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니셜의 주인을 찾습니다 [도서/문학]

스토커 치위생사보다 작가를 두렵게 하는 것, <덧니가 보고 싶어>
글 입력 2021.11.05 14:4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재화는 용기를 아홉 번 죽였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숨을 확실히 끊어놓았다. (7페이지)



정세랑의 소설은 아찔하게 무서운 구석이 있다. 그는 생활에 아주 밀접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환상적인 설정을 투입한다. 주인공 재화는 첫 단편집을 준비하는 작가이다. 이전에 써두었던 9개의 단편을 엮다가 재화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모든 소설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용기를 죽여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용기에게 딱히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죽이기가 좋아서 그랬다.


재화의 ‘에구, 용기를 또 죽여버렸네’라는 식의 태도에 작게 웃음이 났다. 재화는 한동안 곤란해했지만, 그렇다고 책을 전부 갈아엎을 수는 없었다. 죽는 이를 용기가 아닌 양 바꿔내려면 책을 전부 다시 써야 했다. 이때 재화가 지었을 곤란한 표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내, 재화의 미간을 찌푸린 얼굴은 내 얼굴로 옮겨왔다.


나는 수많은 인터넷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6개 정도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방금 닉네임이자 필명을 세어보았는데 그 숫자도 사실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각 닉네임은 다른 글을 쓴다. 어떤 이름은 일기를 쓰고, 어떤 이름은 소설을 쓴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처럼 문화예술 리뷰를 적는 이름도 있다. 어떤 글은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공간에 적어두었지만, 그마저도 익명으로 남겨두었다. 인터넷 세상에서 온전히 사적인 자료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했다. 한 동물의 이름을 딴 한 이름은 제법 유명하다. 포스타입에서 소설을 오랜 기간 연재해 이제 꾸준한 구독층도 있을 정도로 인기이다.

 

 

[크기변환]KakaoTalk_20211103_222240722_08.jpg


 

다양한 플랫폼에서 수많은 이름으로 게시한 내 글들을 종종 다시 읽어본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혹은 단순히 심심할 때 읽는다. 내 취향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적당히 시간이 지나 다시 읽는 내 글은 언제나 좋더라.


나의 글을 다시 읽을 때면 재미 다음으로 추억이 피어오른다. 집착에 가깝게 기록을 남기는 건 평생의 업이었지만, 습관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감정이 가장 요동치던 그 시기에도 나는 글을 썼다. 내가 그때의 글을 민망해하지도 않고 삭제하지도 않은 건, 모든 글을 가명으로 작성 및 게시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으니, 내가 인터넷에 글을 써온 시간이 대략 7년이다. 그 사이 나의 사랑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도 모르게 짝사랑을 일 년 넘게 지속한 적도 있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확신도 없이 냅다 고백부터 한 적도 있다. 이루어졌든 아니든, 나의 모든 사랑은 매번 나의 글을 흠뻑 적셨다. 황당한 사랑일수록 더욱 그랬다. 아직도 아리송한 어떤 사랑을 각색해 소설로 적었던 적이 있는데, 독자들도 몰입이 쉬웠는지 조회 수가 꾸준히 쌓이고 있다.


이렇듯 나의 모든 사랑은 각종 형태로 온 인터넷에 남았다. 늘 솔직한 글을 쓰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 이야기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혼자 읽으면 저항 없이 키득거리게 될 정도로 우스운 사랑일 경우도 많은데, 난 익명이라는 좋은 방패 뒤에 서 있었기에 딱히 민망할 게 없었다. 모든 글은 경험에 기반을 두고 쓰인다고 하지만, 어차피 독자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이야기인지 알지 못한다. (대학을 배경으로 구체적인 서술까지 하며 30,000자가 넘는 글을 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전국에 널린 게 그런 식의 경영대생 러브 스토리이다.)


익명 속에서 작가는 용감해진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자니 이런 가면이 사라진다는 게 문득 두려웠다. 익명의 가면 없이 내가 솔직하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재화는 온갖 걸 신경 써야 하는 게 슬퍼졌고, 슬프니까 진한 녹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93페이지)


 

[크기변환]KakaoTalk_20211103_222240722_07.jpg

 

 

문화예술 후기를 작성하는 건 여타 글과 다르다. 뉴스처럼 사실만 적을 수 없고, 인터뷰처럼 인터뷰이에게 기댈 수 없다. 콘텐츠 리뷰는 개인적일수록 흥미롭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 된다. 닉네임 없이 ‘김희진’으로 글을 쓰면 어떤 후회가 남지 않을까. 혹은 훗날의 민망함이 두려워서 겉면만 긁어대는 재미없는 글을 쓰면 어쩌지? <덧니가 보고 싶어>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희진은 온갖 걸 신경 써야 하는 게 슬퍼졌고, 슬프니까 배스킨라빈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실제로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은 먹지 못했지만,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었다. 나의 글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밴다. 창문을 아무리 열어놔도 빠지지 않는 섬유유연제의 향처럼, 작가의 글에 사랑만 쏙 빼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용기가 자신의 글을 읽을까 봐 걱정하던 재화도 내용을 크게 수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다. 7년간 쉼 없이 변한 내 사랑의 형태는 어차피 앞으로 변하고, 또 변할 것이다. 다소 민망할 수는 있어도 지금의 사랑을 가감 없이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난 요즘 그런 노골적인 글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여전히 두려운 지점이 남아있다. 결국 책을 그대로 출판한 재화는 용기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책에서 그를 많이 죽였다고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소름 돋는 설정은 치위생사가 재화의 이를 6개나 뽑고 톱까지 준비해두었다는 부분이 아니다. 나에게는 재화의 글이 용기의 몸에 나타났다는 부분이 가장 두려웠다. 그러니 당신이 누구든, 앞으로 내가 사용할 수많은 이니셜 중 하나가 당신 같더라도, 나에게 연락을 주지 않길 바란다.

 

 


결국 절대적 나이라는 건 별로 유효하지 않고, 사회생활 나이가 핵심인 게 아닐까 싶었다. 얌체볼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친구는 언제쯤 지쳐 대충 보조가 맞을까 궁금해졌다. (104페이지)


 

어쨌든 앞으로 사랑을 한가득 눌러 담은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그 시작으로 요즘 하는 사랑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J는 직장인이다. 그렇다고 대학생인 나와 나이 차이가 큰 것도 아니다. J는 아주 단호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다. 알파벳 J보다는 Z가 멋지니 자신의 상징 이니셜을 그걸로 바꿔 달라고 할만한 웃긴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가끔 진지하게 농담을 할 때가 좋다. 아주 오랫동안 J의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해 곤란했는데, 이제 제법 실력이 늘었다.


J와 나는 매우 다르다. ‘매우’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강조해도 좋다. MBTI의 네 가지 요소 중 세 개나 같은 두 사람치고는 상당히 기이한 일이다. 단편적으로는 이렇다. 내가 약속이 있을 때 J는 내가 수많은 지인 중 누굴 만나러 가는지 맞출 수 없지만, 나는 J가 각 요일에 누굴 만나러 가는지 어렵지 않게 맞춘다. 굳이 스토커처럼 발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패턴은 뻔하다. 게다가 나는 어떤 일을 겪으면 꼭 누군가에게 곧장 달려가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해지는데, J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함구하는 경향이 있다.


J와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 서로를 신기해한다. 내가 살면서 단 한 명도 J와 비슷한 이를 만나본 적이 없는 만큼, J도 그렇다고 말한다. 아마 그의 삶에서 나만큼 종잡기 어려운 사람이 없을 거다.


그래서 104페이지의 이 부분을 사진 찍어 J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J는 ‘얌체볼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친구’가 내 쪽임을 알고 웃었다. 그래도 저 요즘 좀 차분하지 않나요? 의문을 덧붙여도 웃음만 돌아왔다. 사실 체력이 좋은 쪽은 퇴근 후에도 꼬박꼬박 운동을 다니는 J 쪽인 것 같은데도 말이다. 용기와 그의 여자친구처럼, J와 나도 역시 절대적인 나이보다는 사회생활 나이가 중요한가 보다.


이니셜이라든지 익명의 자아라든지 하는 말을 몇 가지 털어놓고 나니 후련하다. 단단해진 기분도 든다. 이제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로서 내 이름을 당당히 들고 글을 쓸 각오가 되었다. 이 다짐과는 별개로, 앞으로의 글들에 개인적인 사랑과 생활이 덕지덕지 묻어있더라도 적당히 소설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편이 더 재미있을 거다. 그리고 당연히, J의 정체는 비밀이다.


 

“언젠가 여기 쓴 걸 후회한다고 해도, Y, 내 덧니는 네 거야." (222페이지)

 

 

재화의 멋진 마지막 한 마디처럼, 내 머릿속을 전부 뒤집어 보여주는 글을 언젠가 후회한 데도, 지금은 글을 써야지. 나와, 나의 소중한 이니셜들을 위해서.

 


[김희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