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 윤희에게 [영화]

글 입력 2021.10.26 06:3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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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윤희에게>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눈을 치워보려다


 

그치지 않는 눈이 있다. 모두 치워버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도 치우면 또 쌓이고, 쌓이면 또 치우고, 그러면 또 쌓여만 간다. 그 앞에서는 그저 내리는 것을 무력하게 맞으며, 언제쯤 그치려나- 하고 뱉어 보는 것만이 최선인, 그런 눈이 있다.

 

영화 <윤희에게>는 그치지 않는 눈을 치워보려 하던 사람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동성인 친구를 만나 사랑했지만 원치 않게 헤어진 후, 20년을 넘게 자신의 어딘가를 치우고 덮으며 살았던 윤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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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윤희(김희애)는 어린 시절 동성인 친구 쥰(나카무라 유코)과 연인이었지만 억지로 헤어져야 했고, 일본인 아버지를 둔 쥰은 그 후로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살게 된다. 한국에 남은 윤희는 오빠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해서 딸 새봄(김소혜)을 낳지만, 남편과는 이혼하고 새봄과 둘이 살아간다.

 

쥰과 함께 했던 시절로부터 20년이 흐른 후의 어느 날, 윤희에게 쥰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새봄은 엄마보다 먼저 편지를 발견하고는 엄마를 쥰과 재회시키키 위해 일본 여행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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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더 외로워 보였어.”


 

그렇게 떠난 일본 여행에서 새봄은 엄마에게 아빠를 만나기 전의 연애에 관해 묻는다. 윤희는 그저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는 대답만 하고, 새봄이 질문을 계속하자 이만 나가자며 말을 돌린다.

 

말을 돌리는 습관은 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료코(타키우치 쿠미)와 대화하던 중, 료코가 '달'이라는 소재에 관해 묻자 갑자기 고양이에게 야식을 줘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할 말이 있는 듯 료코의 이름을 불러 놓고는 흔한 고맙다는 말로 원래 하려던 말의 자리를 채워버려서, 료코로부터 “방금 하려던 말 그 말 아니었죠?”라는 소리를 들으며 들키기도 한다. 윤희와 쥰은 스스로에 관한 말을 아끼고, 누군가 자신에 관해 물어오면 말을 돌리는 일이 익숙해 보인다.

 

그러니 이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무언가, 절대 나에게 보여주지 않을,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너네 엄마(윤희)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였어”라는 새봄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렇게 주변인을 외롭게 만들며 가장 외로워진 것은 다름 아닌 끊임없이 말을 돌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던 이들일 것이다. 말해주지 않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입을 다물게 만드는 세상을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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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지는 때


 

하지만 쥰이 편지에 쓴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라는 말처럼, 더는 입을 다무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 그치지 않는 눈을 쓸고 치워내며 괜찮다고, 다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해도, 언젠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지는 때가 꼭, 온다.

 

윤희 역시 쥰이 쓴 문장의 뜻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난 건 한순간의 충동이 만든 일탈이 아니었다. 쥰과 헤어진 후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쌓여온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진 때가 온 것일 뿐.

 

그렇게 필연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윤희는 자신을 꾹꾹 누르던 손에 힘을 조금씩 풀기 시작한다. 한 번도 말하지 않던 카메라에 얽힌 사연을 새봄에게 먼저 말해보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딸 앞에서 처음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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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모습은, 아름다운 것만 찍어서 사람은 찍지 않는다던 새봄이 처음으로 사람을 향해 카메라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란 그런 것이니까.


 

(마사코)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쥰) 고모,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 여기서 산 지 몇 년째인데. 눈 그치려면 멀었잖아.

 

(마사코) 막막하니까. 일종의 주문이랄까? 눈이 와서 치우면, 또 눈이 오고, 치우면 또 눈이 오고. 자연 앞에선 무력해지는 수밖에 없다니까.

 

(쥰) 힘없는 할머니는 계속 쉬고 계세요. 내가 얼른 할게.

 


쥰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가 말한 자연이란, 눈이나 비와 같은 날씨뿐 아니라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도 포함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그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힘은 너무도 꾸준하고 강한 종류의 것이라 사람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자연과 같다.

 

호기롭게 눈을 치우겠다고 나서던 쥰은 영화 말미에 가서는 마사코를 따라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말하며 내리는 눈을 다만, 맞으며 걸어간다.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자신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던 윤희는 영화 말미에서 이제는 "용기를 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본인은 한국에 남으며 "이곳을 떠난 네가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던 윤희가, 바로 그곳에서 그 자신의 모습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고, 행복해지길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그 시대를 살았고, 그 후로도 수십 년을 사랑과 함께 살아온 중년의 레즈비언. 이 영화가 보여주는 용기는 그의 시간을 존중하는 용기다. 과거의 상처를 완벽히 극복해서 이제는 없는 체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 상처에 함몰되어 포기하거나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전에는 숨기고, 모른 척하고,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알아채고 마주 보겠다고 말하며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는 윤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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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은 제41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받으며 수상소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 영화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입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방송을 보시는 분들 중에 아직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모르는 분들도 혹 있을 것 같아서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입니다. 그게 정말 기쁘고요.”
 

 

2021년 한 해,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한국으로서는) 유례없이 많은 퀴어 캐릭터가 다수의 작품에 등장했다. 그러한 변화를 지켜보는 나 역시, 매우 기쁜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윤희가 어디서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워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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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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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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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루
    • 수십번을 본 영화이지만, 기사를 읽으니 또 새로우네요. 문장을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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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지라
    • 영화의 감동에 걸맞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볼때마다 울면서 보는 영화인데, 보고 나올 때는 위로와 희망을 안고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추신. 나도 네 꿈을 꿔”의 꿈이, 과거에 쥰과 행복했던 시간의 꿈 뿐 아니라 행복하길 선택한 윤희가 지금부터 꾸는 꿈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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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옘쌤
    • 정말 여러번 본 영화지만, 글을 읽으니 다시 또 뭉클해지네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쓰시네요. 저장해두고 여러번 보겠습니다. 언젠가는 눈을 치우지 않아도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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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더지
    • 오래 전 본 영화인데 기사를 읽으니 장면들이 떠오르며 먹먹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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