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 - 슈미

글 입력 2021.11.1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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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드 후작에 관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문화예술은 불가해한 캐릭터들을 통해 형언하기 힘든 인간성을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인물을 향한 접근이 끝내 불가능하다는 결론과 함께 인물과의 좁히지 못한 거리를 무기력하게 관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 시도가 결코 무의미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실패가 상정되었다 하더라도 시도를 멈춰서는 안된다.

 

연습의 진정한 성과는 반복을 통해 드러난다. 끝없이 반복을 거듭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해못할 어떤 공백의 실체를 체감하고 점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불가해함을 다시한번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응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슈미>는 또 다른 의미에서 관객이 시도할 수 있는 인간성 탐구의 새로운 습작을 연상시킨다. 이는, 상술한 푸코의 인용구에서 '괴물'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치환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형언하기 힘들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렇게, 우리의 이성은 한 여인을 통해서 다시금 시험에 접어든다.

 

 

슈미 포스터.jpg

 

 

'헨릭 입센'의 원작(헤다 가블러)을 재창작한 <슈미>는 인간이기에 응당 지양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끝내 지향할 수 밖에 없던 한 개인의 욕망에 관한 비극이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는 친구 사이였지만 저마다의 욕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인간 관계의 추악한 민낯이 폭로된다. 작품은 그 과정에서 역동적인 무대 셋팅과 과장된 표현기법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가득 찬 인간의 욕망과 허영을 조명한다.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슈미를 비롯하여 그녀를 둘러싼 4명의 인물들이 나누는 첨예한 갈등은 과장과 허상이 가득한 시대에 진정으로 견지해야할 인간성에 관한 담론을 형성시킨다. 인간이 이상이라 여기는 것의 허위와, 그 이상마저도 이용하려는 작금의 시대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날선 대화들이 아무렇지 않게 발화된다. 이를 요약할 수 있는 3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긍정'과 '자유', 그리고 나 자신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슈미'(최희진)는 대학 교수직을 목전에 둔 '경만'(조형래)과 함께 이제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신혼의 달콤함을 만끽할 시점에 그녀의 심기는 척봐도 어딘가 영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는, "친절을 사랑으로 착각했다"는 말로서 경만을 진정 사랑하지 않는 그녀의 본의를 요약할 수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나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두 남녀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런던에서 건너온 '애경'(김시영)은 몇일 전까지 자신의 저택에서 입주교사로 근무한 '유완'(권일)의 근황을 들려준다. 런던에서 출판한 저서가 베스트셀러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하던 중 대뜸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옛 친구의 소식은 경만은 물론, 슈미의 이목까지 끈다. 그 와중에 방문한 검사 출신의 '대규'(장재호)는 두 남녀를 각별히 챙겨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자신이 전세 자금을 빌려준 사실을 은연 중에 각인시킨다. 그로부터 몇일 뒤,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유완이 눈 앞에 나타난다.

 

아름다움이란 미명 하에 벌어질 참극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우정과 혐오

구원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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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를 중심으로 거미줄 마냥 어지럽게 구축된 인물들의 사회적 관계는 우정이라는 번지르르한 외피로 가장한 채 각자의 저속한 욕망이 기저에 깔려있다. 박사 학위를 갓 수료한 경만은 정교수 자리를 눈앞에 뒀다고 언급하지만, 아직까지는 외부의 도움없이 사유 재산을 쉽게 확보하지 못하는 처지다. 그 과정에서 슈미를 사랑한다는 일념 하에 그녀의 채우기 힘든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지출을 감행한다("근데, 너무 사치 부린거 아냐?" - 도규 曰) 물론, 경만의 슈미를 향한 욕망이 결코 그릇되었다고 치부 할 수만은 없다. 다만, 오로지 슈미를 향한 그의 주관없는 행위는 클라이막스를 장식할 누군가의 비극을 촉발시키는 단초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비판 또한 피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경만은 줏대없는 어느 지식인의 무능력한 초상만 남긴다.

 

반면, 경만이 자택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검사 출신의 도규는 그야말로 욕망의 화신이다. 경만을 친구로 대하는 척 재력을 통해 그를 압박하는 것은 물론, 두 남녀의 사적 공간을 마음대로 침입하며 관계의 우위를 확고히 제시한다. 여기엔 자신을 삼각관계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자처할만큼 슈미를 쟁취하려는 도규의 날선 욕정이 투영되있다. 흡사 욕구 불만의 수컷을 연상시키는 그의 시선은 시종 슈미를 견지한 채 그녀 곁을 맴돈다. 경멸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슈미의 반응에 아무렇지 않게 네발로 무대를 퇴장하는 몸짓은 욕망에 누구보다 솔직한 도규의 캐릭터를 방증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도규의 아버지가 슈미의 집에서 운전기사로 근무했다는 과거로서, 그녀를 향한 욕망이 단순히 색정으로 치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자신보다 우위에 있던 어느 누군가를 자신의 발 아래에 두고 싶다는 도규의 정복욕이 그가 슈미를 집착하는 또 다른 요인이라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타자(특히, 유완)를 대하는 과정에서 선보이는 지배적 행위는 사실상 도규가 슈미에게 가하는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띈다. 서로를 혐오하는 만큼 균일한 지점들 또한 다분하다는 점에서, 슈미와 도규는 극중에 형성된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극과 극이 공존하는 기묘한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술한 캐릭터들과 달리, 유완과 애경은 사뭇 다른 관계를 형성한다. 애경의 경우, 첫 등장과 동시에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경만과 달리 슈미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며 두 여인의 관계가 이전부터 냉랭했음을 단번에 드러낸다(다만, 그 이상의 적의를 서로가 표출하진 않는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영위할 만큼 어느 정도 속물근성을 보유하고 있는 애경은,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한 유완의 흔적을 뒤쫓올 만큼 경만과 더불어 사랑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가장 순수한 인식을 지닌 캐릭터다. 과거 알콜중독으로 고생한 유완이 자신의 저서 작업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책에 삽입할 그림을 그린 애경은 그 과정에서 유완에게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에게 사랑은 곧,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고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관계일 때 성립 가능한 감정이다.

 

 

"나 너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구원해줘서 고맙다고 했잖아"

"난 그게 사랑이야. 구원이 사랑이야"

 

- 유완 / 애경, <슈미>

 

 

하지만, 유완의 속사정은 다르다. 그는 평소 예측불허한 행동으로 친구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들었지만, 엄청난 재능으로 학창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적당한 선이 없어 늘 끝을 망쳐버린다"는 경만의 표현은 너무나도 충동적인 기질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영위하지 못하는 유완의 천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는 과거 한 여인과의 뜻하지 않은 실연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한동안 알콜 중독에 빠지고 만다. 대낮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던 한 여인의 이미지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왔지만, 시간이 흘러 유완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며 건넨 그녀의 한 마디("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다")는 유완의 연구 주제로 자리잡으며 자유를 구속한 수많은 과거의 사례들을 총 망라한 베스트셀러로 탄생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큰 성공을 앞두고서 결국 천성을 극복하지 못한 유완은 갑작스레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정한다.

 

물론,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유완의 속내는 오로지 슈미만이 알고 있었다.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


  

 

"아름다움은 추악함과 어울리지 않아"

 

- 슈미, <슈미>

 

 

개인을 이해하기 위한 척도로서 과거만큼 효과적인 프리즘은 없다.

 

물론, 과거로 그 사람의 현재를 재단하는 것은 분명 성급한 일반화를 촉발시킬 수 있음을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제3자의 시선으로는 차마 접근하기 어려운 집착과 공허, 그리고 순간의 충동이 기반한 비극의 촉발 과정에는 참혹한 과거사가 기져에 깔려 있음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손쉬운 접근일지 몰라도 슈미가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임을 결국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슈미의 삶은 그녀의 예측 불허한 성격을 형성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애초부터 타인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다는 듯, 상대를 아무렇지 않게 하대하는 안하무인적 태도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그녀의 계층의식을 가리킨다. 경만의 식은땀을 유발하는 주체못할 허영심은 부유했던 과거가 이미 몸에 베일대로 베인 그녀의 붕뜬 현실감각을 대변한다. 과거가 그녀에게 남긴 유산은 결코 건강한 형태가 아니지만, 이 모든 지점들은 이후에 벌어질 비극의 그것과 비교했을때 지극히 사소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슈미의 삶은 부모님의 자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부모님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국면과 함께 혼란으로 점철된다. 친척들에 의해 재산이 분할되면서 삽시간에 빈털털이로 전락해버린 슈미의 유일한 유산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총 2자루다. 하지만, 참혹한 과거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슈미는 되려 2자루의 총을 애지중지 보관하며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으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목숨마저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 수단에 매료된 그녀의 머릿 속에는 그렇게 이상을 가장한 망상 이미지가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는,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죽음을 동일 선상에 놓는 그녀의 광기가 발현되는 순간으로서 암세포 슈미의 이성을 지배한다. 2자루의 총은 그녀를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움에 집착하게끔 유도하는 매개체이자,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과거의 영향 아래에 놓일 것이라는 그녀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이 이상으로 여겨온 아름다움을 슈미 스스로 실현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는 그녀의 앞날과 직결된 복선으로 작용한다. 단언컨데,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슈미, 즉 '슛Shoot 미Me'가 연상되는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과거를 감안했을 때 슈미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조건들을 두루 갖췄다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이와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가 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두보아일 것이다). 하지만, 클라이막스에 달하는 그 순간까지 카타르시스는 커녕, 끝내 공감하지 못할 그녀의 행보를 두고서 짙은 허망감만 관객에게 안길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쌓아올린 업보에 조금도 책임의식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르시즘에 철저히 입각한 태도로서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지향한 나머지, 일말의 죄의식 없이 타인을 파멸로 이끈 그녀의 메피스토적 행보와 직결되는 지점이다.

 

 

 

나르키소스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


 

 

"나도 너처럼 그렇게 자유롭고 싶었어"

"그건 일탈이야. 자유가 아니야"

 

- 슈미 / 유완, <슈미>

 

 

사회성과는 거리가 먼 성격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허영심은 왠만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접근조차 불허할 정도로 강한 슈미의 에고를 드러낸다.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건넨 인사를 무신경하게 응대하는 것은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경만의 처지에 관심이 없다는 듯 피아노 연주자를 고용하자는 의견을 아무렇지 않게 피력하는 대목은 그녀를 향한 관객의 일말의 공감마저 차단 시킬정도로 까다로운 그녀의 기질을 대변한다. 여기에, 타자를 향한 관심과 배려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부조리한 캐릭터성을 배가시키는건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급격히 눈을 번쩍이면서 흥분하는 점이다. 철저히 자신의 관심사 이외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녀의 나르시시즘적 태도는 비극을 향한 1번째 단계를 성립시킨다.

 

슈미는 오로지 나 자신을 사랑한다. 누구의 개입도 존재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에 입각한 나 자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그녀의 이상이며 유일한 아름다움이자 불가결한 진실과 사실상 동일하다. 물론, 작금에 처한 환경에서는 쉽게 이룰 수 없는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그녀는 수긍한다. 경만과 함께하는 모든 신혼 생활은 권태 그 자체로서 자신에게 조금도 기쁨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남편 경만은 영원히 꼬리를 흔들어줄 강아지 그 이상의 존재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경만에게 커튼을 쳐달라는 슈미의 요청은 자신의 이상이 마음껏 꿈틀댈 수 있는 공간으로서 햊빛이 상징하는 아폴론의 질서정연한 이성 대신, 디오니소스의 예측불허한 혼란으로 조성하고 싶은 욕망의지의 발현이 시작된 순간이다. 아름다움을 애타게 갈구하는 그녀가 조금씩 자신의 입맛에 맞춰서 환경에 변화를 가할때 쯤, 자신의 이상을 구현해줄 한 남자가 등장한다. 바로 유완이다.

 

공교롭게도 슈미와 유완 모두 자신의 머릿 속에서 탄생한 허상에 의해 비극을 자초한다. 런던에서 저서를 서술하는 동안 유완은 타인의 시선과 관계 없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자 아름다움이라 깨닫는다. 저서를 완성시키자마자 유완은 자신에게 영감을 안겨준 존재이자 열렬하게 사랑한 여인에게 긍정의 깨달음을 전달하고자 다시 귀국한다. 타인의 눈치 따윈 신경쓰지도 않은 채 알몸으로 사랑을 나누던 그 때 그 순간이 가장 자유로웠음을 슈미에게 설파한 유완이지만, 슈미는 단순한 일탈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는 말과 함께 그의 주장을 부정한다. 그 과정에서 슈미는 알콜 중독에서 갓 벗어난 유완에게 끊임없이 술을 권유하며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가득했던 과거의 혼란 속으로 그를 회귀시키는 시도들을 펼친다. 불행하게도, 슈미와 재회 이후 그간의 잊고 지낸 불안과 혼란의 감정들이 망령처럼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자신을 부정하는 세상으로 투신한다.

 

 

"그럴 때 있잖아. 완벽하다고 믿었던 진실에도 빈틈이 있는 거"

 

- 도규, <슈미>

 


경만의 결혼 축하 파티에서 잠재되었던 쾌락 본능에 몸을 맡긴 그는 도규가 소개한 비밀 모임에서 자행되는 불법 VR 체험을 통해 쾌락의 극한을 맛본 나머지 일말의 이성마저 소멸된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원고를 잃어버리게 만들만큼 유완의 정신을 인사불성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다(아이러니하게도, 슈미의 농간으로부터 유완이 끝내 넘어가지 않게끔 예방해주는 효과로 추후 작용한다).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친구에게 슈미는 "이제 그만 자유로워져"라는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자신의 총 1자루를 건넨다. 자신을 평생 옭아멘 과거의 유산을 아무렇지 않게 유완에게 전달함으로써, 유완 또한 슈미와 유사한 영향 아래에 놓인다. 유완이 떠난 자리에서 그가 간절히 찾던 원고를 손수 파쇄하는 장면은 그녀의 광기가 절정에 달한 순간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유완은 정말 현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진다. 다만, 슈미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유완의 최후는 아름답긴 커녕, 추악하기 그지 없는 과정과 함께 허무하게 끝이난다.

 

아름다움이란 그녀의 진실에 빈틈이 발생한 순간이다.

 

 

 

진실의 빈틈 사이로 매몰된 한 여인


 

 

"난 나의 아름다움을 연주하고 있는거야"

 

- 슈미, <슈미>

 


끝내 자살을 시도하지 못한 유완은 자신의 원고와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자 애경이 머무르는 모텔로 방문한다. 그 과정에서 모텔 주인과의 뜻하지 않은 실랑이 속에서 의도치않게 슈미의 권총이 오발되고야 만다. 도규의 입에서 묘사되는 유완의 최후는 이제껏 본적없는 슈미의 아연실색을 유발하지만, 이는 망자를 향한 애도의 슬픔이 아닌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줄 실험체의 실패를 향한 아쉬움에 기인한다.

 

허나, 유완의 죽음을 촉발시킨 총이 슈미의 소유라는 점과 더불어, 슈미에게 선물한 총알이 유완의 몸에 박혔다는 사실을 도규가 언급하는 순간, 슈미는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을의 위치로 전락당한다. 도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로소 실감한 슈미는 이 모든 사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자인한다. 그렇게 그녀는 도입부에서 닫았던 커튼을 처음으로 개방한 채 암묵적으로 거부한 햇빛의 이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매몰된 진실의 틈 바구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아름다움을 남은 총 1자루로 연주한다.


자멸로 말미암은 슈미의 비극은 결국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을 지닌 그녀의 태도에 기인한다. 슈미는 스스로가 상정한 아름다움, 혹은 진실을 지나치게 맹신했다. 이상을 구현하려는 과정에 너무나도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인간으로서 응당 갖춰야 할 기본적인 윤리의식 마저 내팽개치는 과오를 저지른다. 이 모든 사태를 촉발시킨 슈미의 의식 체계는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는 그녀의 지독한 자만이 기틀로 잡혀있다. 이는, 자신의 비타협적 성격을 형성시킨 과거의 유산으로서 그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주체못할 허영심과 타인을 하대하는 태도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제3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이 모든 정황이 그녀의 기이한 파멸 행위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한계는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관객을 지속해서 시험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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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슈미는 패자이자, 죄인이며, 악마에 준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녀를 어떤 시선으로 견지하느냐에 따라 <슈미>는 조금씩 장르를 달리한다. 윤리의식이 부재한 어느 이상론자의 무모함으로 요약 가능한 뼈아픈 교훈극이자, 과거의 그늘로부터 끝내 벗어나지 못한 어느 필멸자가 운명의 잔혹한 손길로부터 휘둘리는 과정이 묘사된 또 한 편의 현대 비극이다. 그리고, 극명하게 대조적인 두 세계관의 충돌 과정에서 희생당한 어떤 신실한 사제의 일대기로서 또한 포착할 수 있다. 특히, 포도 잎사귀를 머리에 장식한 채 예측불허한 자유를 주도하던 디오니소스의 이미지는 슈미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여긴 전형이라는 점에서 그를 모시는 사제로서의 직함은 더할 나위없이 그녀와 잘 어울린다.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대상으로 발발한 두 신들의 대립은 결국 이성의 위대함만을 방증한 채 일단락난다. 패자를 모시던 사제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서 자신이 모시던 신과 함께 세상과 작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슈미>는 광인을 위한 나라는 현실에 없다는 이성의 엄징한 고언이기도 하다.

 

물론, 시선에 관계없이 슈미를 둘러싼 가장 자명한 사실은 어떤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는 점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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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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