과 앞서 말한 새로운 호칭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서로 일맥상통한다.

 

한편 ‘잼민이’라는 단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원래 일부 무례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다. 허나 최근에는 그냥 모든 어린이를 지칭하는 말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제 ‘잼민이’는 단순히 무례와 이기적인 속성을 지적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미숙함, 불완전함 조차도 비아냥 거리는 말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단어가 아무런 자각 없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는 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회에 아이들을 향한 혐오의 감정이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지난 5월 청소년 인권 단체인 ‘위티’는 어린이날을 기념하며 낸 논평에서 ‘잼민이’, ‘‘~린이’, ‘급식’ 등의 용어가 활발히 사용되는 오늘날을 두고 어린 것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물결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각자가 지닌 미숙함과 불완전함을 조롱하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 조정해 줄 것을 함께 요구했다.

 

 

(2) 민식이법은 악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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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도로교통공단)

 

 

지난 2020년 3월부터 민식이법이 시행되었다. 2019년 충남 천안의 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이 법은 운전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실제로 유명 변호사가 해당 법을 저격하고 나서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찬반 논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논란이 종종 아동 혐오로 번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면 스쿨존 내 발생하는 사고 대부분의 원인은 아이들의 무단횡단에 있다며 교통사고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돌리는 듯한 발언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이 법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사고의 피해자 김민식 군을 비하하거나,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를 당한 개념 없는 아이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당연히 아니다. 우선 김민식 군은 무단횡단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고가 일어났던 해당 건널목에는 보행자용 신호등이 없었다. 신호등이 없는데 무단횡단을 한다는 전제는 당연히 성립될 없다. 그에 반해 사고를 낸 운전자는 어떨까? 일단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과속 운전을 한 건 아니다. 다만 그는 횡단보도 앞 정차 의무를 위반했다(실제 판례에 따르면 운전자는 스쿨존 내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를 해야 한다). 적어도 이번 사고만큼은 그 책임이 운전자 측이 더 큰 상황이다.

 

스쿨존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원인이 아이들의 무단횡단에 있다는 것도 어폐가 있다. 물론 아이들의 무단횡단이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2019년 도로교통공단에서 밝힌 통계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동안 발생한 스쿨존 내 교통사고의 ‘횡단 중 사상자’는 49% 무단횡단으로 인해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은 무단횡단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고를 당했다는 소리와 같다. 그렇다면 이 나머지 학생들의 피해는 당연히 운전자 책임이다. 또한 전문가들 역시 스쿨존 내 발생하는 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운전자의 보행자 의무 위반을 지적하며, 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사고를 상당히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단횡단을 많이 한다는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2019년, 서울시 의회에서 밝힌 통계에 따르면 2017~2018년 무단횡단으로 인한 전체 사상자의 30%는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그에 반해 12세 이하 연령의 사상자는 2017년 150여 명, 2018년엔 11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전체의 7%). 13~20세 연령층을 포함해도 2017년엔 300여 명, 2018년엔 200여 명에 달할 뿐이다(전체의 13%).

 

그에 반해 21~30세는? 2017년에만 26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에도 240명이 넘는다. 다시 말해 어른들도 무단횡단을 하다 다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아이들보다 더 많이 당한다. 물론 연령별 인구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통계적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단횡단 사고의 책임을 무조건 어린아이들에게만 모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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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투데이신문)

 

 

나아가 우리는 어린이 보호 구역이 만들어진 취지도 생각해야 한다. 어린이 보호 구역이 왜 만들어졌을까? 우선 아이들은 사회 규범이 완벽하게 내면화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한 번에 제대로 듣는 것도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돌발성도 다분하며, 불완전하고 미숙하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어린이 보호구역은 이러한 아이들의 특성을 십분 고려하여 어른(운전자)이 한발 더 앞서서 먼저 조심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곳에서 운전자가 져야 하는 책임의 비율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정말로 민식이법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고쳐나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자꾸 애꿎은 아이들의 책임으로 몰고, 아동 혐오로 맞대응하는 건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특히 지난 8월에는 국토교통부에서 ‘민식이법 놀이가 유행?! 스쿨존 주의사항 알려드림’ 이란 제목으로 글을 게시했는데 이것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애초에 무슨 기준으로 이러한 놀이가 ‘유행’한다고 단정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케이스를 두고 마치 전체가 그러는 것마냥 호도하는 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또한 안 그래도 민식이법과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가운데 제대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게시물을 게재하는 것은 민식이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강화하고, 피해 아동이었던 김민식 군에게 가해자성을 부여하는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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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노키즈존’ 역시 아동 혐오를 조장할 가능성이 충분한 사례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일부 예의 없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행위를 묵과하는 일부 어른들의 책임이 노키즈존이 만들어진 배경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필요 없는 사실이다. 또한 식당을 운영하는 업주 입장에서도 해당 식당을 어떻게 운영할지는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을 마냥 비난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에 의해 발생한 피해를 전체를 제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정말 옳은 방식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만약 식당 내에서 아이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면 해당 테이블의 손님들을 내보내거나 제재를 가하면 될 일이다. 실제로 현행법에 따르면 식당 주인은 식당 내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문제가 발생했을 시 해당 손님을 내보내거나 필요하면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노키즈존은 모든 아이들이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예의 없이 행동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어린이=무례함’이라는 잘못된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함으로써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혐오를 조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사회 내에서 아동 혐오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동 혐오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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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리스>는 이혼을 앞둔 부부의 아들이 사라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보리스와 제냐는 서로를 지긋지긋해 하며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여 각자의 연인들 곁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때 두 사람이 사랑했던 결과물인 그들의 아들 ‘알로샤’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그들에게 있어 걸림돌에 불과하다. 실제로 제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지인들에게 아들을 험담하기 바쁘다. 또한 둘 중 어느 쪽도 알로샤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 않자 일단 기숙학교에 보냈다가 그다음엔 군대를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보리스도 잘한 건 없다. 그는 알로샤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독실한 기독교도인 자신의 상사가 이혼을 알아채는 것만 걱정한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알로샤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제냐와 보리스는 알로샤가 할머니 집으로 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냐의 어머니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제냐의 어머니는 이제 이혼을 하려 하니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제냐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쏟아낸다. 제냐와 보리스 역시 아이가 사라진 책임을 서로에게 물으며, 언젠가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알로샤를 그들의 집이 아닌, 그들의 애인 곁에서 기다린다. 다시 말해, 아이가 사라진 와중에도 어른인 그들은 오로지 그들의 상황과 처지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런 두 사람에게 3명의 사라진 아이가 나타난다. 첫 번째 아이는 알로샤의 친구였고, 두 번째 아이는 밤사이 공원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경찰이 데려왔다. 세 번째 아이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그곳은 아이들이 사라지는 게 일상화된 세계다. 오죽하면 사라진 아이를 찾아주는 전문 자원봉사단체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를 생각하기 보단 그저 단순한 가출로 치부하며 무덤덤하게 군다. 뒤늦게 그것이 단순한 가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동 혐오와도 닮아 있다.

 

앞서 나는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건들 수 없는 일종의 성역과도 같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는 팽창에 팽창을 더해 그러한 성역의 의미마저 없애 버린다. 그렇다면 보호받아 마땅한 아이들조차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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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닥터 프로스트)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보면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니편 내편이 있지. 하지만 조금 흔들어주면 같은 색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끼리도 알게 되지. 아, 이 사람도 나와 다르구나. 친구, 연인, 동료, 가족처럼 믿고 지내던 사람들도 더는 믿을 수 없게 돼. 서로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깨지고 결국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작가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자신의 책인 <붕괴의 다섯 단계>를 통해 다음의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사회가 붕괴되는 데에는 크게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 금융의 붕괴. 2단계, 상업의 붕괴. 3단계, 정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정치의 붕괴. 4단계, 작은 공동체도 무너지는 사회의 붕괴. 5단계,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문화의 붕괴. 물론 책 내용만 놓고 보면 다소 절망적이지만 작가는 4단계 사회의 붕괴나 5단계 문화의 붕괴만 막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며 낙관적인 견해를 덧붙였다.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한 믿음만 남아 있다면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혐오는 인간을 향한 신뢰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사람들 간의 믿음은 산산이 조각나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그 시점부터는 더 이상 사회를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사실상 각자도생의 단계,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손을 써야만 한다. 혐오에 맞서야 한다. 앞서 나는 혐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두려움이 낳은 분노와 자기 의심 없는 정의감. 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두려움이 낳은 분노’는 1편에서 언급한 이해의 메커니즘으로 맞설 수 있다. 분노를 걷어내고 두려움의 원인을 찾는 것. 이를 통해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 혐오를 극복하는 첫 번째 메커니즘이다.

 

한편 자기 의심 없는 정의감은 반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이 메커니즘을 작동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귀를 열어 우리가 미워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물론 이 과정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허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작은 의심이 때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에게 있어 한 걸음의 성장이 될 것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 닥터 프로스트

 

 

우리는 지금까지 혐오의 원인을 누군가의 잘잘못과 같은 외부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혐오를 더욱 심화할 뿐 해결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밖이 아닌 안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우리 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닥터 프로스트>에서 프로스트의 스승인 천상원 교수는 주인공에게 스스로의 그림자를 직시하며 계속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자, 동시에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메시지다. 앞서 언급한 이해와 반성의 메커니즘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혐오가 가져온 분노와 두려움, 맹목적인 정의감을 걷어내고 스스로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 이를 통해 혐오 사회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혐오를 극복하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反혐오 메커니즘의 완성이다.

 

 

참고문헌

1. 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作)

2. 붕괴의 다섯 단계 (드미트리 오를로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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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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