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30년 차이의 두 작가가 '선'에 집중하는 이유 [미술/전시]

국제갤러리 «Park Seo-Bo»전과 학고재 «김현식: 현玄»전
글 입력 2021.10.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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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들어서면 단색의 직사각형들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 보기 전까지는 그저 심플한 단색의 캔버스 같은데요. 그러나 작품의 진면모는 작품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면’을 만들어내는 무수한 ‘선’들을 발견하면서부터 말이죠. 박서보와 김현식, 두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멀리서 보고 또 가까이서 봐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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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Park Seo-Bo»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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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갤러리 «김현식: 현玄» 전시 전경


 

약 30년의 나이차를 둔 두 작가는 꽤 비슷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들의 전시가 현재 60미터 거리의 두 갤러리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유명 갤러리들이 모여있는 삼청동에 위치한 국제갤러리와 학고재. 국제갤러리에서는 박서보의 <묘법> 신작을, 학고재에서는 김현식의 ‘레진 회화’를 전시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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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묘법 No. 130119', 2013,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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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Who Likes Obang Color?', 2021, 에폭시 레진에 아크릴릭, 나무 프레임, 54 x 54 x 7cm x5

 

 

두 작가의 회화는

1) 한 눈에 보기에는 단색의 ‘면’으로 보인다는 점

2) 사실 무수한 ‘선’으로 이뤄졌다는 점

이 두가지 면에서 형태적으로 유사합니다.


그럼 이 무수한 선들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두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도 통하는 점들이 있습니다.

 

박서보 작가는 한지를 두 달 가량 물에 불리고, 세 겹 정도를 캔버스 위에 붙이며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지가 마르기 전, 연필로 선을 주욱 그어 작품 사이즈에 따라 수십개의 산과 골을 만들어냅니다. 마지막으로 한지가 다 마르면 아크릴로 채색해 마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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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묘법 No. 110502'(2011) 일부분,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70 x 230cm


 

이번엔 김현식 작가의 작업 과정을 볼까요? 나무 프레임에 수평으로 레진을 붓고 굳힌 뒤, 송곳이나 칼로 선을 긋습니다. 그 위에 색을 입히고 닦아내면 긁힌 선 위에만 물감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 위에 다시 레진을 붓고, 선을 긋고, 그 과정을 7~10번정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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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Who Likes Obang Color?'(2021) 중 빨강 일부분


 

결국 두 작가의 작업 과정 속 이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오랜 시간, 여러 절차를 거친다

2) 반복되는 행위 즉, 노동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여러 절차, 반복 행위의 이유 혹은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선 박서보 작가는 오랜 기간동안 ‘수행’의 일환으로 <묘법> 회화에 몰두했습니다. 또한 작가는 스스로의 작품을 “수신(修身)하고 남은 찌꺼기”라고 표현합니다.

 

 

“묘법은 도 닦듯이 하는 작업이다. 화폭에 내 생각을 담는 게 아니라,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내는 거다. 그 과정이 일종의 수행이다.”

 

- 박서보

 


작가가 한지를 불리는 것부터 시작해 캔버스 위에 수십개의 골을 파내는 작업은 수행/수신의 과정입니다.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생각을 비우고 나를 비워내는 것이죠.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수행의 ‘결과물’이 아닌 ‘찌꺼기’로 표현한 이유도 결과물을 위해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있기에 결과물이 자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국제갤러리에 가보면 그의 작품이 단지 ‘수신의 찌꺼기’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색' 때문입니다. ‘후기 묘법’ 혹은 ‘색채 묘법’이라 불리는 2000년대 이후 작품에서 작가는 색을 되찾아 왔습니다. 초기에는 흰 바탕에 연필이 주된 재료였기에 대체로 무채색의 작품이 많은 데 반해 현재 국제갤러리에 전시된 2000, 2010년대 작품은 밝고 강렬한 색을 띠고 있습니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박서보 작품 속 '색'은 시대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고 합니다. 2000년대에는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작업 중단을 고려하기도 했다는데요. 그 시기에 찾게 된 것이 바로 ‘색’이었습니다.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박서보는 색을 부르는 이름도 다릅니다. 공기색, 벚꽃색, 유채꽃색, 황금올리브색, 홍시색, 단풍색 등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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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왼쪽부터 공기색, 황금올리브색, 홍시색으로 추정해본다.


 

“색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는 김현식 작가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김현식 작가에게 색은 “공간을 보이기 위한 작용으로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내 작업의 색이나 형은 공간을 보이기 위한 작용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오랫동안 평면 속에 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투명성이 좋은 레진의 선택이 그 가능성을 열었다. 레진의 투명성으로 자유로워진 시선은 화면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안의 깊은 곳까지 자유롭게 여행한다. 

화면의 맨 안쪽부터 겹겹이 쌓아 올린 선들 사이의 투명한 미지의 공간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玄(현)을 본다. 


玄은 색이 아니다. 

玄은 본질과 그 드러나는 현상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율이고 빛을 담은 무색의 공간이다. 

玄은 검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완전한 무색이다. 그 깊이가 아득하여 오묘한 색으로 보일 뿐이다. 


작업에서 무수히 그어진 선들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玄의 공간을 시각화하고 싶은 나의 의지다.


- 김현식

 


‘현’의 사전적 정의는 1. 검다, 2. 오묘하다, 3. 심오하다 입니다. ‘검을 현’의 검은색은 ‘검을 흑’의 검은색과는 다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현'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색이고, 그래서 오묘하고 그 깊이가 심오한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깊이와 공간은 평평한 나무 프레임 위에 어떻게 구현될까요? 레진 한 겹을 쌓을 때마다 그 위에 색색의 선이 새겨집니다. 그 색 선이 없다면 공간도 있을 수 없을겁니다. 투명한 레진 덩어리일 뿐이겠죠. 그래서 선이 있고, 색이 있음으로써 공간이 가시화됩니다.


박서보의 작품은 앞에서 보면 평면 회화같지만 옆에서 보면 부조처럼 보입니다. 캔버스 위로 두껍게 올라온 한지로 만들어진 '산' 때문에 캔버스 앞으로 관람객을 향해 튀어나온 느낌을 줍니다. 반면 김현식의 회화는 겹겹이 쌓인 레이어로 인해 반대로 화면 안쪽으로 무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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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묘법 No. 170827', 2017,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00 x 14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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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Who Likes YJ Color?/L, M', 2021, 에폭시 레진에 아크릴릭, 나무 프레임, 100 x 100 x 7 cm

  

 

두 작가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없어집니다. ‘명상적’이라고 할까요? 박서보처럼 작가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생각을 비워냈듯 보는 사람도 이 반복되는 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잡생각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명상적 요소는 재료입니다. 박서보 작가의 한지는 작가 스스로도 말했듯 빛을 반사하기 보다 흡수하는 느낌입니다. 포근하고 편안합니다. 김현식 작가의 작품에서는 매끈한 질감과 투명한 재질의 레진이 그렇습니다. 작품 앞에 서면 관람자의 얼굴이 비치는데 특히 원형의 레진 조각 300개를 벽에 건 작품 '거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런 효과를 의도한 것 같습니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 너머의 공간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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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거울', 2021, 에폭시 레진에 레진 안료, 레진 프레임, 19(r) x 4(d) cm x 300

 

 

과거 실험적인 회화를 선보였던 박서보와 현재 계속해서 실험을 이어나가는 김현식 작가. 두 작가의 전시가 마침 가까이에서 열리고 있는 만큼 함께 관람하기 좋습니다. 각 갤러리 공간이 넓지 않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두 곳 모두 들린다면 두 배의 즐거움을 안고 돌아갈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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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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